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 *
“포기하기는 아직 이르지.”
스걱.
김 병장의 목을 조르던 구울의 몸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커허어억.”
털썩.
구울이 쓰러져 내리자 김 병장도 함께 쓰러져 내렸다.
숨이 돌고 흐려지던 의식과 시야가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헉… 헉… 헉….”
“괜찮아요?”
김 병장은 당장이라도 죽을 듯 기침을 뱉어냈다.
“괘… 괜찮슴다. 크허…ㄱ.”
“그럼 다행이고. 후후.”
“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병장은 감사 인사와 함께 고개를 들어 자신을 구해준 이를 봤다.
“…응?”
그곳엔 뉴스와 인터넷에서나 보던 익숙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 이한성 헌터?”
“큰일 날 뻔했습니다. 뭐… 숨이 끊어졌더라도 살려냈겠지만.”
한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김 병장!!!!!!!!”
“저기 일행분들 오네요. 여기는 저한테 맡기시고.
얼른 자리로 복귀하세요. 얼마 안 있어 곧 끝날 겁니다.”
스팟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림자 속으로 한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지만 아프기만 했고
구울이 잡았던 목의 통증도 여전했다.
발 앞에 쓰러져 있는 반 갈린 구울의 사체와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시체 썩은 내가 김 병장으로 하여금
지금의 상황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자각하게 했다.
“김 병장!! 괜찮아??!”
“김 병자임! 어허어어엉.”
저 멀리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벌목도를 들고 뛰어오는 승후와
총을 들고 미친 듯 달려오는 상병이 보였다.
“어… 괜찮아.”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보이는 김 병장이었다.
“괜찮아? 형? 어?”
상병이 다가와 김 병장의 몸 이곳저곳을 급히 살피며 물었다.
목에 벌겋게 달아오른 손자국과 피곤해 보이는 듯한 표정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정승후. 이 폐급 새끼 진짜. 어유.”
승후의 방탄을 내리치려는 상병을 말리는 김 병장이었다.
“…야. 야. 괜찮아. 승후 너 이 새끼. 그래도 영 쓰레기는 아니네.
영영 나 버리고 갈 줄 알았더니, 얘 데려온 거 보면 의리는 있네.”
“죄송함다. 죄송함다. 어허어엉. 진짜 살아서 다행임다.”
승후는 흘러내리는 콧물과 눈물을 닦지 않은 채
울먹이면서도 김 병장의 안위만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대도… 너도 살았고. 나도 살았으면 된 거야. 어?”
“이 형은 진짜. 뒤질 뻔해 놓고 속도 좋네.”
“야. 안 뒤져. 아니 절대 못 뒤져. 죽어도 다시 살아날 거다.
우리 은지 행복하게 해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죽어. 절대.
결혼해서 애 낳고 잘 먹고 잘살다 한날한시에 같이 죽을 거야.”
“에에? 갑자기…? 질린다고 차니 마니 하더니?”
“죽기 전에 걔 생각이 확 나더라. 것도 우리 부모님보다 먼저.
은지가 나 살린 거야. 걔 아니었으면 벌써 그냥 정줄 놨지 싶어.”
“지랄도 풍년이다 어유. 로맨티시스트 납셨네. 아주….
형네 부모님들 오시면 내가 이거 다 이를 거야.
세상 제일가는 효자라고 꼭 말씀드릴 거야 내가.”
상병이 짓궂은 표정으로 김 병장에게 쏘아붙였다.
“야. 그러지 마라. 아버지 고혈압이시다.”
“푸하하하하.”
상병과 김 병장이 긴장이 풀린 듯 웃어댔다.
“여하튼 복귀합시다. 김 중사가 형 안 데려오면 때려죽인대.
만약에 형 죽으면 죽은 거 살려서 다시 죽일 거라고
거품 물고 지랄 발광하더라. 미친놈이라니까 진짜.”
“어유… 그래 얼른 가자. 저 시체 새끼들보다 걔가 더 무서워.”
