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130화 (130/336)

130화

* * *

똑똑똑.

“주군.”

티에라였다.

“들어와.”

철컥.

“후우우….”

티에라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가부좌를 튼 채로

마력을 운용하던 한성이 숨을 크게 내쉬고는 눈을 떴다.

방을 가득 채운 채 도도히 흐르던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순식간에 갈무리 되어 한성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대단하세요….”

티에라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아. 혹시 제가 방해되었나요?”

티에라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다. 어차피 끝낼 생각이었다.”

한성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앉아라.”

“네.”

잠깐의 침묵 뒤 티에라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주군.”

“뭐가 말이냐.”

“저를 위해 신경 써주신 모든 것에요.”

“…싱겁긴.”

한성이 중얼거렸다.

“군사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저거 만드느라 이틀 밤새우셨다고….”

“신경 쓰지 마라. 별거 아니니.”

“주군께 염려를 끼치는 것은 신하 된 자의 도리가 아니라 했습니다.”

“벨루몬이 그러더냐.”

“예. 그러나 군사의 말에 틀림은 없습니다.”

“쓸데없는 소릴. 쯧….”

한성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감사할 것도 죄송할 것도 없다.”

“하지만….”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부족들과 함께하는 타우한과 칸을 부럽게 보는 것이 싫었고.

네가 혼자서 청승맞게 슬퍼하며 우는 것이 싫었고,

갈 때마다 나보다 널 먼저 찾는 꼬마들이 싫어서 그런 것이니.”

한성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후후… 그게 아닌 것 같던데요.”

티에라가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가.”

“이디아가 저에게 말한 것은 주군의 말과 영 달랐습니다만. 후후.”

“…입 싼 녀석… 비밀로 하라 했더니.”

한성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주군께서 이디아들을 찾으시고는 절더러 바보라 하셨다더군요.

제가 그들에게 느낀 감정과 생각을 말씀해주시며

이런 바보가 어디 있냐며 화를 내셨다고 했구요.

그리고는 그들에게 제가 그런 말을 다시는 하지 못하게 혼내고

보듬어주라고 하셨다고. 후후후….”

“…바보는 맞으니까.”

한성이 중얼거렸다.

“후후… 주군 덕분에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론은 일방적으로 혼나기만 했습니다. 어린 꼬마들에게도 말이죠.

꾸중을 듣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더군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작게 맺혀 있었다.

“그래. 이제라도 알면 됐다.”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군.”

“됐다. 이제 그쪽 세계와 여기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니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

여기로 부족원을 데려와 지내든 네가 거기로 건너가 지내든

자유롭게 편하게 지내라.”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거 참. 됐다고 말했다.”

한성이 손을 들어 티에라의 말을 막았다.

쑥스러웠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는 세계수의 수호라는 무거운 짐을

모두 이디아들에게만 맡길 필요가 없겠군.

너도 그 짐을 함께 하면 되니까. 후후.”

한성이 말을 돌리려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더니 이디아들이 화를 내더군요.

그렇게 자신들이 못 미덥냐면서요. 후후후.

세계수의 수호자는 이제 자신과 파수꾼들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저에겐 저의 삶을 살라 말하더군요.

이제 저는 주군을 수호하는 기사라나요. 후후후.”

“그래…?”

한성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냥 미숙하고 어리다고 생각했던 이디아가 그런 말을 하다니.

약간 놀랐습니다. 이제 그도 어엿한 어른이 되었더군요. 후후후.

오히려 제가 세계수와 부족을 수호하겠다는 그들의 의지와 결심을

우습게 여긴 꼴이었더군요. 혼만 났습니다. 후후.”

시원섭섭한 표정의 티에라였다.

“그건 기특하군. 녀석.”

“주군.”

“응?”

티에라의 목소리에 진지함이 어렸다.

“주군이 아니었다면… 세계수의 수호자라는 멍에를

전 죽는 그 순간까지도 제 숙명인 것마냥 안고 갔을 겁니다.

