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 *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려던 한성의 폰이 요란히도 울렸다.
삐비비비빅.
“음…?”
강건이었다.
‘무슨 일이지.’
“예. 회장님.”
“오. 한성 군. 이제야 연락이 되는군.”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했습니다.”
“뭐 공사가 다망하면 그럴 수 있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아 헌터 배틀 대항전 때문에 연락했다네.
지금 시간 괜찮으면 협회로 와주겠나. 길드장들 모두 모여 있네.”
“지금 가겠습니다.”
“알겠네. 이런 벌써 왔나.”
강건이 전화를 끊기도 전에 협회장의 집무실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한성이었다.
“신참이 제일 늦게 오다니 이거 혼날 일 아닌가?! 으잉!?”
성용이 짐짓 무서운 얼굴로 한성을 다그쳤다.
“죄송합니다. 좀 바빴습니다.”
한성이 성용의 농에 웃으며 답했고 다른 길드장들과 인사를 나눴다.
“옷은 또 그게 뭐야. 수트…? 어디 시상식이라도 가나?”
“비밀입니다. 하하.”
이제는 길드장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한성을 보며
강건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후후후. 멋지구만. 뭘 그러나. 앉게. 한성 군.”
“감사합니다.”
한성이 자리에 앉자 강건이 다시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디까지 얘기했나. 아 그래. 마물들과 접촉한 각국 정상들과
협의와 이야기를 마쳤다네.”
“어떻게 됐습니까?”
“우선 저번에 언급했던 마물과 접촉한 국가들 중 일부와
우리나라가 긴밀한 동맹 협의를 맺었네.
앞으로 다가올 위협에 함께 대비하자는 뜻이지.”
“잠깐… 일부라고 하셨습니까?”
선우가 중얼거렸다.
“그래. 중국과 일본, 영국, 러시아는 우리와의 연대를 거절했네.
뭐 넷 모두 국가 보안상의 명목으로 이를 거절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보유한 헌터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얘기겠지.”
“예나 지금이나 하나 변한 게 하나 없군. 그놈들은.
하여튼 정이 안 가는 녀석들이야. 쯧….”
성용이 툴툴거렸다.
“영국과 중국, 러시아는 원래부터도 폐쇄적인 국가였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일본은 상당히 의외였네.”
“…뭐가 말이오?”
성용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일본의 고위 헌터 수는
대략 엠페러급 열에, 언터쳐블급 서른 정도밖에 안 되네.
뭐 우리 몰래 자신들의 전력을 숨기는 것일 수도 있네만….
미국 측 보고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으니 틀림없을 게야.”
“흠….”
“우리보다 엠페러급의 헌터 수가 많다고는 하나,
그 정도로는 충분치 않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만.
얼마 전 엠페러급 각성자 하나가 출현했다는 소문이 있었네.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마 그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 있긴 하네만… 정확한 것은 모르네.”
강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거 잘됐수. 난 속이 검은 놈들이랑 같이 일하기 싫수.
어유… 언제 쳐도 뒤통수를 세게 칠 놈들이요 그놈들이. 쯧.”
성용이 속이 시원하다는 말투로 대답해왔다.
“뭐 여하튼 그래도 영 나쁘지만은 않아.
동맹에 참여하지 않겠다 선언한 나라들도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알리는 것에는 찬성했으니 말일세.
또 이와 관련해서는 우리의 발언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어.
이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성과야.”
“멍청한 작자들. 다 죽고 나서 도와 달라 징징거리기만 해봐라.”
성용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나머지 국가들이 동맹에 응한 것이 어딥니까.
특히나 고위급 헌터의 수가 가장 많은 미국이 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입니다.”
형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맞아. 그것만 해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네.
나중에 협조를 대가로 무엇을 바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협조를 해주겠다는 의향이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맞는 말씀이세요.”
애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나 우리는 만약의 비상 상황을 걱정하고 있네.”
“전쟁보다 비상 상황일 게 또 뭐가 있수…?”
성용이 두꺼운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저번에 언급했던 대로 이번 헌터 배틀 대항전 때
각국 대표들을 모아 전쟁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공표할 걸세.
그러면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겠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국가들이 경계하며 협력 체제를 갖추고
전쟁에 대비하면 좋겠지만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을 게야.
한 치 앞을 모르고 당장의 피해나 손해를 생각하며
협력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게 우리가 염려하는 비상 상황이지.”
강건의 주름이 깊어졌다.
“저번 회의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들을 설득하려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애림이었다.
“음. 그래.”
“마물들이 인류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만한 증거자료를 제시해야 할 텐데 준비가 된 상태인가요?”
애림의 질문이 꽤나 날카로웠다.
“아주 좋은 질문일세. 쉴드장.”
삑.
창문이 불투명으로 바뀌고 조명이 꺼졌다.
벽면에 걸린 스크린에는 영상과 사진이 걸리기 시작했다.
“저건 우리이지 않습니까?”
재권이 중얼거렸다.
재권의 말대로 스크린의 영상에서는 마물들과 전투하고 있는
길드장 및 한성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래. 맞네. 그때 당시의 모든 상황이 찍힌 영상이라네.
말했듯 군부대 내에 있는 액션 캠에 찍힌 것이지.”
“어우… 저 때 생각하면 아직도 꿈자리가 사납수.
재수가 없으려니. 저걸 또 보네. 쯧.”
성용이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뭐 보다시피 화면도 노이즈 하나 없이 깨끗하고 선명해.
게다가 여기 길드장들 모두의 음성도 선명하게 녹음되어 있네.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마물과 한성 군과 대화도 마찬가지고.
이를 번역해 들려주면 될 게야.”
