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133화 (133/336)

133화

* * *

그 후로는 한성의 독무대였다.

겨우 40% 남짓한 에너지였을 뿐인데도 그 기세는 대단했다.

비축된 에너지가 폭발하듯 한성의 온몸을 휘감았고

근육을, 신경을, 세포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다.

당황한 벨루몬의 스태프를 빼앗아 심장을 쥐는 데 걸린 시간이 1초,

동시에 티에라를 향해 직접 던진 나이프가 양 볼과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기까지가 2초.

티에라를 보호하기 위해 방패를 날린 칸에게

방패를 잡아 되던지는데 걸린 시간이 3초,

칸과 칸의 뒤에서 천둥의 술을 캐스팅하던 타우한의 목에

단검을 들이밀기까지가 4초.

불과 4초 만에 벨루몬들이 진압되었다.

“…졌습니다.”

벨루몬과 티에라가 동시에 중얼거렸고

타우한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칸은 한성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몸을 떨었고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어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 * *

“자. 다들 소감을 말해보도록.”

한성이 넷을 보며 중얼거렸다.

“…….”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벨루몬과 칸은 넋이 나가 있었고

타우한은 충격적이었는지 여전히 압도되어 멍한 상태였다.

티에라만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말이 없어?”

한성이 침묵하는 넷을 보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주군과 같은 존재를 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막내였기 때문일까(?)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칸이었다.

“그렇겠지. 인간이 마물의 세계에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한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니. 종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개체의 문제다.

주군은 강하다. 내가 본 그 어떤 존재보다도.

만약 내 동족들이 주군과 싸워야 한다면….

명예고 뭐고 다 버리고 목숨을 구걸하라 할 것이다.

또한, 타우한의 강화가 없었더라면

주군의 첫 일격에 방패를 놓치거나 쓰러졌겠지.

그만큼 주군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내 힘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번 모의전으로 네가 깨달은 것을 말하라는 것이다.”

“그것이라면 너무나도 명백하다.

주군의 말대로 내가 얼마나 명예 운운하며

단순하고 직선적인 싸움만을 해왔는지 깨달았다.

주군이 내 시야를 가렸을 때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마치 해머로 머리를 내려친 기분이었지.”

“왜? 명예롭지 못하게 시야를 가리는 비겁한 짓을 해서?”

“그렇다. 난 적은 신경도 쓰지 않을 명예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오만했고 멍청했는지.

이렇게 지내다간… 언젠가… 그 언젠가 이로 인해

내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칸은 빠르게 자신의 약점을 인정했다.

“합격이다. 잘 파악해주었다.

지금껏 싸워온 멍청하고 약한 마물들과 달리

앞으로 네가 마주할 적들은 정면 돌파만 고집하진 않을 것이다.

명예를 지키기는커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널 공격하겠지.

마치 내가 너에게 했던 것처럼.”

“…맞는 말이다.”

“포식의 힘을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데만 사용하기는 했지만,

다음에 너의 시야를 가리는 것은 더한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독이라든지 혹은 산성 용액이라든지 말이야.

전장에는 정정당당과 명예란 말은 없다.

있다 해도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것이지 죽은 자의 것이 아니다.

명예를 지키고자 한다면 답은 하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강해져라. 그리고 살아남아라.”

“명심하겠다.”

칸이 굳은 표정을 한 채 한성의 말을 들었다.

“임무도 곧잘 수행해 주었다. 도주가 어려운 원거리 딜러를 위해

방패를 날리면서까지 보호하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 방패를 설계했을 당시에 원형 방패의 역할은

원거리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용도였지, 방어용이 아니었으니까.

한 가지 더 충고해주자면 탱커의 역할은 아군의 보호뿐 아니라,

적의 시선을 빼앗고 딜러들이 안정적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도 있다. 그것을 항상 명심하도록.”

“명심하겠다.”

