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 *
이전의 벨루몬에게도 상대가 되지 못했을 하급 마물들은
성장한 지금의 벨루몬에게는 준비운동조차 되지 못했다.
벨루몬은 게이트 공략을 시작하자마자
F급 게이트 56개 모두에 데스나이트 1기씩을 보냈고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아 모든 게이트들을 공략했다.
데스나이트들이 F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동안
자신은 E급 게이트 36개 모두를 돌아다니며
꽤나 재미를 봤던 체인 라이트닝으로 마물들을 휩쓸고 다녔다.
덕분에 협회 내 공식 기록은 또다시 새로이 경신되었고,
벨루몬은 한성의 이름을 드높였다며 이에 매우 흡족해했다.
벨루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마물들의 사체와 드롭된 아이템,
마물을 시켜 캐내거나 주운 마력석들을 모아
곧바로 공방장에게로 가져다주었다.
타우한과 티에라의 사정도 벨루몬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C급 게이트라 해봐야 D급 E급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지
엠페러급인 힘을 가진 둘을 긴장하게 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루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마물의 사체나 아이템이 파손될까
티에라는 최후의 보루를 사용하기는커녕
일반 마력 탄으로 정확히 미간만 노려 사냥해야만 했다.
타우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할 일이 있을 리가 없다.
미리 만들어둔 탄을 사용했기에 티에라가 지칠 일도 없었고
수준 낮은 마물들만 상대했기에 티에라가 다칠 일도 없었다.
티에라에게 버프라도 걸었다간 마물들이 터져 나갈 것이고
그렇다고 벼락을 내리친다면 녀석들의 가죽이 다 타버려
상품성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타우한 스스로에게 버프를 걸어 맨손으로 때린다 해도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곤죽이 되거나 터질 것이다.
결국 타우한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마력석을 캐거나 약초나 버섯, 과일을 따는 것뿐이었다.
티에라와 타우한 역시 게이트 공략 기록을 갈아치웠고
모은 아이템과 마물의 사체, 마력석은 벨루몬에 의해
공방에 있던 공방장에게로 옮겨졌다.
협회는 갑작스레 그리고 동시에 들려온
127개의 게이트 공략 소식에 지도와 데이터를 업데이트하느라
일정에도 없던 잔업을 해야 했고,
공방장은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마물들의 사체와 마력석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 *
“대단하군요. 후… 이건 대단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박 실장이 보고서를 살피고는 벨루몬과 티에라, 타우한을
번갈아 보며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
“듣기 좋군. 좀 더 찬양하도록.”
벨루몬이 한껏 거만한 표정과 자세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공략에 나설 때마다 매번 새로운 기록을 갈아 치우시니….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뭐. 이 정도쯤이야. 후후.”
“거 민망하지도 않소?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후후후.”
벨루몬의 의기양양한 표정과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이를 쳐다보는 타우한,
그리고 이 둘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티에라였다.
“그나저나 주군이 늦으시는군.”
벨루몬이 중얼거렸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박 실장이 시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혹시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주빈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쯧. 네놈 따위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저 정도 되는 수준의 쓰레기들이 주군의 상대가 될 리 없다.
뭐. 잠시 잠깐 유희를 즐기시는 것이겠지.”
벨루몬이 주빈을 향해 마뜩찮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 예.”
주빈이 벨루몬의 노기를 낮추려 빠르게 답했다.
“박 실장님. 지금 몇 개째인 건가요?”
현철이 물어왔다.
“네 개중에 세 개째입니다.”
“예???? 벌써요????”
담담히 말하는 박 실장과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한 현철과 달리
상당히 놀라워하는 주빈이었다.
게이트 공략이 시작된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
마에스트로와 언터쳐블급 헌터들로 구성된 공격대가 들어가도
평균 하루 이상 걸리는 것이 B급 게이트인데….
아무리 엠페러급이라지만 한성은 혈혈단신이었고
벨루몬들의 도움도 하나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두 개를 공략한 것도 모자라서 세 개째라니….
‘…대단하다.’
게이트를 바라보는 주빈의 눈이 반짝였고
그 안에는 한성에 대한 경외와 존경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오시는군.”
벨루몬의 안광이 번뜩였다.
쉭.
벨루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게이트에서 한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 실장이 웃으며 한성을 반겼고
한성이 다친 곳이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살피는 모습이었다.