육신도, 영혼도 거기에 얽매인 채로 평생을 살았겠죠.”

티에라의 표정에서 진한 슬픔이 느껴졌다.

“아파도 아프다 말 한마디 못했을 것이고,

답답해도 답답하다 말 한마디 못했을 것입니다.”

“….”

“자유라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그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겠죠.

제가 누구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거구요.”

“…그런가.”

“그러나 주군께선 그런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죽어서조차도 거기에 메어 안식을 찾지 못했을 제 영혼도요.”

“…흠.”

“주군 덕분에 제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제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후후….”

“….”

“그리고 주군이 만약 구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장로들에게 육신과 영혼을 유린당했을

제 동족들까지도 주군께서는 구해주시고 돌봐주셨습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까요.”

“….”

“주군을 뵈러 오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정녕 하고 싶은 게 무엇이고

제가 주군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를.

답은 간단했습니다. 제 모든 것을 주군께 드리는 것.

그리고 주군이 바라보실 세상을 주군의 곁에서 함께 바라보는 것.

그러니 미천한 제 몸과 비루한 제 영혼을 받아 주세요.

앞으로 남은 삶을 주군께 오롯이 바치겠습니다.

주군을 수호하는 총이 되겠습니다.”

[대상 ‘티에라’의 충정이 일정 조건에 도달,]

[왕의 사수(射手)로 그 지위가 격상합니다.]

[대상 ‘티에라’가 ‘이한성’에 변치 않는 충정을 맹세합니다.]

“…그 충정 고맙게 받지.”

한성의 입가에 미소가 옅게 걸렸다.

* * *

대회까지 7일 남은 시점.

마물과의 전쟁이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는 시점임에도

이를 알 리 없는 세상은 헌터 배틀 국가 대항전에 대한

관심으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방송사와 신문사 등의 각종 매스컴에서는

유력 우승 후보 국가 및 헌터를 점치는 기사들과

각국 헌터의 전력 분석, 헌터들의 무력 순위 등을

담은 글과 영상들이 오르내렸다.

당연하게도 한국과 길드장들도

분석대상에 포함되어 있었고 예외는 아니었다.

길드장들의 활약이 담긴 영상과 이에 대한 전력 분석,

국가 대항전에서의 활약 가능성 등을 말하는

영상들이 인터넷에 활발하게 돌아다녔다.

이에 시민과 헌터들의 관심은 폭발적이었고

이들을 응원하는 자들로 인터넷 사이트의 트래픽은

초과하다 못해 폭발할 수준이었다.

그런 관심과 반응들 중에 하나 특이한 것이 있다면

한성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다른 길드장들에 비해서 헌터로서의 경력이나 기간이 짧은 데다

이렇다 할만한 정확한 전력 분석도 없는 상태임에도

개인전, 단체전, 대마물전 모든 분야에서

한성은 활약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자이언트 센티페드전의 압도적인 무력과

이번 평양의 던전 브레이크에서의 활약 때문일까.

한성에 대한 기대는 한껏 높아져 있었다.

오죽하면 헌터 인기투표에서 부동의 1위였던

선우의 자리를 제치고 한성이 1위에 랭크되었을까.

벌써부터 입국해 적응과 훈련을 준비하는 헌터들과

그를 서포트하는 사람들로 서울 인근 호텔들은 이미 만석이었고,

이를 취재하기 위한 취재진들의 집요한 취재로 서울이 떠들썩했다.

거리 곳곳에는 세계인의 축제라는 플래카드와 현수막들이 가득했고

경기장 인근에는 헌터들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이에 노점상도 꽤나 떠들썩하게 생겨났고,

길거리 공연이나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보였다.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

친구와 함께 가볍게 술 한잔하러 나온 이들,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연인들로 꽤나 북적거렸다.

모두가 즐거워 보였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세계인의 축제라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아 보였다.

“후….”

길거리를 내려다보는 강건의 얼굴이 꽤나 어두웠다.

