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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스트 엠페러-154화 (154/336)

154화

* * *

콘스탄틴이 애림에게 혼나던 그 시각. 벨루몬의 성.

척.

“…지엄하신 왕을 뵙습니다.”

한성이 벨루몬의 성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

철판을 긁는 듯한 소리 수백이 성 아래에서부터 들려왔다.

그들의 음성은 벨루몬의 것과 같이

음산하고 소름 끼쳤고 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수백의 목소리는 마치 기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그리고 동시에 들려왔다.

한성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기엔 오와 열을 맞춰

네모반듯하게 사열한 마물들의 군대가 있었다.

리치와 아크리치 백여 마리가 일렬로 맨 앞줄에 서서

한성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고

그 뒤로는 다양한 종류의 언데드 마물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한성을 맞이하고 있었다.

벨루몬이 만든 것만은 못했지만

고위급 마물에 속하는 데스나이트가 천 정도였고,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아 꽤나 처치 곤란인 레이스들과,

강화된 구울과 좀비, 스켈레톤 메이지와 병사, 골렘들까지.

이만은 가볍게 넘는 듯한 마물들로 성 아래가 꽉 차 있었다.

한성을 위해 열병식을 준비하기라도 한 것일까.

“어떠십니까. 주군. 불사의 군단입니다. 후후후.”

벨루몬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성을 바라보았다.

마치 주인에게 칭찬을 바라는 애완동물의 모습이랄까.

“…솔직히 생각 이상이군. 잘해주었다.”

한성의 눈이 반짝였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후후… 감사합니다.”

한성의 칭찬 한마디에 만족한 듯

웃음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벨루몬이었다.

“이렇게 빨리 녀석들을 제압해 끌고 올 줄은 몰랐다.”

“아직 사냥은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주군.

이들은 제 명을 듣는 제 수하이며 권속들일 뿐입니다.”

“호… 그래?”

“예. 주군께서 제게 새겨주신 복속의 인보다야 약하지만,

저들 또한 영혼을 묶어 만든 계약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게 반역이나 반항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런가.”

한성이 눈앞의 리치들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그랬어야 했습니다.”

“음…?”

“이들은 이제 저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저 저들을 통솔하는 무리의 대장 격일 뿐입니다.”

“무슨 말이야.”

“저들의 가슴팍을 봐주시겠습니까?”

벨루몬의 앙상한 뼈 손가락이 리치들을 가리켰다.

“오.”

리치들의 갈비뼈에 검은 불꽃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제 권속들이다 보니 주군과 저의 계약에

저들 또한 그 영향을 받는 듯했습니다.

오늘 불러보니 제 계약은 사라져 있었고

녀석들의 혼은 주군과의 계약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 말인즉 저들 또한 당당한 주군의 병사들이란 뜻이옵니다.

주군의 힘의 끝이 어디까지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나이다.”

벨루몬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의 것을 빼앗은 것 같아 좀 미안한데.”

한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주군.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저의 모든 것은 오롯이 주군을 위한 것이옵니다.

필요하시다면 그 무엇이든지 그저 편히 쓰소서.

만일 주군께서 왕이 되시는 데 제 심장을 필요로 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제 심장을 으깨어 주군께 드릴 수 있나이다.”

한성의 말에 벨루몬이 급히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예.”

벨루몬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성싶다는 생각에

한성이 기겁하며 이를 말렸다.

불사의 군단에게로 한성이 눈을 돌렸다.

인상적이었다.

어마어마한 수를 자랑하는 언데드들도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역시 리치였다.

그들이 없었다면 언데드 군단은 불가능할 테니까.

아크리치 20에 리치 80. 상당히 고무적인 숫자였다.

한성이 꿈에 그리던 마법병단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그것도 적에게 악몽과도 같을 네크로맨서 마법병단을.

녀석들 하나하나는 벨루몬에 비하면

그 힘과 수준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벨루몬은 저들을 짓누르고 왕위에 오른 리치 킹이고,

저들은 벨루몬에 복속된 수하들에 불과했으니까.

