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119화 (119/336)

119화

* * *

쾅!!

“키에에에엑!!!!!”

굴러떨어지던 녀석의 몸이 별안간

무언가의 충격을 받아 산의 중턱으로 빠르게 솟구쳐 올랐다.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날개를 퍼덕였지만

자신의 거대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다시 떨어져 내렸다.

쾅!!!

몇 번 이를 반복하자 와이번은 점차 힘을 잃어갔고

노랗게 반짝이던 녀석의 눈은 생기를 잃고 흐려져 가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산의 아래에 당도한 녀석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날카롭던 이빨은 얻어맞은 것마냥 부러지거나 뽑혀 있었고

눈두덩이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굴러떨어지며 여기저기 부딪치고 긁혀서인지

비늘들은 뜯기고 벗겨져 찢겨져 있었고

날개는 이제 반쯤 부러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아무런 저항도, 몸부림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붉은 뭔가가 녀석의 대가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뭐지.’

오크였다.

‘저것인가.’

[하이 오크 대족장 칸.]

한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녀석은 확실히 일반적인 오크와는 그 모습이 달랐다.

오크들의 피부색이 녹색이거나 연두색 혹은

검은색이 섞인 녹색인 것에 반해 녀석은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게다가 녀석의 덩치나 키 또한 일반적인 오크의 배는 되어 보였다.

한성은 좀 더 녀석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그림자를 이용해 녀석의 곁으로 다가갔고 세밀히 살폈다.

3미터는 가뿐히 넘는 키에 딱 벌어진 어깨,

두꺼운 목과 몸, 당장이라도 근육으로 터질 것 같은 팔다리,

온몸을 가득 채운 우락부락한 근육까지.

오우거라 해도 믿을 만큼의 신체였다.

누가 칸을 보고 오크라 생각할 수 있을까.

전투에 미친 자라는 별명처럼 몸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했고

카카와의 전투로 인한 상처들이 자잘하게 보였다.

얼굴에는 문신인 듯 검은 문양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고

아래턱의 송곳니는 위로 솟아 위협적으로 보였다.

전투를 통해 얻은 전리품들인 듯 그의 몸 곳곳을 채운

판금 갑옷들은 전부 제 짝이 아닌 듯 엉성했다.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카카.”

녀석이 중얼거리며 와이번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굵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였다.

녀석은 자신의 몸만큼이나 큰 직사각형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다만 그 형태가 조금 이상했다.

일반적인 형태의 방패에 비해 모서리의 끝이 날카롭고 뾰족했다.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고 세계수의 곁으로 돌아가라.

넌 석산의 주인 자리를 걸고 나와 명예롭게 싸웠다.

이제부터 이곳은 나 칸의 구역이다.”

녀석이 와이번을 향해 중얼거렸다.

“크르륵….”

마지막 힘을 다해 카카가 고개를 들어 올려 칸을 바라보았다.

“잘 가라. 카카. 너의 이름은 나 칸의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크륵.”

자신의 패배를 인정이라도 한다는 듯 카카가 눈을 감았고

자신의 목을 칸에게로 들이밀었다.

칸은 그런 카카의 곁으로 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직.

툭.

그렇게 두꺼워 보이던 카카의 목덜미가

단 한 번의 내리찍음으로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승리했다. 동지들이여. 이제 석산의 주인은 나 칸이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부족민인 듯 뒤따라온 오크들이 칸을 따라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짝짝짝.

함성이 잦아져 갈 때쯤,

숲에서 들려온 박수 소리에 칸의 얼굴이 굳어졌다.

녀석은 급히 방패를 들어 올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누구냐.”

‘지척까지 와 있음에도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널 만나러 온 자.”

칸은 음성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소년이 있었다.

근방에서 본 적 없는 옷을 입은 묘한 느낌의 소년이.

‘…뭐지.’

눈앞의 소년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명체라면 마땅히 느껴져야 할 기척도 소리도.

심지어 날아가는 작은 새에게도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無) 그 자체.

자신의 모든 힘을 갈무리하고

숨길 수 있을 만큼의 강자라는 뜻이리라.

‘…괴물이 아닌가.’

