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 * *
짝짝짝.
“대단하구만. 대단해.”
뼈와 뼈가 부딪쳐 내는 달그락 소리와 함께
벨루몬의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벨루몬이 티에라의 사냥을 바라보며 박수 쳤다.
“이게 마지막인가?”
“네.”
“생각보다 적응이 빠르군. 난생처음 보는 무기일 텐데 말이야.”
“그런가요. 아직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만.”
반지에 총기와 사체, 마력석을 수납한 티에라가 담담히 답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전혀 부족한 것 같진 않군.
주군께 누가 될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무기에 대한 이해와 숙달이 이리도 빠르다니.
주군께서 선택한 자답군. 대단해. 정말.”
진심인 듯 벨루몬의 말에는 감탄이 어려 있었다.
“빈말이라도 듣기 좋네요.”
쑥스러운 듯 반지를 매만지는 티에라였다.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을 뿐 빈말은 아니다.
이 몸이 네게 빈말할 이유도 없고.”
“고맙습니다.”
“새로운 무기에 적응하라고 일부러 주군께서
너의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녀석들을 상대하라 하신 것 같군.
혹시나 다칠까 타우한까지 붙여 주시고 말이야.”
“참으로 자상한 분이세요. 주군은.”
“…내겐 한없이 엄하신데 말이지.”
왜인지 샐쭉한 표정의 벨루몬이었다.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뜻이겠지요.”
티에라가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그런가. 후후.”
티에라의 말이 썩 듣기 싫지 않았던 듯
웃음 비슷한 표정을 짓는 벨루몬이었다.
“타우한 너도 마찬가지다. 방호의 술이 언제 이만큼 강해진 거냐.
나조차도 쉽게 뚫어낼 수 없을 것 같구나.
느껴지는 다른 토템의 기운들도 한층 강해진 것 같고.”
“무후후. 주군께 혼나고 혼자 고심해서 다시 만들어 봤소.
그러는 군사야말로 혼자서 그 많은 마물들을 해치우다니
역시 대단하구려.”
타우한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이 정도야 숨 쉬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일이지.”
“…군사, 숨을 쉴 수는 있소…?”
타우한이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농을 던졌다.
“시끄럽다. 여하튼… 너희들까지 있었다면
그 시간이 몇 곱절은 빨리 단축됐을 것이다.”
“무후후. 웬일이오. 칭찬을 다 하고.”
“사실은 사실이니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벨루몬들을 바라보며
김현철과 박 실장은 약간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저 셋을 잡으려면 어느 정도의 헌터가 붙어야 될까요?”
셋을 한참 바라보던 김현철이 박 실장에게 물었다.
“글쎄요. 모르긴 해도, 언터쳐블급 공격대 한 팀은 기본일 거고
엠페러급도 최소 1명은 필요하겠죠. 1명으로 될 수 있을지도 잘….”
박 실장이 담담히 답했다.
꿀꺽.
현철이 침을 삼키고 긴장된 표정으로 다시 박 실장에게 물었다.
“…그런 마물들을 수하로 삼은 이한성 헌터를 잡아야 된다면요?”
“…잘은 모르겠지만.”
한참을 망설이던 박 실장이 찡그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수하까지 전력으로 친다면… 모르긴 몰라도….
한국의 길드장 전원이 필요할 겁니다.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고요.
뭐라 확신하기 어렵군요.”
“그렇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현철이었다.
“…네.”
삐비빅.
김현철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 어떻게 됐어. 어. B급 게이트 완료했다고?
두 개 다…? 괴물이 따로 없군… 그래 수고했다.
우리 쪽도 끝났어. 그래. 협회 가서 보… 뭐?
바로 A급 게이트 공략하러 간다 했다고? 벌써 들어갔다고???
쉬지도 않고? 그냥? 바로? 일단 알겠어. 특이사항 있으면 보고해.
아니, 변화가 없다고 해도 5분 단위로 계속해서 보고해.”
삑.
“…우리도 간다.”
벨루몬의 안광이 타올랐다.
