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100화 (100/336)

100화

* * *

한성이 손을 들어 올리자 이백 가까이 되는 나이프가 소환되어

한성의 뒤를 성난 벌 떼마냥 날아다녔다.

전에 비해 살기는 더욱 드세져 있었고

검신은 더욱 날카로워졌으며 기세는 더욱 흉흉해져 있었다.

그리고는 금세 보랏빛 예기가 검신에 날카롭게 피어올랐고

검은 그림자가 이에 어려 일렁이기 시작했다.

만족한 듯 한성이 옅게 미소 지었다.

딱.

한성이 손가락을 튕기자 나이프들은 전 방위로 쏘아져 나가

마물들의 목을 노렸다.

“키엑…?”

이게 뭐냐 싶어 날아오는 한성의 나이프를 보던 녀석들이

나이프에 실린 기운을 알아봤는지 급히 뒤돌아 도망하려 했지만,

나이프는 녀석들을 지났고 격전의 어금니라는 씨앗을 심은 뒤였다.

푸확.

“끼에에에에에엑!”

“크아아아아아악.”

콰직 콰직… 콰지직.

전장에는 고통스러워하는 마물들의 비명 소리와

격전의 어금니가 마물들을 씹어 삼키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상대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벨루몬들에게 바득바득 달려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반격하려는 의지는커녕 살아서 도망가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도망하는 녀석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성은 그 어느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물들은 반격도, 도망도 못 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는 주군이 인간이 맞긴 한가 싶소.

주군이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주군이 마물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하오.”

힘들지는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통에

상당히 성가셨던 마물들이 한성의 손짓 한 번에

겁먹고 도망치는 모습이나, 순식간에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타우한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후후. 그런가.”

한성이 담담하게 답했다.

“주군께서는 분명 그 누구도 자리를 넘볼 수 없는

지고(至高)의 왕이 되어 만물을 다스리실 것이옵니다.”

벨루몬 또한 이런 한성의 무위에

진심으로 기쁜 듯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자.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겠다.”

“예. 주군.”

* * *

“이한성 헌터가 투입된 지 얼마나 됐습니까.”

박 실장이었다.

“4시간 32분 17초째입니다.”

군기 잡힌 주빈의 대답이 이어졌다.

“흠….”

심각하게 게이트를 바라보는

박 실장의 뒤에는 꽤나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협회에서 가장 뛰어난 치유력을 가진 협회장 전담 A급 힐러부터

다양한 무기로 무장한 마물전담 특무부의 헌터들이 그것이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한성의 부상이나 아그니의 탈출 등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한 듯한 모양새였다.

저마다 다른 이유였지만 모두들 긴장된 모습은 같았다.

한성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혹시나 뛰쳐나올지 모르는 아그니를 막아야 한다는 두려움,

다쳤을지 모를 한성을 치료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으리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게… 게이트 열립니다!!!”

“전원 전투준비!!!!!!!!!!”

박 실장이 날카롭게 고함쳤다.

특무부의 헌터들은 저마다 각자의 무기를 꺼내 게이트를 겨냥했고,

힐러는 미리 대단위 힐을 캐스팅해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했다.

비장함이 어렸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주위가 고요했고

숨 하나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의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한성이 나온다면 다행이겠지만, 나온 것이 아그니라면….

쉭.

“음…?”

게이트를 빠져나온 것은 걸레같이 너덜너덜해진

방어구를 입은 한성이었다.

방어구의 상태만 두고 봤을 때 분명 게이트 속 전투는

생사가 오갈 정도로 거칠고 위험했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찢어지기 일보 직전의 방어구와 달리

한성은 상처하나 입지 않은 채 너무나 깨끗한 모습이었고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분명 짧던 머리칼이 허리춤까지 자라난 것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변화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크기는 변화가 컸다.

이젠 한성에게서 마력이 느껴지지조차 않았다.

마치 잠잠한 바다를 앞둔 것마냥 한성이 품은 거대한 마력에

순간 말을 잃어버린 박 실장이었다.

그 뒤로 한성의 동료 마물들이 걸어 나왔다.

“아군이다. 공격 중지! 중지!!”

박 실장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온몸으로 특무부의 앞을 막아섰다.

위험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벨루몬이나

키와 덩치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타우한,

키만 한 총을 등에 메고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는 티에라까지.

특무부대가 이들을 마물로 착각하고

충분히 오인사격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도 실수는 없었다.

“휴우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박 실장이었다.

“박 실장님. 여기는 무슨 일로…?”

얼떨떨한 표정의 한성이 많은 인파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박 실장을 보며 물었다.

“…허허….”

누구 때문에 지금 이 사달이 났는데.

저런 태평한 얼굴이라니….

어이없음도 잠시, 게이트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게… 게이트 공략 성공하신 겁니까?”

박 실장이 떨리는 목소리 물었다.

한성은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21시 53분 15초, A급 게이트를 공략하셨습니다.

최단기간 공략이며, 홀로 공략하신 유일한 공략입니다.

이는 협회에 기록됩니다. 추… 축하드립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주빈의 말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갈채가

사람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아그니와 같은 고위 마물과 싸우지 않아도 되어

목숨을 부지했다는 안도감.

