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 * *
[경고 : ‘아그니’의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경고 : 두 번째 페이즈 ‘아그니의 분노’가 시작됩니다.]
[경고 : ‘아그니’의 위협이 감지되었습니다.]
[업적 :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가 발동, 위협이 사라집니다.]
[경고 : 전투 수행 능력이 부족합니다.]
[경고 : 전장에서 이탈할 것을 권장합니다.]
한성은 계속해서 울려대는 시스템의 경고와
알림창들을 모조리 꺼두고 아그니를 바라보았다.
시스템이 알려주지 않아도 한성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네놈은 내 반드시 죽이겠다.”
아그니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아그니의 손짓에 화염구들이 용암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끓어 넘치던 용암이 줄어드는 만큼, 화염구들의 숫자는 늘어 갔다.
이전의 밝은 주황색의 화염구들과는 달리 솟아오른 화염구들은
짙고 어두운색을 띠고 있었고, 품은 기운도 꽤나 위험해 보였다.
격전의 그림자가 가진 어두운 기운을 꽤나 닮아 있었다.
“쉽게 죽어줄 순 없지.”
딱.
한성이 손가락을 튕기자 예의 그림자들로 이루어진 나이프의 떼가
한성의 등 뒤를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그게 끝이 아니었나. 정녕 인간이 맞긴 한가 싶군….”
아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치명적 일격.’
‘격전의 어금니.’
푸화아아악.
나이프의 검신에 보랏빛 예기가 날카롭게 어리고
검은 아지랑이가 거칠게 피어올랐다.
“가라.”
아그니의 중얼거림에 칠, 팔십에 가까운 화염구가
유성우마냥 한성에게로 빠르게 쏟아져 내렸다.
휙
이를 지켜보던 한성도 다가오는 화염구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고
이에 백에 달하는 나이프가 빠른 속도로 녀석의 화염구를 향해
솟구쳐 올라 나아갔다.
쾅!!!!!!!
나이프가 쏘아짐과 동시에 한성도 아그니를 향해 뛰쳐나갔다.
한성의 도약을 견뎌내지 못한 지반은 부서져 내렸고,
순식간에 한성의 신형은 사라졌다.
퍼퍼퍼퍼퍼펑!!!
한성의 나이프가 아그니의 화염구와 맞부딪치자,
공중에는 한 차례 격렬한 불꽃놀이가 일었다.
둘의 충돌로 인한 마력의 파괴는 전보다 화려했다.
검고 붉고 빨간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았고
터진 불꽃들은 불똥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펑!!!!!
치명적 일격과 격전의 어금니까지 두른 나이프였음에도
녀석의 화염구는 쉽사리 베이지 않았다.
베이기는커녕 화염구와의 충돌로 힘을 잃고 사라져갔다.
그나마 자멸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 듯했다.
화염구가 내보인 어두운 기운이
한성의 나이프를 집어삼키려 했으나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격전의 그림자가 되려 화염구에 달라붙어
검게 타오르던 불꽃을 집어삼켜 버렸으니까.
격전의 그림자가 가진 탐식의 힘은 한성의 생각보다 강한 듯했다.
아그니도 이를 알아챈 듯 화염구를 신중하게 움직였고
최대한 한성의 나이프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조종했다.
한성의 나이프에 비해 자신의 화염구는 그 수가 적었으니까.
화력이 비슷하다면 물량으로 승부를 보자는 생각에
한성은 계속해서 그림자 병기를 사용해 나이프를 소환했고
녀석에게로 마구잡이로 날려댔다.
아그니 또한 대응하려 계속해서 화염 덩어리들을 소환해냈지만
속도와 물량 면에서 이미 한성을 이겨낼 순 없었다.
만들어둔 나이프에 새로 나이프를 소환해내는 터라
아그니가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화염구를 상대하는 나이프를 제외하고
나머지 나이프들은 곧장 아그니에게로 달려들었다.
카가가가강!!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나이프를 막아낸 것은 아그니의 왼 날개였다.