* * *
“후우… 뜨겁군.”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자 불어오는 열풍에 얼굴이 화끈했다.
치지직.
“아뜨뜨.”
바람에 실려 날아온 불티에 머리카락이 그을렸고
이에 놀란 한성이 급히 불티를 털어냈다.
소란도 잠시, 눈을 들어 바라본 게이트 속 세상은 용암 지대였다.
하늘에서 화산재가 눈처럼 내리고 붉은 용암들이 시내처럼 흐르는.
화산재가 하늘을 가린 탓인지 주변은 밤처럼 어두컴컴했고
불타오르는 용암들로 인해 붉은빛만이 가득했다.
바위와 돌들은 화산 지대답게 검고 어두운색을 띠고 있었다.
화산에서는 이따금씩 용암이 출렁이며 튀어 올랐고
끊임없이 검은 연기가 화산재와 함께 솟아오르고 있었다.
화산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맹렬히 끓어올랐고
화산으로부터 분출된 용암은 조금씩 흘러내려
골짜기 사이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협회 요원의 보고대로 살아 숨 쉬는 생명은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성의 기감에도 느껴지는 것은 거대한 에너지 하나뿐이었다.
아그니의 것이리라.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고
화산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들조차도 열기 때문인지
바짝 말라 죽어 있었다.
[염제(炎帝) 아그니의 지배구역에 들어섰습니다.]
‘염제… 염제라… 혹시…?’
한성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 한 가지 생각.
한성은 상태창을 열어 급하게 업적을 확인했다.
한서불침의 설명에 적힌 1/2이 눈에 들어왔다.
냉기인 ‘한’을 해결했으니 남은 것은 열기인 ‘서’.
우연의 일치인 것인지 시스템의 안배(按排)인지….
녀석에게서 왠지 한서불침의 나머지 단서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 발생.]
[퀘스트 : 타락한 신 아그니를 정화.]
[퀘스트 내용 : 아그니 제거.]
[퀘스트 보상 : 경험치 + a.]
[수락하시겠습니까?]
‘확인.’
‘타락…이라. 위험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군그래.’
녀석의 기운이 느껴지는 분화구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분화구 한가운데 솟아오른 평평한 바위 위에 등을 돌리고
반쯤 몸을 뉜 인간의 형상이 보였다.
[스스로를 봉인한 염제 아그니.]
피처럼 붉은색의 이름이 녀석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봉인?’
솟구치는 용암이 무섭지도 않은 지
편하게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인간형 마물이라 해도 게임에서나 볼 법한
엘프나 오크, 트롤 등의 모습들만 봐왔기에
정말 인간과 닮은 모습을 한 녀석이 신기한 한성이었다.
2m는 기본이고 10m가 넘는 마물들만 봐오다가
기껏해야(?) 180cm 정도 되는 녀석을 보니 오히려 어색했다.
상의는 입지 않은 듯 맨살이 드러나 있었고,
하의는 화염자체를 입기라도 한 듯 불이 세차게 일렁이고 있었다.
녀석의 아래에는 펄펄 끓는 용암이 한가득한데도 불구하고
발에는 그 흔한 천 조각 하나 대어있지 않았다.
새하얀 피부와 타오르듯 붉은 머리칼
우락부락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온몸에 가득한 근육까지.
전신(傳神)이라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거리는 꽤나 멀었지만 마음먹으면 금방 도달할 거리에
한성이 와 있음에도 녀석은 경계는커녕 작은 움직임조차 없었다.
‘타락했다 해도 명색이 신인데, 수하나 사역마 하나 없단 말인가.’
이리저리 살피는 한성의 귀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러가라.”
굵고 두꺼운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귀찮음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마치 맹수가 그르렁거리는 느낌이랄까.
녀석은 조금 몸을 뒤척였을 뿐 여전히 한성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강하다.’
한성의 심장이 기대와 흥분으로 두근대기 시작했다.
“내게도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그건 좀 힘들 것 같군.”
“…말이 통하는 녀석이었나. 그건 좀 재밌군.”
그제야 녀석은 등을 돌려 한성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적발에 머리에 솟아오른 큼직한 두 뿔,
흰자위 하나 없이 새까만 눈까지….
