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 *
“…우리는 지난 5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가족을, 친구를,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마물이라는 존재 근원조차 불분명한 괴수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송두리째 뺏겨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쳇. 지들이 뭘 안다고 쯧….”
한국 측 선수 대기실에서 대통령의 개회사를 보고 있던 성용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거 들어보니까 우리 군사 경계선에서 피똥 싸면서 싸울 때
저것들 각국 대사들 불러다가 오찬 즐기고 있었다더만.
병사들 죽든지 말든지 고기 썰고 우아하게 포도주나 마시면서
룰루랄라 했던 놈들이 뭘 안다고 나 원. 쯧. 안 그렇수?”
못마땅한 표정의 성용이 재권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스크린을 보고 있는 재권 또한 그리 썩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다들 준비 좀 했나 보구먼.
풍기는 기운들이 보통들이 아니야. 아주.”
성용이 씩 웃으며 자신의 거친 수염을 매만졌다.
“그건 프라임 길드장도 마찬가지 같은데요.”
애림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요? 나는 준비 좀 했지. 덕분에 내 아들놈이랑 길드원들이
한 일주일은 돌아가며 끙끙 앓아누웠지만. 카하하하.”
그의 과장스러운 몸짓과 말에
삭막했던 분위기는 금세 말랑말랑해졌다.
“거 이한성 헌터는 도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려는 거요?
저번까지만 해도 붙으면 이기지는 못해도
대충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영….”
한성을 바라보는 성용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거참. 겸손도 너무 심하면 재수 없수. 으잉?”
“명심하겠습니다.”
“…국가 대항전의 개막을 선포합니다!!”
“드디어 끝났나 보군.”
스피커에서 들려온 한진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수천 발의 폭죽이 공중으로 터져 올랐다.
형형색색의 폭죽들이 터졌고 까만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똑똑똑.
철컥.
“헌터님들 이제 준비하시면 됩니다.”
스태프가 들어와 한성들에게 알려주었고
한성들은 모든 국가의 선수단이 대기 중인 로비로 몸을 옮겼다.
* * *
“미국 선수단 입장합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전광판에는 미국의 국기가 비쳤고
스피커로는 미국의 국가가 재생되었다.
그러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 경기장의 입구로 미국 선수단이 입장했다.
선수단 멤버를 소개하는 아나운서의 말들이 장내에 울려 퍼졌지만,
이는 관중들의 환호에 먹혀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작년 우승국답다고 해야 할지 미국인 특유의 호쾌한 기상이랄지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와 세상을 뒤흔들 것 같은 함성에도
그들은 관중석과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고
그 모습이 꽤나 익숙해 보였다.
주전선수 여섯에, 부상에 대비한 후보 선수 넷까지.
모두가 엠페러급 헌터였다.
미국은 대회가 제한한 출전 가능 최대 인원인 10명을
엠페러급 헌터들로 꽉꽉 채워 내보냈다.
물론 미국 내 모든 엠페러급 헌터들이 온 것은 아니었다.
경쟁에 관심이 없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오지 않은 인원들이 더 많았으니까.
역시 헌터 강국이라는 것일까.
선수단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는 역시
라이언 길드의 라이언 험프, 라이언 나이트였다.
험프는 공식 석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그 녹색 꽃 남방에 슬리퍼를 고집했고,
나이트는 이와는 반대로 완전 무장한 채였다.
등에는 자신의 큰 덩치와 꼭 맞는 대검을 메고
금색으로 빛나는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저게 그 아가멤논의 대검인가.’
나이트의 대검을 바라보는 한성의 눈이 날카로웠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암살자와
그 무엇이든 베는 전사라. 재밌는 상대가 되겠어.’
“처음이라 긴장되나. 꼬마?”
머릿속으로 둘과의 대결을 그리고 있던 한성의 귀에
굵고 낮은 목소리의 중국어가 번역되어 들려왔다.
“음?”
그의 목소리는 퍽 따뜻했고 장난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한성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뒤돌아보자
거기엔 칸의 반 정도 될 덩치를 가진 중국 측 선수 하나가 있었고
한성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우람한 덩치에 2미터는 가뿐히 넘는 키,
온몸 가득 새겨진 용과 봉황, 그리고 한자 문신,
등에 메어있는 살벌한 크기의 양날 도끼 두 자루까지.