또한 벨루몬은 한성의 힘을 받아 더욱 강해졌고

리치라는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근원적 한계마저 뛰어넘었으니

저들과 비교가 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봐도 그들의 무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리치들은 마에스트로 최상급에서 언터쳐블 중급 정도였고

아크리치들은 언터쳐블 중급에서 엠페러에 달하고 있었으니까.

한성의 수하가 되면서 녀석들의 격이 높아진 듯 보였다.

이들로만 해도 국가 하나는 충분히 쓸고도 남으리라.

이들을 토벌하려면 적어도 국가전력급 헌터 여럿이

마법 저항력을 높이는 무구들로 도배를 하고 덤벼야 할 것이다.

“나와 한바탕 붙을 때 부르지 그랬어.”

한성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불렀던들 별반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까지 당했는데… 저들이라고 달랐겠나이까.

또한 부르기도 전에 상황이 모두 종료되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바라옵건대 그 이야기는 이제 잊어주시옵소서. 주군.”

뼈뿐인 그의 얼굴에 붉은 기가 어렸다 사라졌다.

잘못 본 것일까.

“여하튼 수고했다.”

“수고랄 것도 없나이다.

그저 마물의 세계 각지에 흩어진 녀석들을 불렀을 뿐이니.”

“…그래?”

한성의 머리를 스치는 뭔가가 있었다.

“이 중에 최근 들어 마물들의 행동 양상이 이상하다든지

보지 못하던 행동들을 하는 마물을 본 녀석 있나.”

한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맨 앞줄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크리치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개중 가장 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둘이었다.

“보았습니다.”

“보았습니다.”

“둘은 이리로 올라오도록.”

삭.

순식간에 한성의 바로 앞으로 녀석들이 몸을 옮겼다.

“좋아. 만나서 반갑다. 이한성이다.”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주군.”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주군.”

녀석들은 여전히 머리를 바닥에 박고 답했다.

게다가 벨루몬에게 교육(?)을 받은 탓인지

한성에 대한 호칭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스스럼없었으며,

그 태도가 매우 공손했다.

“너희를 뭐라 불러야 하지?”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사옵니다. 주군.”

“…그래?”

“그저 편히 부르소서.”

“그럴 순 없지. 너희를 앞으로 피터와 잭으로 부르겠다.”

“…가… 감사합니다. 주군.”

녀석들이 몸을 떨며 소리 높여 대답했다.

“…? 얘네 왜 이래?”

편의를 위해 생각나는 아무 이름이나 불렀는데

녀석들의 격한 반응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주군께서 이름을 하사하셨다는 것은

이들에게 더없이 큰 영광이며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

“평생을 이름 없이 살아온 녀석들입니다.

주군의 종으로서, 주군의 도구로서 주군의 명 하나에도

무한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 있음을 느낄 녀석들이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이들의 이름을 손수 지어주셨다는 것은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신다는 뜻이 되옵니다.

즉… 너희를 중히 쓰겠다 말씀하신 뜻이 되옵니다.”

‘…복잡하군.’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앞으로 잘 부탁한다. 피터. 잭.”

“혼을 바쳐 충성하겠나이다.”

녀석들 모두가 성이 울릴 정도로 크게 답했다.

“일어서봐. 대화하게.”

“허… 허나.”

둘이 난색을 보였다.

“일어서라니까.”

무슨 왕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어려워하는지. 원….

“주군께서 이미 두 번이나 말씀하셨다.

한 번 더 말씀하시는 수고를 네놈들 때문에 하셔야 하겠나.”

벨루몬이 솜씨 좋게 두 녀석들에게로만 살기를 쏘아내자,

녀석들은 움찔하더니 바로 일어나

한성을 차마 바라보진 못하고 한성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한성보다 키가 큰 녀석들이 일어서자

한성의 고개가 자연스레 위로 올라갔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이를 본 벨루몬이 한성의 아래에 빠르게 의자를 소환해

의자의 높이를 높였고 결과 한성이 그들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이럴 필요까지야… 여하튼 고맙다. 벨루몬.”

“별것 아니옵니다.”

“그래. 말해봐.”

피터가 한 발 나서며 대답했다.

“우선… 주군께서 하문하신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려면

세 해 전의 일부터 설명 드려야 할 듯싶습니다.”

