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 *
집으로 돌아온 한성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한철은
한성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어디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에 한성의 몸을 빠르게 살폈지만
방어구가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딱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일 텐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별일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
제대로 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A급 게이트를 단독으로,
그것도 최단기간 공략이라는 기록을 세운 역사적인 날(?)인데
축하 파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죽상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평소의 한성이라면 능청스레 웃으며 들어왔을 녀석인데
방에 틀어박히는 녀석의 모습이 뭔가 영 이상하다 싶은 한철이었다.
그러나 한성이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말을 아꼈다.
“후우우….”
욕조에 몸을 담근 한성이 전투로 인한 피로를 씻어냈다.
눈을 감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한성의 모습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네크로폴리스라….”
두렵다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네크로폴리스 아니라 더한 것도
소환할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의 휘하에 있었으니까.
다만 성가시고 귀찮았을 뿐이었다.
‘흠… 여러모로 귀찮게 됐군.’
한성이 시선이 닿은 곳에는 강건이 건넨 편지 한 통이 있었다.
대통령 비서실에서 발송한 것이었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겉봉투에 푸른색 밀랍으로 만들어진 봉인에는
청와대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봉투의 안에는 향내 나는 편지지가 들어있었고,
편지지에는 대통령이 직접 만년필을 꾹꾹 눌러서 쓴 듯
공들여 쓴 글자들이 가득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 대통령령을 시행하므로
서울 6대 길드장들은 소환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형식이야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 정중한 태도로 쓰여 있었지만,
거칠게 내용만 살펴보자면 대통령령을 발휘하니 일하라는 것이었다.
신생 길드인 한성의 길드가 언제부터 6대 길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엠페러급 길드장이다 이거냐.
길드장이 되자마자… 개 부리듯 부리는구나… 하….
역시 세상일에 공짜는 없는 것인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대지와
각종 세금 감면 및 혜택이 떠오른 한성이었다.
“쳇….”
게다가 길드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동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국가 존립과 관련하여 이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 시
대통령령을 발휘할 경우, 그 어떤 상황에서건 길드장들은
우선적으로 국가의 명에 응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정부는 이를 고지했고. 한성 또한 이를 확인하고
자발적으로 사인했기에 이제 와서 몰랐다며
발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 귀찮구만….”
* * *
목욕을 마친 한성이 침대에 누워
푹신한 이부자리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확인하지 않은 새로운 기능이 있습니다.]
[동료 육성창이 활성화됩니다.]
[확인하지 않은 새로운 퀘스트가 있습니다.]
잠을 청하려던 한성의 귀에 시스템의 알림이 들려왔다.
‘아. 그랬지.’
‘우선 동료 육성창부터.’
“…이게 뭐야?”
별 기대 없이 연 동료 육성창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아니 대박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했다.
이전의 동료 상태창은 말 그대로 벨루몬들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의 목록과 위력, 체력이나 마력 등을 알려주는 것으로
한성의 상태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진화한 동료 육성창은 상태창의 기능은 기본이고
거기에 다양한 기능들이 몇 가지 더 추가되어 있었다.
첫째로 벨루몬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스탯을 초기화하고
새로 분배할 수 있는 기능이 생겨났다.
분배는 한성의 의지에 따라 수동으로 스탯을 분배하는 것과
마물의 특성에 맞게 분배하는 자동 분배 모두 가능했다.
한성은 녀석들의 스탯을 초기화한 뒤, 자동으로 분배해 보았다.
시스템의 선택은 과연 탁월했다.
녀석들의 특성이 무엇인지, 어떤 포지션을 맡는지 알기라도 하듯
시스템은 효율적이고 적확하게 스탯을 분배했다.
이는 한성이었다면 했었을 선택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벨루몬.”
“하명하소서. 주군.”
왜인지 벨루몬의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달라진 게 있는가? 티에라와 타우한에게도 물어보도록.”
“예. 안 그래도 변화가 있어 주군께 보고하려던 참이었나이다.”
“어떤 식으로 변화했지?”
“우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저희 셋 모두를 훑고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나이다.
게다가 그 힘은…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치 어버이의 손길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나이다.
거부할 수도 없었고 거부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그런 힘이었나이다.”
“그래…? 흠. 그래서?”
‘마물이라 할지라도 창조주의 힘은 거부할 수 없겠지.’
“그 힘이 저희를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 모두에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큰 변화가 있었나이다.”
“이를테면?”
“저와 타우한은 마력의 양이 대폭 증가했나이다.
티에라는 마력이 소폭 증가했고 근력이 증가했다 했나이다.
결과적으로… 전에 비해 조금 더 강해진 기분이 들었나이다.”
“…흠… 일단 알겠다. 쉬고 있도록.”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벨루몬의 말 그대로였다.
타우한과 벨루몬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스탯을 제외하고는,
민첩과 힘에 들어갈 스탯들이 최소한으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스탯은 모조리 지능으로 재분배되어 있었다.
티에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민첩에 치중되어 있던 스탯이 힘과 민첩, 지능으로
골고루 재분배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녀석들의 공격력은 전에 비해 확연히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녀석들의 스탯이 레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이상하다 싶어 스탯창을 바라보던 한성의 눈에 레벨이 보였다.
모두 70이었다.
‘…어?!’
마물을 복속시켜 수하로 삼을 수 있다는 시스템의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이 수하들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었다.
한성의 성장과 더불어 수하들도 성장하게 된다면
이는 더없이 든든하고 큰 전력이 될 테니까.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어째서인지 아무리 사냥을 시켜도
녀석들의 레벨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경험치 바의 경험치도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었다.
