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170화 (170/336)

170화

* * *

살벌한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4군단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4… 4군단장 보고드립니다.”

“그러도록.”

트롤의 하문에도 4군단장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를

수 회 반복할 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고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

이상한 낌새에 트롤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사시나무마냥 벌벌 떨고 있는 트롤 하나가 있었고,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는 부적에 새겨진 문양과 글씨 같은

붉은 문신들이 요란하게도 새겨져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가. 4군단장!! 대답을 기다리고 계시지 않은가.”

1군단장이 답답했는지 4군단장을 다그쳤다.

“조용.”

트롤이 1군단장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4군단장. 현황에 대해 보고하라.”

“…시… 신이시여. 제 무능을 벌하여 주소서.”

쿵.

4군단장이 엎드려 떨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설명하라.”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엎드렸던 4군단장의 머리가

누군가에게 잡혀 들어 올려지기라도 하듯 솟구쳤다.

“제… 제4 언데드 군단 휘하 전력이 10만이 채 되지 못합니다.

현재 있는 병력이라 해봐야 어둠의 족속들인 흡혈귀들뿐입니다.

신께서 절 믿고 맡겨주셨으나 제 능력이 미천하여

군단의 세력을 늘리는 것이 불가했나이다. 부디 죽여주소서.”

“…시간을 꽤나 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트롤의 손가락이 왕좌의 손잡이를 딱딱 내리쳤다.

“…무능한 절 죽여주시옵소서.”

그의 얼굴에 짙은 두려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언데드 군단의 주축이 될 리치들을 복속시키지 못했나이다.”

“…왜지?”

“리치와 그들의 상위 존재인 아크리치들은

그들의 주인이자 왕인 리치 킹의 명만을 따릅니다.

이는 영혼과 영혼을 엮어 복잡하게 맺어진 계약이기에

리치 킹이 아니면 계약을 풀 수 없고 이를 억지로 풀려 한다면

그 자리에서 리치들은 모두 소멸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기에 일반 리치들이나 아크리치들이 아닌

리치 킹에 접근해 신의 힘을 보여 복종하라 명하려 했습니다만….

송구하오나, 대화는커녕 그들을 만나지조차 못했나이다.”

“만나지조차 못했다…?”

“예. 그들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나이다.”

“너의 탐지를 피하거나 빠져나갈 수 있는 마물은 몇 없을 것이다.

하물며 리치 킹도 아닌 리치나 아크리치 따위라면 더욱 힘들겠지.

그런데 그들의 흔적을 찾지도 못했다…? 뭔가가 가로막고 있나 보군.

놈들이 세계수의 곁에 숨어 있을 확률은 없나.”

그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마기와 사기의 결정체라 불리는 리치들이

세계수의 권능을 이겨낼 수 있을 리 없나이다. 신이시여.

게다가 그들의 존재를 멸하는 한이 있어도 위치를 찾아내려

그들을 소환해보려고도 해봤지만… 그들이 거부했나이다.”

“거부를 해…? 너를?”

“…예.”

“재밌군.”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마력의 흔적을 찾으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으나….

조금의 흔적도 찾지 못했나이다. 무능한 저를 벌해주소서.”

4군단장이 벌벌 떨며 중얼거렸다.

“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군. 재밌군… 재밌어.

그러나 대업을 이루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아니다. 일어나라.”

“ㅇ… 예.”

“조악하긴 하나 잠시나마 날 담아낼 몸을 만들고

관리, 조달한 너의 공을 높이 사 널 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너만 한 재능의 사령술사를 찾기도 힘드니,

너에게도 공평하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기회겠지. 실망시키지 말도록.”

“신의 자비로우신 은혜… 반드시 보답하겠나이다.”

그제야 창백했던 4군단장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치가 아니더라도 불사의 마물들은 차고 넘친다.

그들을 복속시켜 빠른 시일 내로 너의 군단을 구축하라.”

“명심하겠나이다.”

“마지막이군. 5군단장.”

“예. 제5 야수 군단의 출정 준비가 모두 끝났나이다.