아무런 상처 하나 없이 고되고 힘든 싸움을 홀로 이겨낸

한성에 대한 경외와 존경심.

한성의 뒤를 따르는 마물들의 강대한 힘에 대한 경계와 공포.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찬사 속에 담뿍 담겨져 있었다.

특무부대와 힐러, 주빈을 협회로 돌려보내고

주변을 정리한 박 실장이 한성에게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너희는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도록.”

“예. 주군.”

가벼운 목례와 함께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벨루몬들이 사라졌다.

“…언제 봐도 신기한 능력입니다.”

“후후. 그렇죠? 저도 그렇습니다.”

“흠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우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너무나 큰일을 해주셨구요.”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하실 말씀이라는 게…?”

“아 네. 우선 죄송합니다.”

“네?”

“이한성 헌터께 휴식을 취할 것을 권하지 않은 점.

혼자서 공략하시도록 내버려 두어 위험에 처하게 한 점에 대해

협회를 대신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협회장님께서도 이에 대해 굉장히 많이 화를 내셨습니다.

부디 화를 푸시고 용서해주십시오.”

박 실장이 사과와 함께 한성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이러지 마세요. 박 실장님.”

황급히 박 실장에 다가간 한성이 박 실장을 일으켜 세웠다.

“아닙니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저를 벌하시고 협회는 용서해주십시오.”

“아뇨. 아뇨. 이건 제가 원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B급 게이트 두 개로는 몸풀기 수준도 되지 않아서

딱히 휴식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멀쩡했어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혼자 공략했다고 하시는데

제게는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동료가 있습니다.

그러니 혼자도 아닌 셈이구요.

박 실장님께서 그렇게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게다가 이번 게이트 공략으로 많은 소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과는 그만 하세요. 불편해 죽겠습니다. 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제야 숙였던 고개를 드는 박 실장이었다.

“휴… 앞으로 이러지 마세요. 불편하기 짝이 없네요. 정말….”

“그것도 죄송합니다.”

“아이고, 됐습니다.”

“후후….”

“제가 이럴 거라는 거 예상하고 계셨죠?”

한성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네. 예상은 했습니다만.

그러나 제 말은 빈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알아요. 압니다. 어휴… 그러니 이 이야기는 끝내기로 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협회장께서 이한성 헌터를 급히 찾으십니다.”

“무슨 일로…?”

“자세한 사항은 협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음…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네. 차량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들어 차를 부르려는 박 실장이었다.

한성은 박 실장의 어깨를 감싸고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 * *

한편 강건의 집무실.

“하아. 어째 이리 늦는 게야.”

강건의 표정이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하고 불안해 표정을 지으며 집무실을 왔다 갔다 거리고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듯 5초마다 휴대폰을 확인했고

발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가만히 있질 못했다.

모든 안면 근육을 사용하는지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 어려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집무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아… 이 늙은이의 속을 어찌 이리 태우는 것인지….

연락 준다던 박 실장은 뭐 하고 있단 말인가.

내가 재깍재깍 연락하라고 분명히 몇 번을 일렀거늘.

오면 온다. 아니면 아니다 말을 해줘야지. 후우….

일 분이 일 년 같구먼.”

초조한 듯 중얼거리는 강건이었다.

“음?”

이제나저제나 한성이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강건의 기감에

익숙한 기운이 포착되었다.

슥.

소파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서 한성과 박 실장이 솟아올랐다.

담담한 표정의 한성과 달리 박 실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를 본 강건의 얼굴에는 초조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고

얼굴 가득 함박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오오… 한성 군!! 왔는가!? 몸은 괜찮은가? 응?

어디 다친 데는 없고? 피곤할 텐데 쉬다 오지 그랬나.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말하게. 전담 힐러를 불러 줄 테니.”

그는 말과 함께 한성의 몸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피며

다친 곳이 있는지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게이트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 꼴은 좀 더럽긴 하지만요.”

애타게 기다리던 손주라도 본 듯 강건의 진심 어린 걱정과 관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한성이었다.

“그거라면 괜찮네. 후후. 다친 데도 없다니 다행이고 말이야.

혼자서 아그니를 잡으러 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응? 가슴이 철렁했네.

아무리 자네가 강하다고 해도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말게나.

한다고 해도 응? 말은 하고 가게. 그래야 내가 준비를 해주든지

사람을 붙여주든지 할 거 아닌가. 응?”

마치 자식을 꾸짖는 아버지 마냥 엄격한 표정을 짓는 강건이었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후후.”

“그래그래. 후후후. 그나저나 자네… 정말 강해졌구먼.

이제는 수준을 못 알아 볼 정도야.

후학(後學)을 양성해야 할 위치인 내가

오히려 자네한테 가르침을 받아야겠어.”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강건이 놀랍다는 눈으로 한성을 이리저리 훑어댔다.

“저번에는 농담으로 한 소리네만….

지금 보니 조만간… 진짜 지구 정복도 가능할 것 같구먼 그래.

대단하군… 대단해. 허허허….”

“별말씀을요. 하하. 그나저나 급히 절 찾으셨다고…?”

“아 그래. 그게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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