게다가 칸은 소년의 발아래에 있는 그림자가

기분 나쁘게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그림자에서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위험하고도 어두운 힘을 느꼈다.

마치 무저갱을 보는듯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저 힘은 또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체를 밝혀라.”

칸이 소년의 몸 보다 두 배는 클 법한 방패를 들어

소년을 가리키고는 중얼거렸다.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이름은 이한성이다.

종족은 인간이고, 너에게 아주 관심이 많은 자다.”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이려는 듯

소년은 두 손을 들어 무기가 없음을 보였다.

“…인간…? 처음 들어보는군.”

칸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에게선 자신과 싸울 의도가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자신도 방패를 내렸다.

무기를 들지 않은 자에게, 싸울 의지가 없는 자에게

무기를 들어 겁박하고 협박하는 것은 명예로운 행동이 아니니까.

“그럴 만도 하지. 이쪽 세계에는 인간이 살지 않으니.”

“날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냐.”

“딱히 목적이랄 것은 없다. 뭐… 아니지 목적이 있긴 하군.

긍지 높은 하이 오크의 대족장 칸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고

그와 술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널 찾았다.”

흠칫.

“내 이름을 알고 있는가.”

“물론.”

소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묻겠다. 날 찾아온 목적을 말하라.”

빙글빙글 웃기만 하는 소년의 태도에

짜증이 났는지 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년이 인벤토리에서 청주 한 병을 꺼내 들며 답했다.

“그 이야기는 술 한잔하며 천천히 나누지.”

* * *

“크으으. 이거 참 즐겁구만.”

칸이 바가지 속 가득 들어찬 청주를 마시며 즐거이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하이 오크들의 주거지에는 한바탕 축제가 벌어져 있었다.

깊은 밤이었음에도 중앙 화롯가에 쌓아둔 나무더미들이

높고 크게 타올라 그 밝기가 대낮 같았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듯 소음에 가까운 노래를 부르는 녀석부터

노래에 맞춰 춤인 듯 이상한 몸짓을 하는 녀석까지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이렇게 질 좋은 술을 마신 것이 얼마 만인지….

아주 좋군. 좋아. 고맙다. 이방인 크하하하하.”

“잘 먹겠다. 이방인!!”

“고맙다!!”

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족원들의 인사가 한성에게로 쏟아졌다.

한성과 부족원들의 사이는 처음보다 많이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한성은 녀석들의 인사에 싱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좋은 거냐. 아니면 내가 가져온 술이 좋은 거냐.”

흥겨워 보이는 칸을 향해 한성이 핀잔을 주듯 중얼거렸다.

“가져온 술이 더 마음에 들지만, 네 녀석도 마음에 드는 걸로 하지.

엄청난 양의 술을 가져 왔길래 통이 큰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속이 좁구만? 응? 하하하하하하.”

칸이 호쾌하게 웃어댔다.

“그거 다행이군. 후후.

너희들이 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서

준비한 것인데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한성이 술에 취해 시끌벅적한 부족의 무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녀석들은 말 그대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죽하면 술을 빚을 줄 아는 마물들을 납치해 술을 빚게 했겠나.

뭐 성화에 못 이겨 도망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하하.”

“아 그 코볼트 녀석 말입니까?”

새끼 보어를 통째로 씹던 2인자 오크가 칸에 대꾸했다.

“그래. 사흘 만에 도망갔지 아마?”

칸이 슬며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나…?

“이봐. 보어 구이는 아직 멀었나!”

칸이 소리쳤다.

“곧 갑니다. 족장.”

말과 함께 한성의 열 배는 돼 보이는 보어가 통째로 구워져

한성과 칸의 앞으로 대령되었다.

쿵.

한성과 나란히 앉은 칸의 나무 탁자 위로 보어 구이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자자. 어서 먹도록. 보어 구이는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지.”

보어의 왼쪽 뒷다리를 우악스럽게 잡아 뜯은 칸이

한성에게 이를 권했으나 한성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콰드득.

한성이 거절하자 칸은 잘됐다는 듯 거칠게 다리를 베어 물었다.

“아까부터 왜 들지 않는가. 혹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가?”