2, 4군단장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키메라 10만기,

코카트리스, 바질리스크, 와이번 등의 마물 40만 도합

50만의 정예 야수병들이 훈련을 마치고 출격 대기하고 있나이다.

3, 4군단장들의 전력 부재를 제가 채우겠나이다. 걱정 마소서.”

사자와 인간을 반쯤 섞은 듯한 외모의 5군단장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성과를 보고했다.

2m 키에 온몸 가득한 구릿빛 근육.

발광하듯 빛나며 휘날리는 황금빛 갈기.

왼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와 허리춤에 찬 두 자루 중검까지.

그는 노련한 전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수고했다.”

“당치도 않으십니다. 신이시여. 당신께서 세우실 그 세상, 그 나라에

제 한 몸 누일 곳 있다면 이따위 일쯤 수백, 수천, 수만 번을 해도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나의… 어머니….”

5군단장의 눈에 희열이 가득했다.

“후후… 고맙구나.”

슥.

의자 위에서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듯

군단장들을 내려다보던 트롤이 몸을 일으켰다.

척.

군단장들은 이에 곧바로 무릎을 꿇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철퍽.

녹아내린 피부와 함께 피인지 체액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림에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한 계단 한 계단을 내려오며

중얼거렸다.

“약속의 시간이 머지않았다.”

“…!”

“드디어…!”

“아아… 어머니….”

군단장들의 얼굴이 환희와 기쁨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아아… 어머니. 마(魔)의 시작과 끝이시여.”

2군단장이 오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댔다.

“녀석은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난… 소멸되지 않았다.”

“아아… 어머니 나의 어머니….”

“보아라! 사라져버린 것은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다.”

“맞습니다!!!”

3군단장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잃었던 힘을 되찾았고, 떠나보낸 아이들을 다시 품게 되었다.”

“영생을 누리소서!!!”

“녀석의 몸을 찾아 그 살과 피를 취하고,

저물었던 내 시간들을 펴 두 반석 위에 군림하리라.”

“아… 어머니… 뜻대로 하소서. 울며 좇겠나이다.”

“하하하하하.”

트롤의 광기에 찬 웃음이 밀실에 울려 퍼졌다.

* * *

같은 시각. 한성의 길드 지하 2층.

“간만에 뵙습니다. 세계수 님.”

세계수를 찾은 한성이 나무에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그래. 아이야. 너도 잘 지냈니.”

한성의 말이 그녀에게 닿은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전신으로 대답하기라도 하듯

세계수의 가지와 잎들이 작게 흔들렸다.

사악

뿌리에서부터 피어난 흰 빛무리는 뭉쳐져 환한 빛을 뿜어냈고,

빛이 사라지자 그곳엔 전과 같은 모습의 세계수가 서 있었다.

“간만이구나. 후후. 건강해 보이고.”

“덕분입니다.”

“갈수록 너의 힘은 이 늙은이가 감당키 어려워지는구나.

그 힘에 먹힐까 걱정도 했지만, 잘 다스리고 있는 것 같고.”

한성의 그림자를 바라보던 세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날 찾았니.”

세계수가 온화한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도 있고, 묻고 싶은 것도 있어서 말입니다.”

한성의 진지한 표정을 본 세계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세 풀과 여린 나뭇가지로 만든 의자를 만들어 냈다.

“그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구나. 앉으렴. 후후.”

“네.”

자리에 앉은 한성은 자신이 알아 온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단절되었던 두 세계 사이를 다시 연결한 것과

인간 세계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예고한 것 모두가,

동일한 존재인 마신의 짓이라는 말로 한성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계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미소가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씩 그 미소가 사라져갔다.

또 인간과의 전쟁을 위해 마물들을 유혹하고 타락시켜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그 수를 점차 늘려가고 있다는 것과,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힘과 세력이 강해져 간다는 것을 말했고

세계수에서 뭔가를 찾으려 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랬구나.”

한성의 말을 들은 세계수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제가 알아 온 것은 여기까지이며 궁금한 것은 네 가지입니다.”

“…말해보렴.”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첫째. 마신과 투르바와의 관계. 둘째. 마신의 목적.

