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 *
야심한 밤 새벽.
“…음?”
휴식을 취하던 한성에게 진한 그리움이 전해져 들어왔다.
한성의 것은 아니었고, 수하들 중 하나였다.
영혼과 영혼이 묶인 계약이다 보니
그들의 생각도 감정도 자연스레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티에라인가.’
자신의 부족들과 함께 있는 타우한과 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티에라가 퍼뜩 떠오른 한성이었다.
‘…그리울 만도 하지. 부족을 떠나오고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으니.’
쉭.
티에라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한성이 몸을 옮겼다.
그녀는 길드 부지의 바위에 걸터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셨어요. 주군?”
티에라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무슨 일 있나.”
길게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에서 한성이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후후. 그냥 달이 좋아서 나와 봤습니다.”
“…예쁘군.”
그녀의 말대로 하늘엔 보름달이 떠 있었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다 쉬었으니 그만 들어가 볼게요. 주군. 좋은 밤 되세요. 후후.”
한성을 스치듯 지나가는 그녀의 눈가가 왜인지 촉촉했다.
눈물일까.
“그리우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가라.
네 생각이 어떻든 그들은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네.”
한성이 중얼거렸고 티에라는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답답한 녀석….’
벨루몬에 명해 귀환석을 만들어 주었고
원하면 언제든지 다녀오라 말했지만
티에라는 그때마다 알았다며 대답만 할 뿐,
단 한 번도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저 마을에 심어둔 데스나이트를 통해
부족의 안위와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한성에게
가끔 마을은 괜찮냐고 물어볼 뿐이었다.
그때마다 한성은 그러지 말고 다녀오라 했지만
티에라는 여전히 알았다며 웃을 뿐이었다.
오히려 짬을 내서 그들을 찾아간 것은 한성이었다.
선물을 가져오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갈 때마다 부족 전원이 한 달은 충분히 먹을 분량의
간식과 식량들을 가져가 나누어 주었고
어린 엘프들을 위해 색연필과 물감 등의 장난감을 사다 주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성의 손에 들린 선물들보다
티에라를 먼저 찾았고 티에라의 안녕과 건강을 먼저 물었다.
한성이 거기다가 할 수 있는 말은
‘건강하다. 잘 지낸다.’ 등의 상투적인 말뿐이었다.
왜 오지 않느냐는 말에 바쁘다는 말과 단련과 수련 중이라
오는 것이 쉽지 않다며 안부 전해달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곪아 들어가는 티에라의 속내를 말했다간
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고
티에라가 자신의 속내를 먼저 드러내지 않았는데,
본인도 아닌 제3자인 한성이 이를 말하는 것은
실례이기 때문이리라.
티에라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서운해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건강하다는 말에 안도했고
그제야 웃으며 선물에 눈을 돌리는 엘프들이었다.
티에라는 부족을 떠나온 것에 대해 항상 미안함과 죄의식을 느꼈다.
한성을 따르기로 한 것에 후회를 한 적은 없었지만,
왜인지 부족들을 바라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세계수의 수호자라는 역할이 버겁고 무거워
부족도, 부여받은 임무도 내팽개친 채
도망가버린 비겁한 자라 생각할까 겁나서였다.
물론 다크 엘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티에라는 보물이자 자랑이었으며 전설이고 신화였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유일한 존재이자,
세계수와 마을을 지키려 두 눈을 바쳐 신궁을 얻어낸 위대한 존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생 대부분을 파수꾼을 조직하고 교육해
아이언 앤트와 싸우는 데 바쳤고 죽을 고비를 몇백 번이나 넘기며
마을과 세계수를 지켜내 온 존재.
그것이 티에라였다.
그렇기에 이를 잊지 않고자
나이든 엘프들은 어린 엘프들을 데려다
항상 티에라의 존재를 교육시켰고 감사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게다가 눈을 바쳐 얻어 낸 자신의 신궁조차도
세계수의 수호와 일족의 수호를 위해 사용하라며
남겨두고 떠난 이를 어떻게 미워하고 원망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이들은 티에라가 떠나간다고 했을 때도
원망하거나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옭아맸던 족쇄가 풀려났다며
진심으로 기뻐하고 행복해하던 그들이었다.
