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127화 (127/336)

127화

* * *

야심한 시각.

‘흠… 빙결 데미지를 추가할까?’

‘아니야. 그냥 심플하게 마법 데미지만 최대화하자.’

한성이 책상에 앉아 노트에 뭔가를 썼다 지웠다 하고 있었다.

스태프로 보이는 무기만 해도 그 디자인이 수십 개였고,

그 뒤로 여러 종류의 총들도 다양하게 그려져 있었다.

꽤나 많은 고민을 한 듯 한성의 두 눈은 퀭해 있었고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주군. 시간 괜찮소?]

한성에게 타우한이 말을 걸어왔다.

[음…? 괜찮다. 무슨 일 있나?]

[그런 것은 아니고… 할 말이 있어 그러니 시간 좀 내주겠소?]

추가적으로 필요한 물품이 있나?

[그래. 오도록.]

공간이 일그러지고 타우한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벨루몬의 차원 이동을 사용하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보이는 타우한이었다.

그의 양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고

그 바구니 안에는 먹을 것이 잔뜩 들어 있었다.

밀과 귀리로 만든 과자 비슷한 것과

본 적 없는 화려한 색의 과일, 늑대를 잡아 만든 육포까지.

바구니가 터질 정도로 한가득이었다.

“별것은 아니고, 우리 부족원들이 주군께 꼭 주고 싶다고 하기에

몇 가지 간추려 가져와 봤소.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타우한이 한성의 앞에 바구니를 내려놓자,

한성은 가장 눈에 띄는 파란색 과일을 들어 그대로 씹어댔다.

과일이었음에도 탄산의 맛이 느껴졌고 달콤한 게 상당히 맛있었다.

과자는 딱히 뭐 그렇다 할 맛은 없었고 그저 고소하고 바삭했다.

의외였던 것은 늑대고기로 만들었다는 육포였다.

늑대의 육포라기에 처음에는 좀 꺼려졌지만

막상 입에 넣고 씹다 보니 느껴보지 못한 풍부한 감칠맛에

막 만든 장조림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부드러운 식감이었다.

왜인지 자주 찾게 될 것 같은 맛이었다.

“상당히 맛있군. 고맙다고 전해줘. 기뻐하더란 말도 꼭 해주고.”

“후후… 알았소.”

한성의 반응에 타우한이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혹시 뭐 더 필요한 게 있나?”

한성의 말에 타우한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오. 이미 지금만으로도 차고 넘치오.”

“그럼…?”

“그… 어… 음….”

타우한은 시원하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것도 낯을 붉힌 채로.

“…?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을 들여?”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소. 나와 내 부족을 대표해서 말이오.

토템을 되찾아 우리 부족의 혼을 지켜준 것도 모자라

부족 전원을 품고 보듬어 주다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난 또 뭐라고.”

한성이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 이 은혜는 내 반드시 갚겠소. 그것이 뭐가 되었든 말이오.

만약 주군이 내 목을 원한다면 내 기꺼이 웃으며 내놓을 수 있소.

주군이 불길을 걸어가라고 명한다면 내 노래 부르며 뛰어가겠소.

고맙소. 주군. 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대를 평생 모시겠소.”

타우한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할 필요도, 갚을 필요도 없다.

네가 내 동료가 된 그 시점부터 넌 내 가족이 되었다.

가족이 가족을 챙기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

한성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난 오히려 주군의 명이라는 미명 아래 자유롭게 살던

너희의 삶을 내가 빼앗은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된다.

두 층을 내주기는 했지만 대초원에서 살다가

이런 좁고 낮은 콘크리트 안에서 지내려면 답답하겠지.

갑갑해 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는 없었나?

원한다면 마물의 세계에 새로 집을 지어줄 수 있다.”

한성이 걱정되는 듯 타우한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무후후… 역시 주군은 자상하오… 괜찮소. 주군.

안락하고 안전한 이곳을 모두들 너무나 좋아하오.

좁다고 했지만 한 층만 해도 우리 부족 전원이 생활할 수 있소.

심지어 우리 부족민들이 거주하던 거주지보다 넓소. 무후후.”

“그런가.”

“또 땅이 그리우면 집 밖을 나가면 되오.

온 천지가 흙이고 풀이고 산인데 뭐가 그립겠소.

여기가 이제 우리의 고향이자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곳이오.

주군이라는 가족이 있는 이곳이. 무후후.”

“후후. 고향이라… 듣기 좋군 그래.”