“괜찮습니다. 수중 던전이어서 시간이 좀 걸렸을 뿐.
딱히 다치거나 지치진 않았습니다. 숨 참는 게 제일 어려웠네요.”
그의 옷과 머리칼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불어라. 미풍이여.”
타우한의 중얼거림에 따뜻한 바람이 한성을 휩싸고 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젖어있던 한성의 머리칼과 몸은
다시 뽀송뽀송하게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고마워.”
“별말씀을. 후후.”
후우웅….
한성의 뒤에서 굳건히 자리하던
게이트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줄어들던 게이트가 완전히 사라져 소멸되자
박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현 시간 16시 34분 32초. B―125번 게이트를
56분 31초에 공략 완료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56분…?”
주빈이 황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후후후. 뭘 이 정도 가지고 놀라나.
주군의 힘은 이게 다가 아니라네.”
타우한이 마치 제 부족의 어린아이를 보듯
주빈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 다음으로 가시죠.”
“아. 네. 휴식 없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뭐. 전혀 문제없습니다.”
“사실이오. 주군의 몸은 전혀 이상 없소.”
타우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알겠습니다. 계속 가시죠.”
주치의(?)격인 타우한의 말이었기에 더는 이견을 달지 못하고
이를 수락하고 마는 박 실장이었다.
* * *
“휘유… 넓구만.”
한성이 이마에 손을 대고 멀리까지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게이트 안은 가도 가도 모래밖에 보이지 않는 사막지대였다.
그 흔한 나무 하나 보이지 않았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메마른 황야였다.
내리쬐는 뙤약볕은 뜨거웠고
불어오는 열풍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한성이야 한서불침의 힘 덕에 조금의 더위도 느끼지 못했다.
불어오는 바람도, 내리쬐는 뙤약볕도
한성에게는 한낱 봄날의 살랑임 정도였다.
뼈밖에 없는 벨루몬은 더위를 느낄 리 없었고,
티에라는 그럭저럭 잘 참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타우한은 그렇지 못한 듯 보였다.
게이트를 넘어선 그 순간부터 숨을 쉬기 어려워했다.
가죽도 두꺼울뿐더러,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으니
아무래도 더위에 약한 것이리라.
“무후우… 주군. 난 나가 있어도 되겠소?
이 녀석들 따위야 주군의 준비 운동 수준도 안 되질 않소.”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타우한이 우는 소리를 했다.
“쯧… 주군의 신하라는 자가 이깟 더위에 죽는 시늉이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군그래.”
벨루몬이 중얼거렸다.
“군사야 뼈밖에 없으니 이 느낌을 어찌 알겠소.
아니 애초에 죽은 자들과만 부대꼈으니
산 자의 감각을 느껴본 적은 있으려나 싶군.”
벨루몬의 말에 빈정거리듯 툴툴대는 타우한이었다.
“뭐라?”
벨루몬의 안광이 타오르려던 순간.
“다 나가.”
한성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주군. 허나 주군의 군사로서 혹시나 있을 위협에 대비하는….”
“나가.”
“예. 주군.”
싸늘하게 내뱉는 한성의 말에 벨루몬은 빠르게 답하고는
타우한과 티에라를 재촉해 게이트로 향했다.
“그리고 벨루몬.”
“예. 주군. 하명하소서.”
“내기를 기억하나.”
흠칫.
“…기억하나이다.”
“그 어떤 갈등도 빚지 말라 했을 텐데.”
“…가… 갈등이 아니오라… 이는….”
“조심하도록.”
“예. 명심하겠습니다.”
고소하다는 듯 타우한이 이를 보며 배를 잡고 웃어댔고
벨루몬은 이런 타우한을 보며 분을 참지 못하고는
뼈 소리가 날 정도로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젓는 티에라였다.
“나가서 대기하도록.”
“예.”
셋이 사라지자 한성이 중얼거렸다.
“후우. 가 볼까.”
* * *
“쿠와아아아아아악!!”
“거 몇 놈 죽였다고 시끄럽기는….”
한성이 귀를 막으며 중얼거렸다.
게이트의 주인이자 보스 몬스터는 특이하게도 두 마리였다.
암수 한 쌍의 샌드 웜이 바로 그것이었다.
몸길이만 10미터가 넘고 굵기가 2미터나 되는 지렁이.
