174화
* * *
[한 번만 더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른다면….]
“부른다면?”
[네놈을 베어 죽이겠다.]
녀석의 손에 일던 검은 아지랑이가 어느새 검의 형태를 띠었다.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나 쓸 법한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와 그 모양이 비슷해 보였다.
“어리석군.”
한성이 그의 고지식함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벨루몬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왕께서 돌아오시든 돌아오시지 않든,]
[난 그저 왕의 충복으로서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것이 기사로서 나의 충이며 나의 길이다.]
[그러니 나의 충을… 나의 길을 막아서지 마라.]
스릉.
레그나토르가 한성의 목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숱한 세월에도 검만은 변치 않은 듯 예기를 잃지 않았다.
산이라도 가를 듯 날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고,
검신과 손잡이는 잘 관리되어 녹이라고는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난 너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레그나토르.”
[아까도 말했지만 내 주군은 오로지 한 분이시다. 물러가라.]
레그나토르가 단호히 중얼거렸다.
“곤란하군.”
[물러가라.]
같은 말만을 반복하는 레그나토르를 보던 한성이
한숨을 내쉬고는 왕좌를 조용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저런 뻣뻣하고 고지식한 녀석을 수하로 두다니….
아네스 녀석도 꽤나 피곤했겠군. 아니지. 상당히 피곤했으려나.”
[뭐…?]
레그나토르는 순간 아네스가
항상 자신을 보며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뻣뻣한 녀석, 고지식한 녀석, 피곤한 녀석이 바로 그것이었다.
신이었고, 황제였으며, 누구보다 강한 마물인 아네스였지만
자유분방한 데다 위아래를 나누어 격을 두는 걸 싫어하던 그였다.
게다가 그는 왕좌에 앉아 말뿐인 국정을 논의하기보다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대신들에게 이 모든 것을 일임하고는
직접 마물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그들의 기쁨과 아픔과 슬픔을
나누는 것을 즐겨하던 성왕(聖王)이었다.
이에 레그나토르는 그런 아네스의 곁에서
왕과 신하, 왕과 백성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격이 있어야 하고
다스리는 자는 그에 걸맞은 품격과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며
매번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댔다.
그런 잔소리를 할 때마다 아네스는 레그나토르를 더러
뻣뻣하고 고지식한 녀석이라며, 충성이 과해 피곤하다 말하고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살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투덜댔다.
모습은 같지 않았지만 레그나토르는 한성에게서
어쩐지 아네스의 그 따뜻하고 어진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는 기억마저 나지 않는 그 얼굴이, 그 기억들의 파편이
한성의 말 한마디에 깨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 레그나토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성이 그를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면 아네스가 과연 좋아할까?”
[…뭐?]
녀석의 안광이 팍하고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가 죽어가던 너에게 자신의 영혼 일부를 건네 널 살리고,
데스나이트에 불과하던 널 다크 나이트로 승격시켰다 들었다.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해준 병사가 고마웠기에 그랬겠지.”
[….]
“세계수께 들었다. 원래 그의 품성이 그렇다고.
마물임에도 불구하고 어질고 따뜻하며 점잖은 존재라고.
제아무리 미천하다 해도 자신이 품은 자라면 모두 귀히 여긴다고.”
[…분명 그러셨다….]
“그 덕분에 넌 그때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했을 거다.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이 그저 명령만을 따르던 네가
스스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할 수 있게 되고, 감정을 느꼈겠지.
전에 없던 강한 힘을 가지게 될 수 있었을 테고.
그렇기에 넌 더욱 그에게 충성했을 거야.”
[….]
“그러나 그 또한 필멸자인 것은 마찬가지였고, 결국 죽었겠지.
하지만 그의 영혼을 바탕으로 새로 만들어진 존재인 넌….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세지도 못할 기나긴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을 그를 기다렸겠지. 미련하게도.”
[….]
“다시 한번 묻지.”
왕좌를 바라보던 한성의 시선이 레그나토르에게 향했다.
“지금의 네 모습을 보고 과연 아네스가 뭐라고 할 것 같은가.
변치 않는 충정에 감동해 기뻐할 것 같은가. 아니면….”
한성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미련한 녀석이라고 왜 그랬냐며 화를 내고 다그칠 것 같은가.”
[…후자…이시겠지. 주군은 그런 분이셨으니.]
한성의 목에 겨눠졌던 그의 대검이 힘없이 내려갔다.
“너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다만… 처음 겪은 일이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겠지.”
[….]
“비록 그와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한 나지만,
세계수님의 말씀과 네 반응을 보아하니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그게 무엇이냐?]
“아네스는 네가 이러고 있는 것을 원치 않을 거다.”
한성이 담담히 답했다.
* * *
“레그나토르… 있느냐….”
침상 위에서 아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 힘차고 당당하던 그의 목소리가 꽤나 미약해져 있었다.
“예. 주군. 신 레그나토르 여기 있나이다. 하문하소서.”
아네스의 그림자에 스며들어있던 레그나토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침상 위에는 보무당당(步武堂堂)하던
아네스는 온데간데없고 늙고 병들어 초라한 아네스만이 있었다.
팽팽하던 피부는 어느새 늙고 낡아 주름져 있었고,
터질 것 같던 근육들은 어느새 빠져 초로(初老)의 노인이 돼 있었다.
그에게도 죽음이 찾아오고 있는 듯했고,
그 또한 그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듯 보였다.
“난… 얼마 지나지…않아…곧… 죽을 것이다.”
아네스는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런 말씀 마소서. 주군. 영생을 누리실 것입니다.”
레그나토르가 당치도 않은 말이라는 듯 힘차게 대답했다.