한성이 흐뭇하게 웃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군이 허락해준다면 앞으로도 난

주군의 곁을 지키고 싶소. 내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대상 ‘타우한’의 충정이 일정 조건에 도달,]

[왕의 신의(神醫)로 그 지위가 격상합니다.]

[대상 ‘타우한’이 ‘이한성’에 변치 않는 충정을 맹세합니다.]

‘타우한까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나 또한 너의 주군으로서

너의 가족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마.”

“이미 충분히 다했소. 주군은 무후후….”

“그런가. 후후.”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따뜻했다.

“그래서 말인데 주군.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 일족이 살아가기 위해선 먹을 것이 필요하오.

그러니 경작지를 제공해줄 수 없겠소?”

“경작지가 왜 필요하지?”

한성이 타우한에 물었다.

“곡식을 심고 길러야 우리가 먹을 곡물들과 농작물들을

얻을 수 있지 않겠소?”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타우한이 이에 되물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나 본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럼 어디서 식량을 구한단 말이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타우한을 보며

한성이 웃으며 답을 해주었다.

“네 눈앞의 존재가 벌어들이는 재화가 얼마인지 아냐.

너희뿐 아니라 하이 오크 부족들까지 포함, 단 하나 남지 않고

모두가 멸족하는 그 날까지 먹고 마실 식량을 살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라. 알아서 채워 줄 테니. 후후.

뭐 소일거리 삼아 재미로 작물을 재배하고 싶다면

건물 앞의 부지를 텃밭으로 내어줄 순 있다.”

한성이 담담히 말했다.

“아니오. 주군. 그건 아니오.

내 비록 주군께 의탁하고 있지만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소.

적어도 먹을 것은 우리가 해결하게 해주시오.”

꽤나 단호한 타우한이었다.

“흠. 원래는 좀 있다 얘기할 생각이었지만 그럼 이렇게 하지.”

“?”

“초원 골짜기 부족의 성정이 본디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로운 것을 안다.

그렇기에 나 또한 필요하다고 해도 너희들을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에 내보내고 싶진 않다.

그래서 그 대신 너희들의 손재주를 활용해 볼까 한다.”

“저번처럼 말이오?”

“그래. 저번에 너희를 가르치던 인간 대장장이를 기억하나?”

“아. 기억하오.”

공방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타우한이 답했다.

“그가 너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너희 모두를 데려다가 자신의 일을 가르쳐

제자 겸 작업 보조로 삼으면 안 되냐고 묻더군.”

“호오.”

“그래서 너희 의견을 물어보고 너희가 허락하면 그리하자 했다.

부족원들과 이야기해 보고 충분히 생각한 뒤 내게 답을 알려다오.

강제하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그렇게 하겠소.”

타우한이 바로 답을 내렸다.

그것도 기쁜 표정으로.

“부족원들의 의견도 들어봐야지 않겠나.”

너무나 빠른 결정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한성이었다.

“아니오. 그럴 필요 없소.

사실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부족 회의를 열고 이야기를 나눴소.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이오.

답은 하나였소.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라는 것.

설령 그게 목숨을 내놓는 전쟁이라 할지라도.”

“…그랬나?”

한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대장장이 일이라면 무구를 만드는 일 아니오?”

“뭐… 그렇지.”

“그러면 우리가 만든 무구들을 주군이 팔거나

주군의 병사들을 무장시키게 될 거잖소. 안 그러오?”

“그럴 계획이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우리 손으로 만든 이 무구들로 인해

주군이 더 부유해지고 주군의 군대가 더 강인해지는 것이겠지.”

“그렇다.”

“주군께 도움도 되고, 우리 밥벌이도 하고

싸우지도 않아도 되오. 이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소. 안 그렇소?”

“그렇기는 하다.”

“게다가 손재주 좋은 우리 일족에게 딱 맞는 일이오.

안 그래도 소일거리를 찾을까 했는데 이보다 좋을 순 없소.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하겠소.”

“…알겠다. 공방장에게 일러두지.”

“후우. 마음의 짐을 덜겠구려. 무후후.”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주군. 방금 전에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주군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 하셨소.

허나 그것은 신하 된 우리로서도 마찬가지요.

신하 된 자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우리도 다 할 수 있도록

부디 허락해주시오. 무후후.”

타우한이 웃으며 답했다.

“…후후. 알겠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가슴 한편이 뿌듯해지는 한성이었다.

* * *

평소보다 2시간 일찍 출근했음에도 공방장의 얼굴이 밝았다.