중국 헌터 랭킹 2위에 빛나는 전사 팽 린이었다.
“요새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꼬맹이로군. 만나게 돼서 반갑구만.
내 아들이 팬이야. 온 벽에 네 사진이며 그림이 그득그득해.
실제로 보니 더 작은 것 같긴 하구만. 하하.”
팽 린이 한성을 이모저모 살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곤란하군… 아무리 대회라지만
우리 애의 영웅이랑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야. 쓰읍….
우리 만나서 싸우지 말자고. 아들한테 혼나기는 싫으니. 하하.”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반말을 하는 모습이나
제 아들 마냥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태도가
불쾌할 법한데도 한성은 딱히 불쾌해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무시나 조롱으로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저 한성을 보며 자신의 아들을 떠올렸을 아비의 마음이
다 저렇겠지 싶어서였다.
화를 낸 건 오히려 성용과 중국 측 헌터 랭킹 1위 샤오란이었다.
“거 형씨. 언제 봤다고 반말을 찍찍해?
어? 우리도 말을 안 놓는데. 당신이 뭔데? 어?”
“팽 린. 그가 어리다 해도 엄연한 대회 출전자입니다.
사과하고 제대로 예의를 갖추세요.”
성용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후려갈길 듯 으르렁거렸고
샤오란 또한 그런 팽 린에게 주의를 줬다.
“아 그게 또. 그런가. 카하하하. 미안하네. 이해해주시게.
맨날 집에서 보는 얼굴이다 보니 속으로 친하게 생각했나 봐.”
팽 린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해왔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순박해 보이기도 해
웃음이 나는 한성이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샤오란 또한 한성에게 대신 사과를 해왔다.
팀의 대표란 저런 것이겠지.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드님이 좋아해 주신다니 고마운데요 뭐.”
한성이 웃으며 답해주었고 샤오란은 그제야 안심한 듯
가벼운 목례를 한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성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몸이었다.
남성 헌터의 몸 못지않게 아니, 보다 더 큰 몸이었고
탄탄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근육과 단단한 몸을 가진 그녀는
근접 전투 계열의 헌터였고 날카로운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재 되어 있는 마력의 크기도
이를 갈무리하는 그 수준도 꽤나 대단했다.
‘…이번 대회에는 확실히 괴물이 많군.’
샤오란에게서 눈을 돌린 한성이 성용에게로 다가가 중얼거렸다.
“프라임 길드장님도 화 푸세요. 그리고 저한테 말 놓으셔도 됩니다.
실제로도 아드님보다도 제가 어린데요 뭐.”
“흠흠… 그… 그럴까. 여하튼 한성 군한테 시비 걸지 마슈.
내 당신을 예의 주시할 거야. 으이? 조심해.”
성용이 화를 누그러뜨리고는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다시 팽 린을 가리키며
지켜보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이에 팽 린은 다시 한번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
웃으며 한성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네. 나 팽 린일세.”
“반갑습니다. 이한성입니다.”
한성은 그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별다른 화를 내보이지 않았고 함께 웃으며 마주 손을 잡아 주었다.
게다가 그는 다른 헌터들과 달리 힘 싸움을 하려 들지도 않았고
악수하는 내내 그저 한성을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웃고만 있었다.
“신기하구만…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작디작은 몸에
그렇게 본 적 없는 강대한 힘을 품고 있다는 말인지. 허허.”
그는 말과 함께 한성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너무 띄워주시는군요.”
“아냐. 띄우는 게 아니야. 벽 같은 느낌이 드는구만.
샤오란을 대할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닌데 말이야….
흠… 자네 가치도 모르는 소국에 있기는 아깝군.
혹시 중국으로 오는 건 어떻소. 아주 후하게 몸값을 쳐 주겠소.”
팽 린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철컥.
“팽 린 선수. 그만해 주시겠습니까.”
뒷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박 실장이었다.
연락을 받고 급하게 온 듯 미약하나마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심장의 고동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대회 기간 동안에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스카우트나
그 유사한 행위를 금지한다고 사전에 공지한 걸로 기억하는데요.”
박 실장이 팽 린을 향해 사무적이고 딱딱하게 말했다.
“아. 그랬지. 그랬지. 미안하오. 하하.”