우직우직 소리와 함께 그 억센 보어의 뼈까지 씹어 먹은 칸이

한성을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배가 불러서 그런 것뿐.”

그 말은 사실이었다.

조악하게 굽고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향신료를 치긴 했으나,

보어 통구이는 인간의 세계에선 먹어보지 못할 별미였다.

“보어 새끼 한 마리조차 먹지 않았으면서

뭐가 그리 배가 부르다는 것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성을 바라보는 칸이었다.

“모든 이들이 너처럼 먹진 않는다.

만약 모든 이들이 너처럼 먹어댄다면

세상에 짐승들이 남아나질 않을 거다.”

“크하하하하하 뭘 이 정도 가지고. 과장은.

그나저나 정말 다 먹은 건가?”

녀석이 한성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보어의 뒷다리에 손을 올렸다.

“그래. 다 먹었다. 그러니 손님 앞이라고 점잔 떨 필요도 없고,

내게 그렇게 체면 차리지 않아도 된다.”

“그럼 사양 않고 먹지. 크하하하하하.”

칸이 나머지 오른쪽 뒷다리를 잡아 뜯으며 호쾌하게 씹어댔다.

“먹는 것만 봐도 내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군.”

한성이 중얼거렸다.

“쯧쯧. 그렇게 적게 먹으니 크지 못하는 것이다.”

칸이 앞다리를 뜯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미안하지만 네가 비정상적으로 큰 것이다.

내 종족 중에서 난 꽤 큰 편에 속한다.”

“…그래? 참으로 작은 종족이로군.”

“그런가? 후후.”

“그나저나 이 많은 술을 정말로 우리에게 주는 것인가?”

칸이 창고에 가득 쌓고도 자리가 모자라

밖에다가 정리해둔 술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뇌물이라 해두지.”

한성이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고맙게 받지. 카하하하. 덩치는 작아도 배포는 아주 크구만. 그래.”

팡.

‘?!’

한성의 등을 내리친 칸의 눈이 커졌다.

물론 힘을 모두 실은 것도 아니고

친근함의 표현으로(?) 내리친 것이긴 하지만

한성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오히려 내리친 칸의 손만 저렸다.

마치 단단한 쇳덩어리에 손을 내리친 기분이랄까.

‘…뭐 이런….’

“왜 먹다 마나. 체하기라도 했나.”

한성이 칸을 멀뚱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싱겁긴.”

한성이 눈앞의 과일을 집으며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 옷차림은 뭐냐. 신기하게 생겼군.”

칸이 궁금하다는 듯 한성에게 물었다.

“우리 세계에서는 수트라 부르는 것이다만….

너희 세계에도 이런 형태의 옷이 있을지 모르겠군.”

“본 적 없다.”

“꽤나 멋지지 않나.”

“뭐. 그렇긴 한데.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구만 그래.

게다가 움직이는 데 불편해 보여. 실용적으로 보이지는 않아.”

“후후후. 글쎄다. 그리 쉽게 찢어지진 않을 거다.

움직임에도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고 말이야.”

한성이 웃으며 답했다.

“그건 그렇고 너의 부족원은 이게 다인가.”

한성이 거주지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대답하는 칸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였다.

왜인지 쓸쓸해서 하는 듯한 얼굴이었으니까.

몇백 명은 충분히 수용하고 남을 으리으리한 규모에 비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하이 오크들의 수는 너무 적었다.

한 집당 한 명이 들어가도 집이 남아돌 정도였으니까.

현재 눈에 보이는 하이 오크들은

기껏해야 스물에서 서른 남짓한 수.

요리와 경비하는 녀석들을 합치더라도 그 수가 마흔을 넘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마물들 사이에서도 오크는

욕구가 왕성해 번식력이 높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오크 한 무리를 발견한다면 그 무리가 몇이 됐건

그와 같은 수의 무리가 백은 더 있을 거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런 오크인데도 녀석들의 수는 너무 적었다.

하이 오크가 가진 유전적 문제인가?

여러 생각을 하던 한성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유가 있나.”

“…크으….”

바가지 가득 술을 들이켠 칸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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