일어나던 김 병장이 휘청거렸다.
“야 승후. 형 업어.”
“예. 알겠슴다!”
그제서야 눈물과 콧물을 닦아 내며 씩씩하게 대답하는 승후였다.
“아이 됐어. 누가 보면 중환자인 줄 알겠다.”
“거 뒤졌다 살아난 양반이 말이 많어. 쯧.
거 복귀하면 PX 가서 냉동이나 한 사바리 깝시다.
내가 살게. 그나저나 아까 그 양반은 누구야? 헌터 같던데?”
업힌 김 병장을 보며 상병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어. 이한성 헌터.”
“이한성??? 엠페러급 헌터?? 내일 오기로 했다던????”
“어 맞는 것 같아.”
“이야… 이거 가문의 영광이네. 만나기도 힘든 양반인데.
형 인생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썰 하나 생겼네.
‘이한성이 구해준 썰 푼다.’ 뭐 이런 거. 그지?”
“그러게 말이다. 하하.”
김 병장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웃었다.
* * *
흠칫.
형우와의 숨바꼭질에 바짝 약이 올라 있던 오우거의 두 고개가
동시에 방어선을 향해 돌아갔다.
[크왁. 저건. 뭐지.]
[너도. 느꼈나. 온다. 뭔가.]
[강하다. 누구지. 인간인가?]
[인간은. 아니다. 아닌가?]
[모르겠다. 뭔지. 아군인가.]
[가보자. 확인. 필요.]
이상함을 느낀 것은 오우거만이 아니었다.
‘뭐지. 이 힘은?’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어두웠고 살기의 농도도 진했다.
그러나 마물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마물 특유의 사기(邪氣)나
마기(魔氣) 혹은 귀기(鬼氣)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힘이었다.
오우거들이 헷갈릴 법도 했다.
쿵. 쿵. 쿵. 쿵.
‘이런…! 아직 성용 씨와 선우 씨의 전투가 끝나지 않았는데…!’
오우거가 몸을 돌려 방어 라인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형우가 다급하게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라이트닝 볼트.”
지팡이에서 피어오른 샛노란 전격의 구(球)가
오우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중급 마법이긴 하나 그 크기가 물탱크만 했기에
품고 있는 마력도 그 파괴력과 살상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방해 마라. 인간. 마법사.]
[하찮은. 공격. 소용. 없다.]
팍.
녀석은 지팡이를 들어 자신에게 날아오는 전격의 구를 쳐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력장에 전격의 구가 파쇄된 것이지만.
‘제기랄… 상성이 좋지 않다’
파직
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스파크와 함께 모습을 감춘 형우였다.
* * *
“우랴아아아아!!”
쾅!
약해진 마물들은 성용의 몸풀기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무차별적인 학살만 남았을 뿐.
성스러운 기운이 인챈트된 성용의 방패에 직격당한 마물들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거나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갔다.
그러나 이런 성용보다도 두각을 드러낸 자가 있었으니,
바로 애림이었다.
“광휘(光輝)의 빛이여!”
후우우우웅.
“크에에에에엑.”
애림을 중심으로 터져 나간 눈부신 빛기둥은
반경 100미터를 모두 휩쌀 만큼 그 범위가 넓었다.
빛기둥을 거치거나 그 영역으로 들어온
좀비와 구울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대며
불에 달군 철판 위의 버터마냥 녹아내렸다.
애림이 사용한 스킬은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상태 이상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성력이 담겨 있는 마법이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언데드 계열 마물들에게는 더 없이
강력한 공격형 마법이 되는 것이었다.
치료가 곧 공격이 되는 셈.
마물들은 애림의 힘이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독이 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이에서 멀어지기 위해
애림에게서 등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비틀
간만에 많은 마력을 소모하느라
기력이 다한 애림이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탁.
“괜찮수?”