마냥 푹신해 보이는 날개들은 단순히 멋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던 듯
나이프 세례를 막아낼 만큼 단단하고 또 견고했다.
폭우처럼 내리치는 나이프의 비에 녀석은
몸이 몇 센치 뒤로 밀려났을 뿐, 큰 충격은 없어 보였다.
고통스럽기는 한지 녀석의 표정은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격전의 어금니가 가진 포식의 힘은
아그니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듯했다.
티에라와 벨루몬의 공격에는 응수하기는커녕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그냥 몸으로 막을 뿐이었지만
날개에 옮겨붙으려는 격전의 어금니에는
기겁을 하며 이를 털어내려 했으니까.
물론 쉽게 털어지지는 않았다.
격전의 어금니는 이리저리 털고 쳐내는 아그니의 갖은 노력에도
그저 끈질기게 달라붙어 아그니를 씹어댔고 뜯어댔다.
여유롭던 녀석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녀석은 한성의 움직임에 모든 감각을 동원해 경계하면서도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격전의 어금니를 털어내느라 정신없었고
티에라와 벨루몬의 공격을 막아내야만 했다.
녀석의 표정에는 짜증과 다급함이 잔뜩 어려 있었다.
“정신없지?”
날개로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날개 아래로 파고든 한성이
튀어 오르며 아그니의 목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어줍잖은 짓을.”
캉!!!!
아그니가 반대쪽 날개로 단검을 쳐내며 뛰어올랐다.
“쳇.”
간발의 차이로 아그니를 놓친 한성이 혀를 찼다.
탕.
쾅!
카가가가가가가가각!!!!
“…큭.”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티에라의 총이 불을 뿜었다
녀석이 네 장의 날개를 포개어 티에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티에라의 탄환 역시
녀석의 날개를 뚫어내기엔 힘이 부족한 듯 보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나이프의 공세와 티에라의 날카로운 저격,
벨루몬의 마력은 아그니는 꽤나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이런 쥐새끼가.”
철컥.
티에라는 아그니의 위협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묵묵히 노리쇠를 장전하며 녀석의 머리를 조준할 뿐이었다.
탕!
쾅!!!
“…크윽.”
연이은 충격에 날개들은 너덜너덜해졌고
네 장의 날개 중 하나는 이미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속박의 손아귀.”
벨루몬이 조용히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전보다 강해진 기운의 보랏빛 손아귀가 아그니에게로 향했다.
“같은 수에 또 당할 성싶으냐!!!”
쾅!!
아그니가 손을 휘젓자 검게 타오르는 화염이
나이프와 벨루몬의 손아귀에 흩뿌려져 폭발을 일으켰다.
“크윽… 같지는 않을 것이다.”
속박의 손아귀가 아그니의 화염에 스러져 내리자
고통스러운 듯 표정을 찡그린 벨루몬이 중얼거렸다.
“뭐?”
훅.
처박혀 있던 데스나이트 2기가 도약해
화염을 가르고 공중에 떠 있는 아그니를 찍어 내렸다.
쾅!!
“이건 생각 못 했군.”
급히 날개를 둘러 내리치는 두 개의 대검을 막아 냈으나,
엠페러급에 가까운 두 데스나이트의 완력을
완벽히 흘려보내기는 무린 듯싶었다.
추락하는 녀석을 향해 벨루몬이
스태프를 들어 올리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중력 증가.”
떨어져 내리는 아그니를 무형의 기운이 짓눌렀고
녀석은 결국 분화구의 바닥에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쾅!!
볼품없이 바닥에 처박힌 아그니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내게 이런 굴욕을…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씹어 먹어주마.”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진 아그니가 기운을 일으켜
중력장을 이겨내고 한 발 한 발 벨루몬에게로 다가갔다.
이에 벨루몬은 오만한 표정으로 담담히 중얼거렸다.
“중력 증가.”
“중력 증가.”
“중력 증가.”
“중력 증가.”
콰직, 콰직, 콰직, 콰지직… 쾅!