“해봐.”

‘세 해 전이면… 대격변의 날이 일어난 해인가.’

“예. 주군. 저는 북쪽 변방에 터를 잡고 살고 있사옵니다.

세 해 전, 북쪽 땅의 끝자락. 심연의 절벽 아래에서부터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이

크게 일었던 적이 있사옵니다.”

‘북쪽…?’

순간적으로 세계수의 말이 떠오른 한성이었다.

“그래?”

“예. 사실 이것을 기운이라 할지… 마력이라 할지….

마기라 할지… 뭐라 불러야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법에 능통한 리치마저도 헷갈릴 정도라…?’

“뭐 그렇다 치고. 계속해봐.”

“예. 일었던 기운은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 마냥

마물의 세계 모두를 뒤덮을 정도로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흠.”

“퍼져나간 마기의 대부분은 세계수의 힘에 정화되어 사라졌고

일부만이 남아 마물의 세계 곳곳에 흩어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일었던 저는 그 기운에 접촉을 시도해봤고

그 기운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읽어냈습니다.”

“…이상하다라?”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약하고 옅기는 했으나 분명 거기에 담겨져 있는 힘은

상대를 현혹하고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혹… 흠.”

“예. 그 기운에 닿자, 순간 나른한 기분이 들었고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하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힘을 줄 테니, 심연의 절벽으로 오라는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약한 마물이나 이성을 가지지 않은 짐승형 마물이라면

‘그것’의 말에 현혹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랬군.”

“그러한 생각이 들어맞았는지 그날을 기점으로

마물의 세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나이다.”

“…?”

“북쪽에 터를 잡고 살지 않던 수많은 마물들이 북상하기 시작했고,

공격적이지 않고 유순하던 마물들이 마기에 미쳐 날뛰었으며,

사납던 녀석들은 더욱 사납고 흉폭해지기 시작했사옵니다.”

“그래…?”

“예. 대표적인 예로 아이언 앤트가 있습니다.

본디 얌전하던 녀석들이었는데, 기운이 퍼지고 난 뒤로부터

어째서인지 세계수를 갉아 없애려고 하더군요.

어디까지나 미천한 저의 생각입니다만….

제가 보기엔 세계수를 갉아 없애려 하기보단….

세계수에서 뭔가를 찾는 듯했습니다.”

‘아이언… 앤트….’

뭔가 찝찝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뭐지.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연의 절벽 아래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기운이 강해져 갔고

상대를 유혹하고 현혹하는 힘이 강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음.”

“군사와 영혼의 계약을 맺어 정신이 단단해졌다고는 하나,

저 또한 계속해서 강해지는 이 힘을 이겨내기 어려워

결국에는 서쪽의 변방으로 터를 옮겼나이다.”

“그래…? 너희 리치들이 그럴 정도라면

그 힘이 강해진 힘만큼 현혹되어 북쪽으로 향하는

마물들이 많았어야 정상 아닌가?”

한성이 물었다.

“예. 원래대로라면 그랬을 것입니다.

허나 세계수가 가진 권능이 이를 막아주었기에

세계수가 깊게 뿌리내린 중앙지역과

가지와 줄기, 잎들이 자라난 서, 남, 동쪽 일대에

서식하는 마물들은 별 탈 없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군사를 포함한 그 일대에 서식하는 마물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사실이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이옵니다.”

벨루몬이 중얼거렸다.

“…그랬군. 소중한 정보 고맙다. 나중에 보상하지.”

“아… 아니옵니다.”

“잭 너는.”

“예. 주군. 저 또한 지금은 아니나

기운이 퍼질 당시 북쪽 변방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습니다.

전 힘의 근원이 궁금해 그것을 찾으려 심연의 절벽에 갔습니다.”

“…흠.”

“심연의 절벽 부근은 마기에 미쳤거나 잡아먹힌 마물들이

죽임을 당한 뒤 묻힌 무덤과도 곳이며, 세계수의 힘조차 닿지 않아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 곳입니다만….

제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마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

한성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본 적, 들은 적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뭐지?”

“파란색의 포탈(Portal)이 그것입니다.”

“뭐?”

평정심을 잃지 않던 한성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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