어느새 다가온 성용이 그녀를 허리를 받쳐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아. 고마워요. 괜찮아요. 너무 오래 헌터 일을 쉬었나 봐요.
갑자기 마력을 많이 썼더니. 살짝 무리했나 봐요.”
“후후. 너무 무리하지는 마슈. 아직 저 대장 놈 잡아야 하니까.”
성용이 씩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네. 명심할게요.”
쾅!!!
콰가가가강.
성용과 애림이 청춘 드라마를 찍는 동안
그 뒤로 배경처럼 포탄은 쏟아져 내리고 마물들은 찢겨져 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후욱… 후욱… 후욱….”
콰작.
마지막 구울의 대가리를 꺾은 성용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털썩.
지칠 대로 지쳐버렸는지 성용은 마물들의 시체 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숨을 헐떡였다.
그런 성용의 머리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음?”
“그레이트 힐.”
차오르던 숨이 가라앉았고 고통과 뻐근함으로 비명을 지르던
근육의 통증들도 빠르게 사라져 갔다.
“이너 피스(inner peace).”
이어지는 주문에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물들이 뿜어대는 마기와 사기로 인해 정신이 오염되고
광인(狂人)이 되는 것을 막아주는 정화 마법이었다.
뭐, 물론 엠페러급 헌터인 성용이 한낱 하급 마물들의 마기에
쉽게 잠식당할 리는 없었지만.
“오. 고맙수. 한결 낫구만.”
성용이 씩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뭘요.”
쾅!!
“휘유. 요란하군. 천검 쪽인가.”
성용이 소리가 난 지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철컥.
그곳엔 칼집에 검을 꽂으며 뒤돌아서는 선우가 보였고,
선우가 뒤돌아서자마자 한 줌의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지는 5기의 데스나이트가 보였다.
“끝났나 보군. 저기 오는구만.”
씩 웃는 성용이었다.
“어이~! 여길세.”
성용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선우도 희미한 미소를 띠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선우 씨답지 않게 좀 늦었구만. 으잉? 나이가 들었나?
예전만 못해? 으잉?”
성용이 씩 웃으며 농을 걸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후후.”
선우가 빙긋 웃으며 이를 받아주었다.
“다친 데는 없어요?”
애림이 선우를 살피며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네요.”
약간 피곤한 얼굴을 했을 뿐 특별한 상처는 없어 보였다.
“어땠수?”
성용이 물어왔다.
“데스나이트치고는 꽤나 강한 편이었습니다.
개개의 데스나이트들이 대충 언터쳐블 중반은 되어 보이더군요.
반응 속도도 빠르고 완력도 상당한 편이었습니다.
오우거 녀석의 버프 때문이겠지만요.”
“호… 그랬수?
“그것보다도 더 놀랐던 것은 녀석들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음? 움직임이 왜?”
“녀석들은 일반적인 데스나이트들과는 달랐습니다.
데스나이트들은 각자가 독단적이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며
그 공격과 방어가 직선적이고 단조로운 편입니다.
그러나 이 녀석들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적의 움직임에 함께 움직이고 함께 방어했으며
복잡한 행동에도 곧잘 빠르게 반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말이죠.”
“설마.”
애림과 성용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전쟁을 준비한다는 그 말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말을 하는 선우의 표정이 딱히 좋지 않았다.
“빌어먹을… 뻥카이길 빌었건만….”
성용이 중얼거렸다.
“지금은 그것보다 오우거가 남하하는 것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약 녀석이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마물의 군대를 일으킨다면
그 피해는 막대할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서 저지해야 합니다.”
“동감이우.”
“그나저나 형우 씨는요?”
선우가 물었다.
“아 맞네. 형우 씨가 있었지.”
애림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일어났다.
“음…? 오우거 막는다고 가더니 이제까지 별다른 연락 없었는데?
큰 소리도 난 게 없었고. 뭔 일 났나?”
“그럴 리가요.”
셋의 시선이 동시에 전격으로 번쩍거리는 숲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