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 *
거울에 이리저리 모습을 비춰보던 한성이
자신의 모습이 꽤나 흡족했던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거울 속에는 수트를 입은 한성의 모습이 있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흰색 와이셔츠에 슬림한 검정 넥타이,
맞추기라도 한 듯 한성의 몸에 딱 맞게 제작된 검정 수트.
검은 불꽃 문양이 작게 새겨진 허리의 버클.
검고 윤기 나는 구두와 피부마냥 달라붙은 얇고 검은 장갑.
넓은 어깨에 큰 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한성이어서인지,
어느 모델이나 연예인 부럽지 않은 태를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도 옷을 방어구처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생각했던 한성이었다.
갑옷을 입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거니와
몸에 밀착되는 가죽 갑옷을 입는다 해도 둔해 보여
방어구 입기를 싫어했으니까.
그렇기에 공방장에게 부탁하려 한 방어구의 형태가
지금의 한성이 입은 수트 그 자체였다.
어느 자리에 가도 어울리는 옷이었고,
꽤나 멋지기까지 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역시. 마음에 드는군.”
한성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불편함이 있는지 확인했다.
과격한 움직임에도 찢어지기는커녕 늘어나는 데다,
조금도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만간 녀석들 것도 만들어줘야겠군.’
“다음. 퀘스트창.”
[퀘스트 : 2차 전직 – 이터(Eater)]
[조건 1 : 마물 1만 마리 제거. 26884/10000]
[조건 2 : 격전의 어금니 숙련도 MAX 도달]
[조건 3 : 힘 150/ 민첩 300 도달]
[퀘스트 성공 시 : 전직]
[퀘스트 실패 시 : 전직 기회 박탈]
[모든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전직하시겠습니까.]
“확인.”
[축하합니다. 히든 클래스 이터(Eater)로 전직합니다.]
[스킬 : 격전의 어금니가 특정 조건을 충족,]
[스킬 : 포식(捕食)으로 진화합니다.]
[스킬 : 소화를 습득하셨습니다.]
[퀘스트 초과 충족 보상으로 보너스 스탯 포인트가 주어집니다.]
전직에 관련된 수많은 알림들이 들려왔지만,
딱히 전직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체감상 달라진 것도 없었고, 외형이 변한 것도 아니니까.
우선 스킬부터 살펴야겠지.
“스킬창.”
[스킬 : 포식(捕食).]
·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멸의 그림자.
· 대상을 가리지 않는 폭식의 힘.
‘모든 것이라… 흐음….’
[스킬 : 소화.]
· 포식한 대상의 에너지를 소모해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힘.
· 소화 시 상태
20 % = 기뻐하는 자 / 40 % = 노래하는 자
60 % = 열광하는 자 / 80 % = 분노하는 자
100 % = 미쳐버린 자
· 시전자의 역량에 따라 스킬 지속 시간과
스킬 사용 후에 생길 페널티의 정도가 상이(相異).
‘이게 무슨…?’
스킬의 위력이나, 드는 마력의 수준, 혹은 지속시간이라든지
구체적인 수치나 설명 없이 그저 추상적인 상태만을 나열한
소화의 두 번째 설명이 한성에게는 생소하게 다가왔다.
직업 선택 전에 미리보기에서 봤던 것은
열광하는 자와 미쳐버린 자인 듯싶었다.
게이지에 따라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것일 테니,
딱히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겠다 싶어도
이런 스킬 설명은 게임에서조차 본 적 없었기에 황당한 한성이었다.
‘흠… 경험해 보면 알 일이다.’
“상태창.”
캐릭터 명 : 이한성
직업 : 이터(Eater)
Lv 73
HP : 1475
MP : 1060
힘 : 200
민첩 : 370
지능 : 80
행운 : 25
스탯 포인트 : 100
바뀐 직업명과 방어구 덕분에
비약적으로 늘어난 HP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흠… 1475라… 이게 높은 건지….
낮은 건지 기준점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투덜거리는 한성의 눈에 100의 스탯 포인트가 들어왔다.
보너스 스탯 포인트치고는 굉장히 후한 숫자였다.
“…100포인트라… 흠….”
한성은 모조리 지능에 이를 투자하기로 했다.
힘과 민첩은 이미 충분하기도 한 데다
늘어난 힘과 스킬들을 뒷받침하려면
무엇보다도 충분한 마력이 필요했으니까.
다만 예전부터 행운이라는 스탯은 왜 있으며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던 한성이었다.