티에라가 행복하기만을 진심으로 바랐던 그들이었으니까.
“멍청한 녀석… 상처는 치료하든지 도려내든지 해야지….
그렇게 끙끙 앓고 있으면 썩기밖에 더하냐. 어휴… 귀찮아.”
사라져가는 티에라를 보며 한성이 중얼거렸다.
* * *
벨루몬의 허상 경계 안.
한성은 사격 연습 중인 티에라를 찾았다.
탕!!!!!!!!
철컥.
탕!!!!
철컥.
탕!!!!
방아쇠가 후퇴하고 전진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허상 경계 안을 가득 울렸다.
티에라의 마력 탄환은 차례대로 1, 1.5, 2km 밖 표적물의
대가리를 정확하게 뚫어냈고 박살 냈다.
무구를 하사한 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티에라는 벌써부터 무구를 다루는 데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철컥!!
100m 전방에서 떠오른 표적물이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쥐고 있던 저격용 라이플을 놓고 재빨리 일어선
티에라의 손에는 M4A1을 묘하게 닮은 돌격 소총이 들려있었다.
타다다다당.
철컥!!
타다다당.
철컥.
타다다당.
150, 200, 250m 거리의 목표물들이 무작위로
일어섰다 누었다 움직였다 멈췄다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반복했다.
이에 티에라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기동하며 방아쇠를 당겼고
티에라의 탄환은 목표물의 대가리를 정확하게 뚫어냈다.
철컥!
마지막으로 티에라의 1미터 바로 옆에 위치한
목표물이 떠오르려는 듯 기계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소리를 들은 티에라의 귀가 발록거렸고
목표물이 채 바로 서기도 전에 티에라의 양손에는
이미 소총이 사라지고 대구경 권총 두 자루가 들려있었다.
목표물이 일어나자마자 티에라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쾅!!!!!!!!!!!!!!!!
함포 수준의 포격이 가해진 타겟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후우….”
짝짝짝.
“대단하군.”
숨을 내쉬는 티에라를 향해 한성이 박수 치며 다가가 중얼거렸다.
“오셨어요?”
“벌써 이만큼이나 무기를 다루다니. 실전에 투입해도 되겠는데?”
“아직 부족해요. 후후.”
“최후의 보루로 탄환 만드는 거랑, 수류탄 만드는 작업은 다 돼가?”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하고 있어요. 최후의 보루를 담은 탄환은
음… 100발쯤 되고 수류탄은 아직 절반도 못 채웠어요.”
티에라가 웃으며 답했다.
“그 정도만 해도 너 혼자 A급 게이트를 털고도 남을 거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A급 최상급도 가능하겠지.”
“그런가요. 후후.”
한성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티에라가 웃어 보였다.
“오늘 훈련은 이쯤 하고. 잠깐 날 따라오지 않겠나.”
“네…? 어디로…?”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지.”
한성이 눈을 찡긋하고는 앞장섰고 티에라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널브러진 무구들을 얼른 반지에 수납한 뒤 한성을 뒤따라 나섰다.
연무장에 위치한 벨루몬의 허상 결계를 벗어나
한성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곳은 3층이었고,
이는 티에라의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
길드 건물의 지하는 현재 1층을 공방장의 공방으로,
8~10층까지를 단련장과 연무장으로,
4~7층을 각각 두 층씩 타우렌과 하이 오크들에게
내주어 이를 보금자리로 사용하게 했다.
벨루몬은 허상 경계나 자신의 성이 더 편하다고 말하며
자신에게는 공간을 따로 줄 필요가 없다고 했기에
이를 내주지 않았다.
남은 것은 2층과 3층뿐.
용도가 정해지지 않아 아무것도 없는 공간.