셋째. 마신이 찾고자 하는 것. 마지막… 세계수 당신의 뜻.”

“….”

세계수가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느냐.”

한참의 침묵 뒤에야 세계수가 영문 모를 소릴 했다.

“예. 어렴풋이는….”

한성은 세계수의 뜻 모를 소리를 이해한 듯 담담히 답했다.

“….”

“인간 세상과 마물의 세계의 시작을 함께한 자.

마물의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자. 모든 마물들을 품는 자.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현명한 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자.

그런 당신이 마물의 세계에 일어나는 일을 모를 리 없습니다.”

“….”

“그런데도 그런 당신께서는

제게 아네스와 투르바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고,

세계를 어지럽히는 마신에 대한 것을 알아보라 하셨으며

북쪽에 단서가 있으니 이를 찾아보라 하셨지요….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안배였을 겁니다.”

“….”

“당신은 제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내기를 원하셨으니까.”

한성이 말을 마치자, 세계수는 또다시 한참을 침묵했다.

한성은 그런 세계수를 말없이 기다렸다.

“현명한 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그 작은 단서들만으로도 이렇게까지 생각해내다니….

생각보다 이르기는 하나… 그래… 하나하나 답해주마.”

“예. 부탁드립니다.”

“…너도 예상했겠지만… 마신은 아마… 투르바…일 것 같구나.”

세계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해 전, 심연의 절벽 아래에서

아주 기분 나쁘고 지독하리만큼 사특한 힘이 피어올랐단다.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한시도 잊은 적 없는….

더럽고 추악한 그 힘이….”

“그게 투르바의 힘이었습니까.”

“그래. 그랬단다.”

“하지만 투르바는 아네스와의 대결에서 패해 자멸했다고….”

“…분명 그랬었지.”

“…?”

“속인 것이겠지. 그녀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아마 제 힘의 대부분을 버리고 소멸한 척했을 거다.”

“아….”

“그리고는 적당한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을 게다.

그러다… 이렇게 그 저주스러운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일 거고.”

“….”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피어오른 그 힘은

마물의 세계에 널리 퍼져 마물들을 유혹하고 타락시켰고,

그 힘에 취한 마물들은 심연의 절벽 아래로 모이기 시작했단다.”

“….”

“모인 마물들이 셀 수가 없어지자, 포탈이 열렸단다.

그리고 그 마물들 모두가 포탈 너머로 진군해 넘어갔지.”

“…그게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이었군요.”

“그래. 그때부터였단다.”

세계수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래서 난 그 사특한 힘이 더 퍼지기 전에 안간힘을 다해

내 권능으로 세계수 전역에 뿌려진 그녀의 힘을 정화했단다.”

“….”

“하지만 내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단다.

내 힘이 미치지 않는 구역으로 그녀의 힘은….

마치 전염병처럼 쉬지 않고 조금씩 퍼져나갔으니까.”

세계수의 말은 아크리치의 말과 내용도 시기도 일치했다.

“인간의 세계로 넘어가는 마물들의 수는 많아져만 갔고,

거기엔 인간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마물도 있었지.”

“….”

“힘에 부치고 지쳐버린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할 때쯤….

그분께서는 날 도와줄 조력자들을 만들어 주셨단다.”

“…설마 그게 우리… 인간입니까?”

한성의 눈매가 좁혀졌다.

“…그래.”

“….”

“그러나 많은 인간들은 눈앞에 닥친 마물들로부터

자신의 안위와 생존만을 위해 싸우고 또 싸울 뿐이었단다.

어찌 보면 그것이 당연한 일이겠지. 생물의 본능이니까.”

“….”

“그래서 기다렸단다. 인간들이 힘을 갖추고 안정을 찾으면,

왜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원인이 무엇인지 찾을 거라 생각했거든.”

“….”

“그러나 찾지 않더구나. 아니 애초에 관심도 없었어.”

“….”

“아네스의 오른팔이자 대주술사인 바바라의 예언이

모두 틀렸다 생각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려던 그때….”

“….”

“그때 네가 나타났단다.”

세계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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