낮은 레벨이었을 때는 피 같은 스탯 포인트가 아까워
어떤 능력을 올려주는지 확실하지 않은 행운에 집중하는 것보다
눈에 띄게 그리고 명확하게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힘과 민첩, 지능에 골고루 분배했던 터였다.
“흠… 회피율이려나…? 아니면… 크리티컬 확률을 높여주려나….”
일반적인 게임에서 행운은 기본적으로
회피율이나 크리티컬 확률을 높여주는 스탯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쉽게 말하자면 회피의 확률을 높여주는 것과
일정 확률로 적에게 가하는 공격 데미지가
더욱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시스템이 만든 체제 안에서도 그것이 통용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굳이 도박을 할 이유는 없으니.”
스킬창과 상태창을 다시 살핀 한성이 이를 끄고 벨루몬을 호출했다.
“벨루몬.”
“하명하소서.”
음산한 벨루몬의 목소리가 한성의 방을 가득 채웠다.
“슬슬 새로운 동료를 얻어야겠다.
칸을 만나러 갈 것이다. 준비해두도록.”
“이미 준비되어있나이다. 언제든 말씀만 하소서.”
“그래…? 그럼 내일 가도록 하지.”
역시. 벨루몬.
“예. 그나저나 주군.”
“음?”
“새로운 경지로 진입하신 것을 진심으로 경하드리옵니다.”
“…알고 있었나?”
“느껴지는 기운부터가 다르옵니다. 주군.”
“어떻게 다른데.”
“망령된 말씀일 수 있으나 지금 주군에게선
저조차도 소름 끼칠 정도로 위험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망자의 왕이라 불리던 저조차도
주군으로부터 벗어날 순 없을 것 같사옵니다.”
“흠….”
“탐식, 포식, 악식, 폭식….
이 모든 단어를 아우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아마 주군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
한성의 그림자에 숨겨진
포식의 힘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벨루몬이 몸을 떨었다.
“예. 주군은 세상을 삼키실 위대한 포식자가 되셨나이다.
주군의 군사로서, 주군의 종으로서 주군께서 강해지시는 것은….
저에겐 한없이 기쁜 일이옵니다.”
벨루몬의 말대로 그의 만면에는 웃음 비슷한 것이 지어져 있었다.
“…고맙군.”
“당연한 것입니다.”
“돌아가 쉬고 있도록. 내일 다시 부르겠다.”
“지엄하신 왕의 명을 받듭니다.”
음산한 벨루몬의 말이 끝나자 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포식자라… 흠….”
* * *
“후우…슬슬… 만나러 가봐야겠지.”
운동이 끝난 듯 연무장에 누워있던 한성이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벨루몬, 타우한, 티에라.”
“예. 주군.”
연무장에 셋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칸을 만나러 갈 것이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말하도록.”
“그는 하이 오크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주군.”
벨루몬이 즉시 답해 왔다.
“하이 오크…? 오크와 뭐가 다르지?”
“오크의 상위종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상위종이라…?”
“예. 지능도, 신체 능력도 일반적인 오크에 비해 월등히 높습니다.
그들의 힘은 오우거나 트롤들도 겁에 질려 도망할 만큼 강인하며
그들의 민첩함은 엘프 못지않습니다.”
“그래?”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자신들보다 약한 자들을 공격하거나 침략해 약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힘이 같거나 더 큰 마물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것을
더 큰 명예로 아는 자들입니다.”
“명예를 아는 자라….”
“예. 그렇다 보니 자신들을 오크라 불리기보다는
명예를 아는 자라고 불리길 원합니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
명예를 아는 자라는 이름이 전혀 부끄럽지 않아.”
“그들은 적이 아무리 강해도
주눅 들거나 도망하지 않는 강인한 전사들이라 들었어요.
그들의 마음을 꺾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덤비고 또 덤비겠죠.
그게 그들의 명예이니까. 제가 걱정하는 건 그거예요.
힘으로 그들을 꺾을 수야 있겠지만, 마음마저 꺾을 수 있을지….”
티에라가 중얼거렸다.
“그건 곤란한데… 흠….”
“주군. 걱정할 필요 없소. 무후후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칸은 수하 삼기 쉬울 것이니까.”
한성이 얼굴을 찌푸리자 타우한이 입을 열었다.
“왜지?”
“앞서 군사와 티에라 양이 말했다시피
그들은 명예를 중시하는 용맹한 자들이오.
이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자들이란 뜻이기도 하오.
그러니 정당한 대결을 통해 명예도 지켜주고
승리를 쟁취한다면 오롯이 그들을 얻을 수 있소.”
“…하지만 어떻게?”
“피의 성전을 제의하면 되오.”