귀에 걸린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잘 웃지도 않던 양반의 얼굴엔 웃음만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한성이 타우렌들이

스카우트에(?) 응했음을 공방장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작업을 보조해줄 인원이 충당되어

작업의 속도가 몇 배는 빨라질 것이고

자신의 작품에 좀 더 세밀하게 신경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자식이나 제자가 없어 전승이 끊어질지 모르는

그의 무구 제작 기술과 노하우의 맥이 다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공방장은 제자가 될 타우렌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고

이름을 묻고 인사를 나누느라 한성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순진한 아이들이니

너무 부리거나 힘들게 하지 마시구요.”

한성이 웃으며 공방장에게 농을 걸었다.

“예끼 이 사람. 이 굵은 팔들 좀 보게.

나도 명색이 헌터이긴 하지만, 내 전투 능력은 0이라고 0.

그런 내가 일 가르친답시고 막 부리고 힘들게 하다가

한 대 맞으면 그대로 황천길이야. 응? 하하.”

한성이 뭐라 하든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그럴 리가요. 후후. 스승이 될 분이신데.”

“스… 스승?! 그렇지. 아하하하하!!

오늘부터 내가 너희의 스승이다! 하하하하.”

제자를 삼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진짜 자신이 스승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 했던지

스승이라는 단어에 그는 꽤나 흥분한 듯 보였고 즐거워 보였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어어. 가보게. 난 제자들과 일을 시작하겠네.

으하하하하. 자 가자. 하나하나 가르쳐주마.”

타우렌 덩치의 반의반도 안 될 공방장이

40명이나 되는 타우렌들을 이끌고 가는 모습이

어색하고 재밌어 한참을 키득거린 한성이었다.

* * *

“확실히 남다르군.”

하이 오크들의 전력을 시험할 겸 게이트 소탕을 명령했던 한성이

그들이 지나간 발자취를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마물들의 사체와 피만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사체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져지고 찢겨져 있었고

그나마 멀쩡한 사체들에는 도끼, 창, 칼 등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였다.

칸과 그의 수하들이 이번에 맡은 게이트는 A급의 게이트로

자이언트 오우거들이 서식하는 곳이었다.

놀랍도록 빠른 회복력과 방어구 하나 걸치지 않았음에도 높은 맷집,

바위쯤이야 우습게 가루로 내버리는 완력까지.

이를 공략하기 위한 최소 인원이

마에스트로급 10명에 언터쳐블급 2명이었다.

심지어 이들로 공략을 시도한다 해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칸들은 오우거들을 간단하게 썰고 다녔다.

심지어는 동족들의 피를 뒤집어쓴 칸과 그의 수하들을 보고

도망하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오우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칸은 ‘명예도 모르는 것들은 살 가치가 없다’라며

가차 없이 그들의 목을 베어 넘겼다.

그 뒤로도 칸은 한성이 하사한 방패를 들고 전장을 누볐다.

보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도 칸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명예로운 싸움을 원한다며 역시 1:1을 고집하는 그였고

수하들이 모두 물러나자 싸움에 나서는 그였다.

선방은 칸이었다.

오우거의 대가리로 날아간 칸의 방패가

녀석의 두개골을 그대로 함몰시키고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뚜두둑 거리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함몰되었던 녀석의 두개골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것을 기점으로 녀석은 칸에게 달려들었다.

칸은 가볍게 왼쪽 방패를 들어 녀석의 공격을 막아냄과 동시에

이를 흘려냈고 녀석의 힘의 중심이 흐트러진 틈을 타

오른 방패의 칼로 녀석의 양 허벅다리를 잘라냈다.

녀석은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칸을 노려보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칸 역시 이를 즐기는 듯 녀석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양다리가 모두 회복되자 녀석은 기회를 노리는 듯

천천히 칸의 주위를 맴돌았다.

칸은 그저 코웃음 치며 가만히 녀석의 움직임을 관찰할 뿐

딱히 경계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이 움직였다.

일격으로 모든 걸 끝낼 계획인 듯

녀석은 자신의 머리만 한 해머로 칸을 내리쳤다.

칸은 방패를 변형해 그 충격을 흡수했고

당황한 녀석을 향해 그대로 에너지를 방출했다.

칸이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를 한 것인지

아니면 오우거의 힘이 별 볼 일 없었던 것인지

별다른 휘청거림이나 넘어짐 없이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방출했다.

오우거는 이를 버텨내지 못했다.

그대로 곤죽이 되어 터져 나가버렸고

그런 녀석을 보며 칸이 쓴웃음을 지었다.

“…별거 아니군.”

칸은 준비 운동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방패를 챙기고는 등을 돌려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탱커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근접 딜러로서도 나쁘지 않아.

아주 쓸만해. 전방을 맡기면 든든하겠어. 후후.’

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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