그것이 녀석들의 정체였다.
이미 크기에서 보통의 지렁이들과 차이가 크긴 하지만(?)
보통의 지렁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목구멍 안까지 가득 들어찬
날카로운 이빨과 피부에서 뚝뚝 떨어지는 끈적한 점액질,
그리고 500m 밖에서도 느낄 수 있는 악취였다.
녀석들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주위에는 녀석들이 낳아서
길러낸 자식들 수백 정도만이 있었을 뿐.
씨 도둑질은 못 한다는 옛말처럼, 그들의 모습 또한
제 부모를 빼다 박아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온갖 역겹고 징그러운 모습들을 봐와
비위가 단련이 될 대로 된 한성으로서도
수백이 넘는 지렁이가 꾸물거리는 모습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녀석들을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에 격전의 어금니와 치명적 일격을 두른 나이프를 쏘아 보내
녀석들을 빠르게 베어냈다.
새끼들이 죽어가며 질러대는 비명에 모성과 부성이라는 개념이
녀석들에게도 있었던지, 지금처럼 고함을 지르며 한성에게로
다가오는 녀석들이었다.
“으으… 징그러.”
한성의 손짓 한 번에 이백은 될 법한 숫자의 나이프가
녀석들에게로 쏜살같이 나아갔고 베어냈다.
아니 베어 냈어야 마땅했다.
투두두두둥!
“음…?”
북을 치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
진즉에 들려왔었어야 할 녀석들의 비명 소리나
격전의 어금니가 살점을 씹어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성이 바라본 그곳에는 샌드 웜들의 주위에서
뚫지도 베지도 자르지도 못하고 주위만을 선회하고 있는
이백의 나이프들이 보였다.
녀석들을 살펴보니 안 그래도 미끌거리던 녀석들의 피부에서
이제는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기까지 하는 점액질들이 보였다.
방어기제겠지.
이러한 점액질로 뒤덮인 녀석들의 피부는
나이프들이 뚫거나 베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점액질에 닿은 나이프들은
미끄덩거리며 녀석들에게서 튕겨져 나가거나
마치 의지라도 가진 것마냥,
자신들의 검신에 묻은 점액질을 털어내느라 떨고 있었다.
심지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악식(惡食)과 폭식(暴食)의 격전의 어금니마저도
이를 씹거나 삼키기를 거부하는 듯했다.
지금껏 만난 마물들 중에 격전의 어금니가 삼키지 않았던
존재는 없었거늘….
어찌어찌 새끼들까지는 먹어줄 만(?)했지만
어미와 아비는 영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이글거리며 일렁였어야 할 격전의 어금니는
언제 사라졌는지 나이프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빌어먹을.”
최강의(?) 마물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악취가 한성의 코를 찔러댔다.
냄새에 털이 쭈뼛 서는 한성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그림자 단검을 손에 쥐었다.
검신의 끝으로 1미터 가까이 되는 검기가 날카로이 어렸다.
분노로 다가오던 녀석들도 느껴지는 기운에 놀랐던지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하려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비대했고
다가오던 속도는 빨랐으며 흑월난무는 이미 한성을 떠난 뒤였다.
푸화아아악.
녀석들의 물컹거리던 몸도 흑월난무의 광기는
이겨낼 수 없었던 지 그대로 깍두기마냥 갈라져 내렸다.
액체와 고체 중간 정도쯤 되는
주황색의 액체랄 것들이 갈라진 틈으로 쏟아져 내렸고
지독하던 악취는 더욱더 심해져 한성의 두통을 자극했다.
“우욱….”
[던전의 주인을 처리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격전의 어금니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격전의 어금니의 숙련도가 MAX에 도달합니다.]
[그림자 이동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그림자 병기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그림자 병기의 숙련도가 MAX에 도달,]
[헤파이스토스의 그림자로 진화합니다.]
쉭.
들려오는 수많은 알림 소리와 녀석들을 뒤로한 채
한성이 게이트 근처의 바위로 몸을 옮겼다.
설령 엄청난 가치의 아이템이 드롭되었다고 해도
한성으로서는 다시 그 사체에게로 돌아가 그것을
뒤질 용기는 없었기에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후웅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이미 게이트 밖은 꽤나 어둑해져 있었다.
매캐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도 한성은 소박한 행복(?)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