“피의 성전…?”
한성이 되물었다.
“우두머리 자리를 건 결투를 뜻하오.
그들에게 있어 이는 매우 신성한 것이오.
도전을 받은 우두머리는 절대 그 도전을 거절할 수 없고,
결과는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하오. 그것이 그들의 규칙이니까.”
“…그래?”
“주군의 압도적인 힘 앞에 결국 그는 무릎 꿇을 거고
정당한 대결을 통해 패배한 것이니 그것은 불명예가 아니게 되오.
그렇게 되면 그를 온전히 얻을 수 있소.”
타우한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피의 성전은 하이 오크 일족만이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나요…? 외부인인 주군께서 어떻게 이것을….”
티에라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벨루몬이었다.
“…?”
“피의 성전은 그들에게 있어
목숨을 걸고 우두머리의 자리를 다투는 명예롭고 신성한 의식이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있어 명예란 얘기지.
그렇기에 그자는 결투 후에 자신을 죽이지 않는 주군을 보고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자결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방법 있어?”
한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타우한을 바라봤다.
“무후후. 아주 간단하오. 약간의 준비물과
약간의 연기 그리고 주군의 혀만 있으면 가능하오.”
타우한이 씩 웃으며 이에 답했다.
“…그게 뭔데?”
“무후후. 그게 말이오….”
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필살 공략법(?)을 듣던
한성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어렸다.
* * *
[칸의 지배구역에 들어섰습니다.]
[대상 ‘칸’을 복속시키십시오.]
“여긴가.”
시스템의 알림을 들으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 한성이 중얼거렸다.
게이트를 넘어서자 한성을 맞이한 것은 조용하고 울창한 숲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무 소리,
촉촉하게 젖은 이끼 냄새와 나무들이 뿜어내는 청량한 공기가
한성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좋군.”
“키에에에엑!!!!”
“음?”
여유도 잠시 저 멀리서 마물의 소리가 작은 소리로 들려왔다.
들려오는 소리에 칸들의 주거지인가 싶어
자세히 살펴봐도 이렇다 할 삶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살펴본 그곳은 풀 한 포기조차 나지 않고
돌만이 가득한 암석지대였다.
깎아지르듯 가파른 절벽에 위험천만한 낭떠러지까지.
생명체가 거주하기는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그 순간 높고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펄럭! 펄럭!
힘찬 날갯짓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의 주인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꼬리 와이번 카카.]
‘와이번이라… 흠.?’
잿빛의 몸에 이름처럼 붉은 꼬리.
날카로운 눈매에 샛노란 눈동자.
굵고 두꺼운 몸과 이를 뒤덮은 단단한 비늘.
다 펴면 10m는 족히 될 법한 튼튼한 두 날개까지.
녀석이 석산의 주인이리라.
그런데 녀석은 석산의 주인으로서 보여야 할 위엄을 떨치기는커녕
뭔가에 쫓기는 것마냥 허겁지겁 급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었다.
자세히 살펴본 녀석의 몸 곳곳에는
자잘한 상처와 떨어져 나간 비늘, 흘러내리는 피가 보였다.
녀석은 쫓기는 모양새였고 불안함과 두려움이 눈에 어려 있었다.
누가 그를 쫓는 것일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던 그때.
큰 소리가 들려왔다.
쾅!!
녀석이 단단한 날개로 석산의 봉우리를 후려갈겼다.
우르릉
충격에 많은 수의 바위와 돌덩어리들이 부서져 내렸고
산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바위 하나.
족히 5, 6미터는 될법한 크기에 못해도 5톤은 가뿐히 넘길 것 같은
큰 바위 하나가 산 아래로 빠르게 굴러 내려갔다.
쾅!!!!
“키에에에엑!!”
무언가에 의해 큰 충격을 받은 바위는 그대로 산산 조각나
수십의 탄환이 되었고 와이번에게로 솟구쳐 올랐다.
부서져 날카로운 바위의 단면들이 빠르게 솟구쳐 와이번을 강타했고
날개의 비막(飛膜)을 찢고 꿰뚫었다.
기우뚱
녀석의 몸이 기울고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찢어진 비막 때문인지
녀석의 날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듯 보였고
녀석은 공중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결국 떨어져 내렸다.
쿵….
떨어진 녀석은 산의 급한 경사에 볼품없이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굴러떨어지지 않으려 날개를 퍼덕이고 발버둥 치며 버티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의 무게는 무거웠고 산의 경사는 가팔랐다.
정신없이 굴러떨어지던 녀석이 산 아래에 당도할 때쯤,
다시 한번 큰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