“저들의 웃음을 지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별일 아닌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쉽게 끝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쉽진 않겠지.”

강건이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매만졌다.

“박 실장.”

“예. 회장님.”

“각국 헌터 대표단들에게 모임에 참석하라고 전달했는가.”

“예. 전달했습니다.”

“일정은 언제로 짰지?”

“대회 시작 전날, 21시입니다. 장소는 협회 대회의실이며

이미 다과와 자리, 빔프로젝터와 동시통역까지 준비를 마쳤습니다.”

“빠르군. 잘했네.”

흡족한 표정의 강건이었다.

“감사합니다.”

“참석 거부하는 국가는 없었는가?”

“다행히도 없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안인 데다가,

협회장께서 직접 주관하실 거라 했더니 모두 알았다 하더군요.”

“그건 다행이군.”

커피를 홀짝이는 강건이었다.

“경기장 준비는 다 되었나.”

“예. 마무리 단계입니다.

경기장과 관중석, 선수 대기실까지 제가 직접 검수했습니다.

혹시나 있을 테러나 위협을 대비해 마력 탐지기를 설치해뒀고

보안의 강도를 두 배로 올렸습니다.”

“음.”

“남은 것은 경기장과 관중석 사이의

방어막 상태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임선우 헌터님의 도움을 받아 강도를 시험했고,

결과적으로 별다른 문제 사항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내일 상태를 마저 확인하고,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자네 아니면 도대체 이 많은 일을 누가 할지…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이게 제 일이니까요.”

강건의 심심한 감사에 싱긋 웃는 박 실장이었다.

“데스 길드장이 방어막을 설치하는 데 많이 도와줬다지?”

“예. 데스 길드장과 휘하 헌터들, 그리고 협회 소속 헌터들까지

도합 20여 명의 힘을 모아 만든 방어막입니다.

참가인원들이 강하다 해도 이를 깨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 후우….”

커피를 홀짝이던 강건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최종 출전자 명단 제출일이 어제까지 아니었나?”

박 실장을 되돌아보는 강건이었다.

“예. 맞습니다.”

“그래. 변화 있던가?”

“별다른 특이사항 없었습니다. 작년과 변화 하나 없이 동일합니다.”

“그래…? 흠. 일본도 같던가?”

“예. 같았습니다.”

“엠페러급 헌터가 출현했다는 말은 헛된 낭설이었나… 흐음….”

강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하지.”

“예.”

“그나저나 박 실장. 자네가 보기엔 어떤 국가가 우승할 것 같나.”

뒤돌아 나가려는 박 실장에게 강건이 물어왔다.

“개인적으로는 개인전, 단체전, 대마물전 성적을 모두 합친다 해도

여전히 미국, 러시아, 중국의 삼파전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시다시피 그들이 워낙 강세지 않습니까.”

박 실장이 돌아서며 즉답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강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개인전에서는 미국의 라이언 나이트, 중국의 샤오란,

러시아의 이반 콘스탄틴, 일본의 미야 마키토,

영국의 헤롤드 마커스, 한국의 임선우, 인도의 아미르 굽타,

위 7명을 강력한 우승후보로 점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흠… 그런가. 작년과 다를 바 없군.”

“예. 단체전에서는 아무래도 중국이 우세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 대회를 위해 일 년을 준비했다는 후문이 돌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맞을 걸세, 중국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강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대마물전은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경기이기에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성싶습니다.

허나 단순히 마물을 많이 잡는 경기라면 저희가 유리하지 않을까요.

저희에겐 이한성 헌터가 있으니까요.”

“흠… 그렇지.”

강건이 던전 브레이크 때 한성의 활약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께서는 따로 생각해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글쎄… 올해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싶군. 새로운 바람이 불 게야.”

“…이한성 헌터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후후.”

“확실히… 그라면 새로운 세대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 실장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네. 후후.

한성 군의 전력을 다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만

다 보지 못한다 해도 꽤나 재밌을 게야. 후후. 기대가 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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