“…다행이군요.”
애림이 중얼거렸다.
“우리만 이 영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재권이 물었다.
“아니. 다행히도 우리뿐 아니라
마물들과 접촉한 다른 국가에서도 이를 보관하고 있더군.
뭐 화질이나 음성의 선명함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딱히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니 합치면 좋은 근거가 될 걸세.”
“…수고하셨네요.”
애림이 중얼거렸다.
“수고는 무슨. 뒷방 늙은이가 할 게 뭐가 있겠는가.
이리저리 정보원 노릇이라도 해야지. 후후후.
젊은이들을 사지에 보내놓고 늙은이 혼자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도움은 못 돼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안 그런가. 후후.”
강건이 웃으며 말했다.
“뒷방 늙은이라뇨. 현역 못지않으신 기력인데요 뭐.”
한성이 웃으며 답했다.
“그런가? 후후, 그래. 이제 준비는 다 되었네.
일이 뜻대로 흘러가기만을 빌면 될 일이야.”
삑.
조명이 켜졌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일세.
모두 2주 뒤에 있을 대회까지 몸조리들 잘하게.
물론 대회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왕 하는 거 대회에서 순위권에 들면 좋잖나. 하하.”
“노력하겠습니다.”
강건의 말에 선우가 답했고 나머지 길드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길드로 돌아온 한성이 타우한을 찾았다.
그리곤 그들의 부족 모두를 길드로 데려올 것을 명했다.
타우한은 한성의 말에 기쁜 표정으로 나아갔고
게이트 저편으로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짐을 진 타우렌 무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곡식이며 짚으로 만든 베개나 풀을 엮어 만든 이불들까지.
살림살이라 할 물건들은 모두 이고 지고 온 듯했다.
게이트를 넘어온 타우렌들은 도합 50.
30 남짓이었던 이전에 비해 그 수가 꽤나 불어난 상태였다.
게다가 그간 걱정들 없이 잘 지냈는지
어린아이들부터 늙은이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살이 포동포동 올라있었고 털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큰 인형 같아졌달까.
때마다 타우한을 시켜 식량과 선물을 들려 보냈고
경비로 데스나이트들을 더 보내어 방어에 힘썼으니
녀석들의 몸과 마음이 풍족했던 것이리라.
사실 데스나이트를 더 보낼 필요도 없었다.
한성의 권역이라는 것이 알려진 이상,
그 어떤 마물도 여기에 접근하지 않았으니까.
타우렌들의 무리 뒤로 파견 보냈던(?) 데스나이트들이 보였다.
한성이 손을 휘젓자 녀석들은 제 임무를 다했다는 듯
가슴을 두 번 치고는 한성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수고했다.’
한성의 말에 그림자 속에서 안광을 번뜩이는 데스나이트들이었다.
“우와…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에요?”
“후후. 그래. 여기가 너희가 살 곳이다.”
어린 타우렌 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한성을 향해 물어왔고
한성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타우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에 답해주었다.
어린 타우렌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이리저리 나다니며
물건을 만지고 벽을 짚으며 뛰어다녔고 신나 했다.
타우한은 그런 꼬마들을 상대하느라 쩔쩔맸고
신기했던 것은 큰 타우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이고 진 짐들을 내려놓고 이리저리 집을 살폈다.
세면대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며 신기해했고,
전등이 꺼지고 켜지는 사소한 것에도 놀라워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침대의 푹신함에 아이고 어른이고
누워보고 앉아보고 뛰기까지 했다.
귀여운 녀석들.
그런 타우렌들의 반응이 귀여웠던 한성이 기분 좋게 웃자
타우한도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타우한의 얼굴은 부족원들을 데려오라는 명에
뛸 듯이 기뻐하던 처음의 표정과 달리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아마도 자신들의 부족이 객식구, 혹은 군식구라 생각해서였으리라.
“명에 따라 초원 골짜기 부족 50명 전원이 무사히 도착했소.”
타우한이 장난치는 어린 타우렌 하나를
얼른 품에 안으며 한성을 향해 보고했다.
“모두 환영한다. 어서 와라. 오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이를 본 한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업서씀미다!”
“쉬잇!”
타우한의 품에 안긴 어린 타우렌 하나가 한성의 질문에 답했고,
타우한은 그런 타우렌에게 주의를 주고는 말을 이었다.
“없었소. 게이트를 열어 주었는데 어려움이 있을 리가.”
“그렇다면 다행이군. 후후.”
“염려해준 덕분이오.”
타우렌들을 바라보는 한성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어려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많아서 너희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너희를 늦게 데려오게 되었다. 미안하다. 늦어서.”
한성이 담담히 사과했다.
“아… 아니오. 주군이 우리 부족에 베풀어 준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데 주군이 왜 미안하오.”
한성의 사과에 타우한이 급하게 이를 말렸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후후.”
한성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가 오늘부터 너희가 살 곳이다.
마음 놓고 편하게 지내라.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든 좋으니 타우한을 통해 언제든 말해라. 뭐든 들어주마.
아 참 오늘을 기념하는 의미로 막걸리와 밀전병을 채워 두었으니
실컷 마시고 먹고 즐기도록.”
“고맙습니다. 주군!”
“고마워여. 쭈군!”
“고맙소. 주군. 내일 아침에 밥 먹으러 들르시오.
내 맛있는 거 해 놓을 테니. 허허허.”
아이, 청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성을 바라보며
타우렌들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한성 또한
그런 타우렌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 후로는 한성 여행사의 투어(?)가 시작되었다.
인간 세계의 물건들은 타우한으로서도 조작하기 어렵거나
모르는 것들이 많았기에 한성의 설명이 필요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