녀석들의 레벨은 복속시켰을 당시의
레벨인 62, 60, 61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게임의 NPC처럼 레벨이 고정되어 있는 거구나 싶어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늘 아쉬워했었다.
뭐 레벨이 자신보다 낮다 해도
아그니를 상대로도 효과적일 만큼 녀석들은 강했기에
자신이 더 강해지면 될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 한성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많이
레벨이 오른 것을 보자 당황스러웠다.
동료 육성창의 두 번째 기능이리라.
설명을 읽어보니 귀속된 동료의 레벨은 주인보다 높을 수 없고,
주인의 성장과 함께 동료도 같이 성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주인인 한성의 레벨이 곧 녀석들의 레벨이 된다는 뜻이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녀석들에게 걸려있던 리미트가 해제되었고
동료 육성의 기능이 활성화되어 녀석들의 레벨이 오른 듯했다.
그렇다 보니 늘어난 레벨만큼 녀석들이 스탯은 대폭 상승했고,
이를 바탕으로 재분배되었으니 강해지게 된 것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두 번째 기능이 적용 가능한
대상의 수는 다섯이 한계라는 것이었다.
아마 벨루몬들까지만 허락한다는 뜻이겠지.
어디까지 내다본 거냐. 시스템.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걱정해야 할지… 흠….”
한성이 중얼거렸다.
한성 개인만 해도 국가 전력급에 해당하는 무력을 가진 헌터이다.
이도 모자라 최소 언터쳐블이 넘는 마물을 셋이나 거느리고 있다.
아니지. 같은 레벨이 되어버렸으니 엠페러라고 봐야 하나.
여하튼 거느리고 있는 마물들이 성장까지 한다…?
그것도 한성과 유사하거나 조금 부족한 수준으로…?
만약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과연 사람들은 한성을 어떻게 생각할까.
한성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한성을 경외하거나, 부러워하거나, 든든해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공포나 두려움이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국가조차 한성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할 것이다.
세상이 한성을 새로운 하나의 적으로 규정할지도 모를 일.
히어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대사처럼,
한성을 받아들이기에는 세상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듯했다.
“후… 이건 좀 너무 지나치네요.”
생각을 마친 한성이 천장을 바라보며 신에게 중얼거렸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숨기는 게 좋겠군.’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한성이었다.
“후우우….”
[확인하지 않은 새로운 퀘스트가 있습니다.]
‘자고 생각하자. 후우….’
깜빡이는 알림창을 닫은 한성이 심란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 * *
“훅… 훅… 훅.”
오늘도 어김없이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한성이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강도가 열 배 가까이 늘었다는 것과
장소가 지하 연무장으로 변화했다는 것일 뿐,
여전히 같은 루틴을 반복하고 있는 한성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한바탕 땀을 쏟아낸 한성이 연무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흠~ 흐흠~ 흐흠~”
샤워를 하고 방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던 한성의 귀에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삐비빅.
“네. 박 실장님.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삼 일 뒤에 뵐게요. 네. 들어가세요.”
삼 일.
휴전선으로 가기 전까지 삼 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뭘 하는 게 좋을까.
“퀘스트 창.”
[퀘스트 : 2차 전직]
[퀘스트 내용 : 2차 전직의 직업선택]
[수락하시겠습니까?]
“흠….”
평소라면 숨도 쉬지 않고 상태창이 부서져라 수락을 눌렀을 텐데,
지금에 오니 약간 누르기가 꺼려졌다.
언제나 호기롭게 세계 최강의 자리를 노린다 말은 했지만,
막상 진짜 그렇게 될지도 모를 기회를 마주하게 되니 껄끄러웠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2차 전직이란 말 그 자체 때문이었다.
2차 각성, 재각성, 각성 후 각성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관련 자료를 모두 찾아봤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는 보이지 않았다.
검색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전직, 2차 전직이라는
말도 찾아보았지만 게임 속 이야기와 관련된 기사나 글뿐이었다.
물론 한성이 가진 정보력이라고 해봐야
인터넷 검색이라는 빈약한 수준에 불과했다.
국가 기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박 실장에게 알아봐달라고 연락해 봤지만,
돌아온 박 실장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이런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고 국방부와
협회 데이터베이스에도 있지도 않다 했다.
그렇기에 부담스러웠다.
세계 유일한 2차 각성자란 타이틀이.
만약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한국의 언론은 물론,
세계의 언론에 한성의 이야기가 대서특필되어 알려지게 될 것이다.
이조차도 충분히 부담스러운 일인데….
그뿐이랴.
험프와 같이 한성을 자신의 길드 혹은 국가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들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은 불 보듯 자명했다.
특히나 인재에 목말라 있는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의
헌터 강국들이 한성을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자기네 헌터들을 끌고 와
한성을 위협해서라도 데려갈지도 모를 일이고.
둘째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이지만,
시스템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기에 자신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특혜를 주고
이리도 강하게 만들었을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영화의 한 대사처럼,
자신에게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책임감이 한성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한성은 강해지는 과정이 즐거우면서도 항상 불안했다.
헌터가 되어 특혜를 받은 그 시점부터
한성은 불가의 연기설을 자주 생각하곤 했다.
세상 만물은 이것이 생(生)하면 저것이 생(生)하고
이것이 멸(滅)하면 저것이 멸(滅)한다는 말이 그것이었다.
자신이 이런 강대한 힘을 얻게 된 것은
이미 일어난 절대 악을 저지하기 위함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이런 힘을 얻게 되었기에
절대 악이 깨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 어느 쪽이든 결코 좋지 않았다.
그러나 힘을 얻게 된 이유가 전자라면….
한성은 누구보다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힘을 키워야 했다.
“후우우…. 수락.”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