이 공간의 한구석에 티에라의 거처가 있었다.
거처라 해봐야 침대 하나와 옷가지들을 넣을 가구,
욕실과 화장실만이 덩그러니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한성이 데리고 가니 이상할 수밖에.
들어가 봐야 아무것도 없는데 왜…?
하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곳은 티에라가 알던 것과 영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으로.
분명 아무것도 없었어야 할 빈 공간에는
마물의 세계에서 그 축을 담당하고 있었어야 할
세계수의 가지들과 뿌리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항상 어두컴컴했던 전과 달리 따뜻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또 항상 나던 시멘트와 콘크리트 냄새가 아니라
숲과 이끼, 나무가 뿜어내는 상쾌한 풀냄새가 물씬 느껴졌고
티에라가 내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던 전과 달리
새가 노래했고 벌레들이 울어댔다.
게다가 2층과 3층 사이의 두꺼운 벽은
온데간데없었고 그곳엔 풀과 나무들만이 무성했다.
세계수의 덩치를 생각해 2층과 3층을 합친 듯했다.
바닥에는 흙과 풀, 이끼들이 두껍게 깔려 있었고
그 아래로 세계수의 뿌리들이 곧게 뻗어 있었다.
위로는 햇살만큼이나 강한 조명과 함께
세계수의 가지와 잎 넝쿨들이 가득 자라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놀란 티에라가 말을 더듬었다.
벨루몬이 만들어 낸 환각인가 싶어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았지만
바닥의 흙과 풀, 이끼들은 분명 실체를 가지고 있었고 만져졌다.
게다가 세계수의 뿌리와 가지에서 느껴지는 신성한 기운은
분명 세계수의 것이 맞았다.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한성이 미소 지었다.
“티에라 님!!!!!!”
“…?!”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너무나 듣고 싶었지만 들으러 가지 못했던 목소리들.
다크 엘프들의 목소리였다.
티에라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티에라를 향해 마구잡이로 달려오는 어린 엘프들이 있었다.
“아니… 너희가 어떻게 여기에…?”
떼로 몰려와 티에라를 둘러싸고 부비적거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티에라였다.
“왜 안 왔어요!! 보고 싶었잖아요!!”
“우리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지. 보고 싶었는데….”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맑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아이들에게
대답하던 티에라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고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건…?”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마감되어 아무것도 없었어야 할 벽면 전체가
게이트가 되어 마물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고
연결된 통로를 통해 세계수가 가지와 뿌리를 뻗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돌리자 그곳엔 다크 엘프들이 있었다.
“…이디아…?”
이디아를 비롯한 파수꾼들 모두와 마을 부족민들 전원이
한껏 웃음을 머금은 채 티에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난 잘 지냈지.”
티에라의 눈가가 붉어지고 촉촉해졌다.
“주군께 다 들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셨더군요.
앞으로 그런 생각하지 마시라고 티에라 님을 혼내주러 왔습니다.”
이디아가 티에라에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혼자 계실 필요 없습니다. 주군께서 군사를 시켜
이렇게 게이트를 열어주셨으니까요. 항시 연결될 거랍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티에라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가능하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공간이 일그러지며 벨루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벨루몬의 앙상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4개의 직육면체 기둥이 있었고 벽 네 귀퉁이에 박혀 있었다.
“저건…?”
“게이트를 연결하고 유지하는 마법 도구다.
내 마력을 버텨낼 수 있는 도구가 없었기에
주군과 내가 밤새 만든 것이니 주군께 감사하도록.
주군께서 손대시지 않으셨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니.”
“됐다. 돌아가 보도록.”
“지엄하신 왕의 명을 받듭니다.”
머쓱해진 한성이 손을 휘저었고 벨루몬은 그대로 몸을 숨겼다.
“세계수께 뿌리와 가지를 뻗어
너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달라 부탁드렸다.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멋진 집이 탄생했군. 후후.”
“….”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고 있는 티에라를 향해
한성은 한마디를 남기고는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