“후후… 그건 불가능하다… 알지 않느냐.”
“…어찌 약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레그나토르가 힘겹게 대답했다.
“날… 날… 일으켜다오….”
아네스가 입을 열었다.
레그나토르의 도움으로 누워있던 아네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후우… 일어나 앉는 것도 힘들군….”
“곧 쾌차하실 것이옵니다. 심려치 마소서.”
“그런가. 후후… 그래. 알겠다.”
레그나토르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네스가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우선 앉거라.”
“종 된 자로서 주군과 같은 높이에서 대화할 수 없습니다.”
레그나토르가 답했다.
“…화병으로… 죽기 전에… 얼른 앉아.”
“…예.”
아네스의 말에 레그나토르가 곧게 앉았다.
“난… 다른 것 보다 네 녀석이 제일… 걱정이다….”
“…어찌 그런 감당키 힘든 말씀을 하시나이까.
저 같은 것보다는 황자 전하를 걱정하셔야 합니다. 주군.”
“후후후… 아니… 아니다. 녀석은… 이미 장성했고….
나 못지않은 무력과 나보다 더 나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
심성도 착하고 어질어. 녀석은 머지않아 좋은 왕이 될 거다.
내가… 녀석을… 걱정할 필요 없지.”
“그렇습니다. 주군. 황자께선 참으로 그러십니다.”
“…그러나. 넌 아니다….”
“그게 무슨…?”
“…이변이 없는 한… 넌…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다… 아주 천천히… 사라져 갈 거다….”
“….”
“이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잘 모르겠구나….
허나… 너의 모습을 보니… 난 어쩐지… 저주 같…기도 하구나….”
“….”
“내 대가 끊어져 사라지는 그 순간이 찾아와도….
넌 죽지 못하고 날… 그리워하며 내 곁을 지킬 것 같구나….”
“….”
“그렇기에… 본의 아니게 널 그렇게 만들고….
너와 함께 가지 못함이… 미안하고… 또… 많은 걱정이 드는구나….”
“…그런 말씀 마소서. 주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전 제 존재가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주군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다 소멸할 수만 있다면 제겐… 더없이 큰 영광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하게 해주소서. 그것만은 제게서 앗아가지 마소서.”
레그나토르가 침울하게 답했다.
“…그러지…마라… 그러지 마….”
아네스의 눈이 침울해 보였다.
“…어찌 그러십니까.”
“너에게… 새로운 생을 준 것이… 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내가 너의 생을 좌지우지할….
그… 권리가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어.”
“그런 말씀 마소서. 주군. 주군께서 절 구해주신 그 순간부터,
제 삶은… 그리고 제 모든 것은 주군의 것이 되었나이다.
그 은혜를 다 갚지조차 못했거늘… 어찌 이러십니까.”
“후후… 고지식한 녀석… 죽어가는 날 상대로 또 잔소리냐….
덕분에 더 피곤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구나….”
“소… 송구합니다. 주군.”
어쩔 줄 모르는 레그나토르를 보며 아레스가 웃었다.
“후후… 즐겁구나.”
“….”
“레그나토르….”
“하문하소서.”
“내가 죽거든… 너의 삶을 살아라….”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이다.”
“…아네스의 수호 기사라는….
이름으로 남으라는 것이 아니라,
레그나토르라는 멋진…이름을 가진….
너만의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알겠…나?”
“….”
“내 아들과… 내 후대 녀석들의 수호기사로 남지 말고….
가족을 이루든, 너를 거두어줄 수 있는 자를 만나든….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나 그들과 여행을 떠나든….
너만의 삶을 살라는 뜻이다… 알아듣겠나.”
“….”
아네스의 말에도 레그나토르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떠나보내려는 주군이 야속하게만 느껴졌기에.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바보 같은 녀석….”
아네스가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세계수에게… 혹시 몰라 너를 부탁해… 두었다.”
“…그게… 무슨 의미이신지….”
“네 녀석이 날 떠나지 않고… 바보같이 홀로 살고 있거든….
가족을 만들어 주라고… 하다못해 친구라도 만들어 주라고 말이다.”
“가족도, 친구도 필요치 않나이다.”
“후후후… 한 치 예상도 벗어나질 않는구나….
그래… 고지식한 네 녀석이라면 그리… 답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세계수에게… 날 대신할 이를 찾아 달라 말해 두었다.”
“….”
“주군을 대신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먼 훗날… 나의 것을 가지고… 누군가 널 찾아올 것이다.
그를 시험해보아라… 그리고 만약 그가 그 시험에 통과한다면….”
‘설마….’
“그를 너의 새로운 주군으로 삼거라….”
“…어찌 제게 그런 불충을 저지르라 하시나이까!!
제 주군은 거룩하신 아네스 님 오로지 당신 하나입니다.
말을 거두어 주소서. 제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주군.”
레그나토르가 소리치듯 대답했다.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는 듯이.
“후후… 내 말은… 여기까지다.
이는… 신하인 네게 남기는 주군으로서의 마지막 명이며,
친우인 네게 남기는 내 마지막 부탁이다. 부디… 지켜다오.”
“…어찌….”
“피곤한 네 녀석을 상대하다 보니 졸음이 쏟아지는구나.
한숨 자야겠으니… 이만 물러가 있도록. 후후….”
“…예. 주군.”
아네스가 잠을 청하려 몸을 돌리자,
이불이 흘러 내렸고 앙상한 뼈만 남은 그의 몸이 보였다.
이를 본 레그나토르는 가슴이 미어지고
뭔가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에 놀란 레그나토르가 황급히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지만,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슬픔이라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루 뒤, 아네스의 장례식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