‘타락한 신이 아니라. 그냥 악마 그 자체군.’
녀석이 몸을 완전히 일으키자 용암 속에서 뭔가 솟구쳐 올랐다.
타오르는 5개의 화염구가 그것이었다.
녀석들은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체 마냥
그의 곁을 날아다니며 볼과 머리에 자신의 몸을 부비적거렸다.
“…인간이었나.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군.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인간인지 모르겠어. 반갑기까지 해. 후후.
뭐 삼 일 뒤에 포탈 너머 너희의 세상에 갈 생각이긴 했지만.”
아그니가 한성의 몸을 이모저모 살피며 중얼거렸다.
“품은 기운도 꽤나 대단하군… 애초에 인간이 맞긴 한가?
요새 인간들은 다 너처럼 강한가? 대단한 발전이야.”
‘요새 인간이라… 허풍 같지는 않고….
마물과 인간이 공존하던 때부터 존재하던 녀석인가.’
세계수와의 대화를 떠올린 한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 무슨 일인가. 필멸자여.
이 몸의 단잠을 방해할만한 충분한 이유여야 할 것이다.
별 시답잖은 이유라면 죽음을 앞당기게 될 테니까.
뭐… 언제 죽든 죽는다는 선택지밖에 없긴 하지만. 하하.”
화염구를 토닥이는 그의 표정은 권태감과 지루함에 찌들어 있었고
목소리에는 한성마저 나른하게 만들 정도로 차분했다.
“널 죽이러 왔다. 타락한 염제 아그니.”
한성이 대답했다.
아그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비록 타락했다고는 하나 인간들에게 신이라 칭송받던 몸.
한낱 인간 따위의 손에 죽을 순 없지.”
녀석이 뿜어대는 살기에 피부가 저릿했다.
“한낱 인간이라… 그렇게 멸시하던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재밌지 않아?”
“같잖군.”
아그니가 손을 들어 올렸다.
[첫 번째 페이즈에 돌입합니다.]
‘첫 번째… 페이즈…?’
시스템의 알림에 놀란 한성이었다.
페이즈는 과정, 단계라는 뜻으로
게임에서는 보스 몬스터와의 대결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힘을 감춘 보스 몬스터가 자신의 체력이 어느 정도 소모되면
숨긴 힘을 개방해 싸우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형태였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한성에게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아그니가 공격해왔다.
불덩어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한성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딱.
한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맞춰 소환된 한성의 나이프들이 불덩어리에게 쏘아져 나갔다.
쾅!
한 차례 폭발이 일고 폭발로 화산재가 분진처럼 피어올랐다.
‘음?’
나이프가 아그니의 불덩어리를 쉽게 베어내거나 터뜨릴 것이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아그니의 화염구와 맞부딪친 나이프는 형체를 잃고 사라져 갔다.
물론 아그니의 불덩어리 또한 성한 모습은 아니었다.
위풍당당 타오르던 기세가 줄고
크기가 줄어들어 약해진 모습이었으니까.
아그니의 곁으로 힘없이 날아간 불덩어리들은
아그니의 손짓 한 번에 본모습을 찾았고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듯 다시 한번 아그니에게 부비적거렸다.
S급에 달하는 힘을 가졌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엠페러급인 한성의 힘을 받아내고도
녀석은 힘들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등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불덩어리 하나하나가 지닌 마력이 적은 것이 아닌데
이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수복할 정도라니….
녀석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진 한성이었다.
“호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야.”
한성을 바라보는 아그니의 표정은
마치 흥미로운 장난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인정하지. 아그니. 잡신은 아닌 것 같군.”
긴장과 흥분으로 손이 축축해진 한성이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간만이군. 이 쾌감.’
강자를 만났다는 생각은 한성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쾌감을 불어 넣었고, 엔돌핀이 솟구치게 했다.
“나의 이름을 알고도 덤비다니 보통 정신 나간 녀석이 아니구나.
와라. 적당히 손을 봐줄 테니.”
녀석이 손을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