“크아아아악!!!!”
중첩되어 짓누르는 힘에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제 자리에 우뚝 서 몇 번은 버티던 녀석이
이내 무릎을 꿇었고 쓰러져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누가 누굴 씹어 먹는다고?”
벨루몬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아그니에 물었다.
분화구의 지반은 짓누르는 중력의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조금씩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쾅!
쾅!
이윽고 지반이 부서져 내리자 용암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고
용암 속으로 녀석이 잠겨 들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익.
녀석의 몸이 잠기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녀석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금세 살벌한 기운의 검은 불꽃이 녀석의 몸을 감쌌고
용암과 중력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벨루몬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벨루몬 또한 녀석의 강대한 마력에 부담이 되는지
파들거리는 손으로 스태프를 쥐고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중력 증가.”
“크아아아아아악!”
쾅!
녀석을 감싼 검은 화염도 시간이 갈수록 흐려져 갔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듣기 싫을 정도의 처참하고 비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녀석의 몸이 완전히 잠겼다.
비명 소리와 미친 듯 뿜어대던 사기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이라 불리던 자도 별거 없군.”
벨루몬이 중력장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철컥.
티에라도 느껴지는 기운이 없는 듯 총을 거두어들였다.
“다들 다친 데는 없소?”
타우한이 토템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난 괜찮다.”
“저도요. 타우한 덕분에 조금도 다치지 않았네요.”
“그거 다행이군. 주군은 좀 어떻소?”
“….”
“주군…?”
한성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타우한이 한성을 조심스레 불렀다.
“온다.”
한성이 중얼거렸다.
“…?”
흠칫.
타우한과 벨루몬의 시선이 아그니가 잠긴 용암으로 향했다.
“전력으로 대비해.”
“절대 방어.”
“절대 방어.”
“절대 방어.”
“방호의 술.”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던지 벨루몬과 타우한이
전력을 다해 저마다의 방어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자신들의 앞은 물론 한성의 앞에까지 방호들이 겹겹이 쳐졌다.
티에라도 몸을 피해 분화구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분화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쿠구구구궁.
아니나 다를까. 분화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잠하던 용암은 부글거리며 끓어 넘쳤고
지반은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크게 흔들려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경고 : 최종 페이즈 ‘멸(滅)’이 시작됩니다.]
[경고 : 전투 수행 능력이 부족합니다.]
[경고 : 전장에서 이탈할 것을 권장합니다.]
“시스템이 두 번이나 경고를 할 정도란 말인가. 흠….
녀석이 강한 건지… 내가 약한 건지… 뭐가 됐든 아직도 멀었군.”
한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쾅!!!
큰 소리와 함께 용암이 10미터 가까이의 높이로 솟구쳐 올랐다.
솟구쳐 오른 용암은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기라도 하듯
네 방위로 화염을 뱉어냈고 이는 정확히 타우한의 토템을 가격했다.
“…이런.”
타우한이 낭패라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토템은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터져 사라졌고
이에 파사의 진은 크게 일렁이기를 반복하다
이를 버텨내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왔나.”
용암이 씻겨 내려가자 그곳에는
불타오르는 용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화룡.]
녀석 역시 피 같은 붉은 색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화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녀석은 온몸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털이나 가죽, 비늘은 보이지 않았고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순수한 화염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뼈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씹어 삼켜주마.”
화룡의 머리 위에서 아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녀석의 눈이 불타올랐다.
하의에서 잔잔하게 타오르던 불길은 갑옷이라도 된 양 몸
전체를 감쌌고 세상 모든 것을 불태울 듯 거칠게 타올랐다.
“절대 너희를 편히 눈 감게 하지 않겠다. 살점을 저미고 뼈를 깎….”
“말이 많군. 와라. 아그니.”
한성이 아그니의 말을 잘랐다.
“…죽여 달라고 비는구나.”
아그니의 눈이 날카로이 빛났다.
“주절거리는 건 이기고 나서 해라.”
한성에게서 폭발적으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