철컥.
“중국 선수단분들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중국 선수단 입장합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샤오란!!!!!!!!!!!!!!!!!”
“팽 린! 팽 린!!”
스태프가 문을 열자 함성 소리와 장내 아나운서의 마이크 소리가
시끄럽게 뒤섞여 들어왔다.
“한성 군. 나중에 다시 보자고 하하.”
팽 린이 웃으며 한성에 귀에 속삭이고는 등을 돌려 걸어 나갔고
샤오란 또한 한성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경기장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철컥.
문이 닫히자 선수 대기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후우… 이한성 헌터님은 언제나 폭풍을 몰고 다니시는군요.”
숨을 뱉은 박 실장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 * *
“한국 선수단 입장합니다.”
사회자의 우렁찬 소개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폭발적인 함성이 들려왔다.
경기장에 외국인들이 많다고 해봐야,
경기장이 한국에 위치한 만큼 한국인들보다 많을 수는 없었고
주 사회자조차도 한국인이었으니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겠지.
전광판에 새겨진 태극기와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애국가,
그리고 사람들의 함성을 받으며 한국 선수단이 앞으로 나아갔다.
관중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길드장들의 이름을 연호하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환호를 하며 반겨 주었고,
한성을 포함한 길드장들 또한 이런 환호와 환영에 답하기라도 하듯
손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각 길드장들의 간단한 프로필과 약력,
이제까지 알려진 전력에 대한 분석들이 전광판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각국의 중계진들은 앞다투어 이를 찍어 세계로 전송했다.
한성의 차례가 되자, 전광판에는 한국 선수단의 루키이자
기대주라는 소개와 함께 광화문 및 평양 사태 때의
한성의 모습을 교차 편집시켜놓은 영상을 틀어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어느 영화관에서도 볼 수 없는 크기의 전광판에
크고 웅장한 배경음이 깔린 영상 속 한성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할 수밖에 없었고,
누가 봐도 멋졌으니까.
“…이런. 이런. 한성 군 띄워주기에 나선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렇죠?”
성용과 선우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협회 측에서 반출을 막은 자료일 텐데….
아무래도 대회 관리 측에다가 정부가 푸시를 넣은 모양이유.
경기 결과가 어떻든 한성 군 이미지 메이킹 딱 해가지고
나중에 한국 홍보 책자나 뭐 이런 거 만들겠지. 천검도 그랬으니.
하여튼 이런 거 하나는 머리가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가요.”
성용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그간 겪은 바로는….
이한성 헌터는 이런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
천검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한성을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한성의 표정은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우리 막내가 화가 단단히 났구만.”
성용이 한성에게로 다가갔다.
“이봐. 한성 군.”
“네. 길드장님.”
한성이 약간 찡그린 얼굴로 성용을 바라보았다.
“길드장님은 무슨. 삼촌이라 부르게.”
“아 예. 삼촌….”
웃는 낯으로 자신의 곁에 찾아온 성용에게
짜증을 낼 수는 없었기에 한성이 마지못해 답했다.
“이 좋은 날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으면 되나.
자. 관중석을 향해 손 한 번 흔들어주고. 웃어줘.”
“…이렇게 말입니까?”
한성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자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관중석의 환호와 함성이
폭탄 터진 것마냥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저 봐. 저 많은 사람들 모두가 한성 군 응원하려고 온 거야.
그리고 저런 사람들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거고.”
성용이 함께 웃으며 중얼거렸다.
“꼴같잖은 영웅심에 취하라는 뜻이 아니야.
한성 군도 들어봤지? 강한 힘엔 책임이 따른다는 말.
한성 군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야.
그 이름에 걸린 책임감의 무게는 막중하다고.
이러한 일종의 팬서비스도 그 무게 중 하나지. 웃어.”
“그렇습니까….”
“그래. 게이트와 마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고 희망을 전달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즐겁고 보람찬 일이겠어 으이?
“…그렇군요.”
“그래. 그러니까 정부 장난질에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아.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이 순간을 즐겨.
한성 군을 위해서도 한성 군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네.”
“자. 됐다. 우리 막내 기운 차렸네요. 쭉 갑시다.”
성용이 웃으며 다시 대열의 앞으로 향했고
길드장들은 그런 성용의 반응에 빙그레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