“뭐… 완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해냈으니

삼 일 정도 충분히 먹고 취할 만큼은 주문해주마.”

“…고맙소.”

칸의 눈이 빛났다.

“다음. 타우한.”

“…부르셨소. 주군.”

“넌 이번 모의전에서 무엇을 느꼈나.”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것 같소.”

“어째서지?”

“주군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소만

주군의 공격 호흡마저 이리 빠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소.

게다가 그 포식과 소화라는 기술이 이리 폭발적인 힘과 속도를

보여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소.”

“그래서?”

“공격 간 상황을 지켜보다가 적절한 시기에

군사와 티에라에게 강화와 강체술을 시전하려 했지만,

내게는 버프를 줄 그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소.

이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내 실책이오.”

타우한의 표정이 어두웠다.

“너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어째서요?”

“너의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

적으로 하여금 방심을 유도한 뒤

각종 버프로 동료들을 지원해 압도적인 무력을 퍼붓는 것.

확실히 이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지.

뭐 게다가 버프의 시간이 영원한 것도 아니니

언제 강화를 시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넌 적절한 시기를 잡지 못했을 뿐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

“게다가 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탱커인 칸에게

열광의 술을 걸어 그의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했다.

이를 통해 칸이 내 공격을 안정적으로 방어하고

딜러들이 공격을 편히 준비할 수 있도록 한 점,

부상이 깊어지기 전 칸의 부상을 치료한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주어진 임무 중 절반 이상은 이미 달성했다고 본다.”

“…그렇소?”

“그래. 그러니 그렇게 풀 죽을 것 없다.

네게도 삼 일은 실컷 먹을 수 있을 막걸리와 전병을 약속하지.”

자신의 버프가 조금만 더 빨리 주어졌더라면

결과가 이 정도로 처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잔뜩 풀이 죽은 타우한을 보며 한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좋군.”

타우한의 안색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다음 티에라.”

“예. 주군.”

“부여한 임무를 7할 넘게 달성한 것은 오직 너뿐인 듯하다.”

“그런가요?”

잔뜩 긴장한 자신에게 호평이 쏟아지자 놀란 티에라였다.

“원거리 딜러답게 멀리서 자리를 잡고 날 저격한 것도,

나와 칸의 사이를 떨어뜨리기 위해

최후의 보루를 사용한 것도 아주 적절한 판단이었다.

물론 최후의 보루가 통하지 않은 것은 감점이지만,

그것은 내 특성 때문에 기인한 것이니 어쩔 수 없지.

또한 나이프들을 상대하기 위해 돌격소총으로

무기를 바꿔 싸운 것도 좋은 판단이었고.”

“감사합니다.”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수류탄 사용의 부재다.

만일 너에게 다가오는 나이프들을 향해 수류탄을 사용했더라면,

최후의 보루로 인한 화염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을 테고

너에게 가해지는 공격의 정확도가 떨어졌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공격을 지연시켰을 수도 있겠지.”

“아… 그렇군요. 그런 방법이….”

티에라가 허리춤의 수류탄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또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너는 다시 몸을 숨기고

빠르게 자리를 옮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너도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고

날 저격할 기회를 다시 잡을 수도 있었겠지.

칸이 널 위해 무리해서 방패를 날리지 않아도 됐겠고.”

“…그건 생각 못 했네요.”

티에라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이란 말이 있다.

수류탄은 적을 섬멸하는 데 있어 아주 효과적인 무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적의 공격과 진군을 막는 방어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니 잘 생각하고 무기를 사용하도록.”

“네. 명심할게요.”

“약속대로 무기 전시회는 데려가지.”

“감사합니다.”

“다음. 벨루몬.”

“…하명하소서.”

벨루몬의 안색이 꽤나 어두웠다.

“소감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나이다… 제 작전은 통하지 않았으며,

동료들에게로 향하는 주군의 진군도 전 막지 못했나이다.

그렇다고 주군께 유효타를 가한 것도 아니었나이다….

완벽한 주군의 승리이시옵니다.

저의 부족함으로 인한 패배를 인정하옵니다.”

벨루몬의 목소리에는 분함이 어려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과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분노로

벨루몬의 가슴이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벨루몬의 표정이 바뀌었다.

“첫째 조건부터 볼까. 너의 작전은 훌륭했다.

딜러인 너와 티에라, 힐러인 타우한의 몸을 숨기고

마력을 흩뿌려 이들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교란한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조차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

만약 그 계획이 아니었다면 난 가장 먼저 그 둘을 쳤을 것이다.

딜러와 힐러의 제거는 전투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일이니까.”

“….”

“게다가 넌 칸이 내 일격을 막아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타우한과 티에라에게도 그리 명했을 것이고.

아마 모르긴 해도 허점이 보이길 기다렸던 것이겠지.

그 또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가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심리적 압박감을 주고 상대로 하여금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지.

아주 잘했다.”

예상과는 다른 한성의 호평에 조금은 놀란 벨루몬이었다.

“칸이 공격받자 티에라와 타우한을 출격시켜 공격한 것도

그들로 하여금 내 시선을 뺏은 뒤 내 후방으로 접근해

너의 주력기를 바로 사용한 것도 아주 좋은 선택이자 작전이었다.”

“….”

“내가 이렇게까지 주절주절 설명한 것은

너의 계획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다만 상대가 나였기에 너의 작전이 통하지 않은 것뿐.

넌 군사로서 역할을 온전히 잘 수행했다.”

“…감사합니다. 주군.”

“둘째 조건을 보지. 넌 주력기를 사용함으로써

타우한과 티에라, 칸에게로 향했을 나의 공격을 잠시 잠깐이지만

넌 충분히 저지했다. 나쁘지 않은 시도였어.”

“허나, 전 결국 제 마력의 원천인 제 스태프를 주군께 뺏겼고

결국 그들에게 공격이 가해지는 것을 막지 못했나이다.”

“그래서 그건 감점이지.”

한성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셋째 조건은 애초부터 네가 달성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내 포식은 마력조차 씹어 삼키는 아주 탐욕스럽고 굶주린 아이다.

너의 마력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지.

이런 부류의 적이 다시 한번 나타날 경우 군사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 제시한 조건이었다.

자. 너라면 어떻게 이를 공략하겠나.”

“…….”

잠시잠깐의 침묵 끝에 벨루몬이 답해왔다.

“두 가지 방안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포식이 수용할 수 있는 마력의 한계치를 넘기는 것이고

둘은 포식을 사용하지 않는 그 찰나의 타이밍을 노리는 것입니다.”

“완벽한 정답이다.”

한성이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주군의 하해와 같으신 혜안에 신은 매번 놀랄 수밖에 없나이다.

언제쯤 제가 주군께 어울리는 군사가 될 수 있을지….

한참은 먼 것 같나이다. 주군….”

벨루몬이 중얼거렸다.

“그러면… 계산을 해볼까.”

움찔.

“세 가지 조건 중 세 번째 조건을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조건을 충족시킨 것이 없으니… 이것을 어찌한다….”

칸과 타우한의 눈이 동시에 반짝였다.

“그러나 주군 이는….”

벨루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쉿.”

한성이 검지를 입에 갖다 대자, 그대로 입을 다무는 벨루몬이었다.

“벌을 줘야 마땅하겠지만 군사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보였고

또 내가 낸 질문에 답을 맞혔으니 그것을 감안해 형량을 줄여주지.

칸과 타우한 부족의 술을 운반해오고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함께 술자리를 즐기도록.”

“…무후후. 그거 나쁘지 않구려.”

“군사가 날라준 술이라. 상당히 감미롭겠군.”

칸과 타우한이 이죽거렸다.

“…지엄하…신… 왕의 명을… 받…듭니다….”

벨루몬의 음성이 왜인지 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