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 * *
“무슨 일입니까?!”
주민의 대피를 모두 끝낸 듯
티에라와 파수꾼들이 한성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들의 기감에도 역시 뭔가가 포착된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여왕개미가 군체(群體)를 호출했다.
근방에 있는 모든 개미들이 다 여기로 향하는 모양이야.”
단검에 묻은 액체를 털어내며 한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수가.”
이디아와 파수꾼들의 표정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준비해라. 타우한. 벨루몬.”
“예. 주군.”
“…?”
어마어마한 수의 앤트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도망하거나,
피하기는커녕 태연히 전투를 준비하는 한성의 모습에
티에라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뭐 하세요?”
“최고장로가 내게 널 부탁한다 했다. 그 바람은 이루어줘야지.”
당연하다는 말투의 한성이었다.
“하지만 당신과 아무 연고도 없는 우리 일족에 어째서 이렇게까지….”
“내 가족이 될 녀석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면
나도 소중히 여겨야 되지 않겠나. 이는 당연한 일이다.”
한성이 씩 웃으며 답했다.
“가족….”
“그런 분이오, 주군은. 무후후. 그러려니 하시오.”
타우한이 웃으며 티에라에게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명령을 하달한다. 티에라와 파수꾼들은 마을을 수호하라.
그러나 녀석들의 행동 양상이 이전과 다름을 잊지 말도록.
놈들은 여왕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녀석들의 반응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힘들다 싶으면 후퇴하도록. 미련하게 목숨 걸지 말고. 알았나.”
“예.”
“가라.”
탓.
한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녀석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성의 지휘에도 티에라들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커녕
오히려 한성의 지휘가 당연하고 익숙한 것마냥 행동했다.
“벨루몬과 타우한은 녀석들이 마을에 침범하지 못하게
최고 수준의 방벽을 펼쳐 이들을 보호하도록.”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알았소.”
“그 이후에 여유가 된다면 공격을 해도 좋다.”
“…날뛰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벨루몬이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마을에 피해 가지 않는 선에서라면 그래. 좋다.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날뛰도록.”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벨루몬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허나 아까 보여준 모습만 보면 힘들 것 같은데 말이야.
상당히 많이 분발해야 할 것 같은데. 후후….”
“주군 그건….”
“무후후후.”
한성의 빙글거리는 웃음에 당황한 벨루몬과
한성의 웃음에 함께 따라 웃는 타우한이었다.
“웃지 마라.”
“….”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것 같은 살벌한 벨루몬의 기세에
타우한은 웃음을 멈추고 딴청을 피웠다.
“자 잡담은 여기까지. 출발.”
타우한과 벨루몬이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 * *
콰가가가가가가각.
수만 개의 다리가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계수의 전방으로부터 들려온 소리는
수백 정의 총이 사격하는 소리와도 맞먹었다.
게다가 모래 폭풍을 몰고 오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산도 뚫을 것처럼 흉흉하고 또 대단했다.
병정개미와 장군 개미는 물론이고 일개미들까지
모조리 몰고 나온 듯했다.
게다가 몰려오는 개미들의 사이사이에는
다 자라지 못한 작은 유충들까지도 뒤섞여 있었다.
모든 것을 건 듯한 그들의 태도.
그만큼 여왕이 이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뜻이겠지.
그들이 죽자 살자 달려오는 이유는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기존의 여왕개미가 죽어 새로운 여왕개미를 모시기 위함이거나
자신들의 여왕에 반하는 존재를 죽이기 위함이거나.
뭐가 됐든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좋지 않았다.
개미들이 지나고 난 자리에는 그 어떤 것도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발사!!”
이디아의 명에 수십의 화살들이 내 쏘아졌다.
푸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들이 개미들의 미간 정중앙에 꽂혔다.
그 힘을 이기지 못했던 개미들은
사정없이 우그러지고 찢어지고 터지며 쓰러져갔다.
한 발에 한 마리가 죽어 나갔다.
쉼 없이 쏟아지는 화살들에 최전선에 위치한 유충들과 병정개미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픽픽 쓰러져나가자
후방에 위치하던 장군 개미들이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전방으로 나와 활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역시 장군이라는 이름답게 그들의 방어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이디아들이 쏘아 낸 화살을 직격으로 맞아도
살짝 박히고 말거나 아예 튕겨져 나가는 수준이었으니까.
“휘이이이이익!”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이디아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디아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마자
티에라의 화살이 전광석화처럼 날아왔다.
파랗다 못해 시린 기운을 담은 티에라의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나아가 녀석들의 정중앙에 닿았다.
꾸궁….
티에라의 화살이 닿자 핵미사일이라도 터진 것마냥
폭발과 함께 흙무더기가 솟구쳐 올랐다.
큰 폭발과 함께 피어오른 푸른 화염이 개미들을 집어삼켰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엑!!!!!!!!!!”
[1572/ 10000]
푸른 화마(火魔)에 휩싸인 개미들은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되어 버리거나 녹아내렸다.
화염에 신체의 일부만 휩쓸려간 개미들도
여지없이 녹아내렸고 쓰러져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흠. 또 저건가. 멍청한 녀석.”
세계수의 높은 가지에서 이를 내려다보는 한성이었다.
티에라를 바라보는 한성의 표정은 마뜩잖아 보였다.
한성은 팔짱을 낀 채로 티에라와 파수꾼,
벨루몬과 타우한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개미들의 공격에 대한 이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을 뿐,
굳이 먼저 나서서 개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일까.
[주군 완료했습니다.]
한성의 머릿속으로 벨루몬의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수고했다.]
[방호는 충분한가?]
[예. 주군 개미들 따위로는 뚫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벨루몬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믿어 보지. 가라. 가서 날뛰도록.]
[지엄하신 주군의 명을 따릅니다.]
[타우한.]
[예. 주군.]
[녀석들의 강화와 회복을 도와라.]
[그게 원래 내 역할 아니오. 착실히 해내겠소.]
[그래 잘 부탁한다.]
[별말씀을.]
타우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벨루몬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름에 답하라.”
스태프가 빛나자 지면에서부터 10개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데스나이트였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꽤나 강해 보이는.
기름칠이라도 한 것 같이 빛나는 무구에 휘날리는 붉은 망토까지.
꽤나 멋있어 보였다. 신경 좀 썼군.
갑옷은 자그마한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흑색이었고
검의 날에 예기가 어려 무엇이라도 베어낼 듯 날카롭게 반짝였다.
방패와 갑옷, 검신에는 복잡한 글자들과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새겨져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척.
녀석들은 무릎을 꿇어 벨루몬에 기사의 예를 취했다.
‘…제법이군.’
나이트들의 면면을 살피는 한성의 눈이 날카로웠다.
녀석들에게서 언터쳐블 초입에서 중상의 기운이 느껴졌다.
벨루몬의 명이 떨어졌다.
“분쇄하라.”
벨루몬이 말을 마치자마자, 데스나이트의 안광이 번뜩였다.
철그럭.
쿵.
벨루몬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데스나이트들이
지면을 박차고 총탄이 발사되듯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개미들에게 도달한 데스나이트들이
그대로 검을 들어 개미들을 도륙 내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의 칼에 병정개미든 장군 개미든
수와 종류에 상관없이 썰려 나가기 시작했다.
개미들의 이빨은 데스나이트들의 철갑을 뚫어내기는커녕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고 나이트들의 반격에 힘없이 죽어갔다.
이에 장군 개미가 앞발을 휘둘러 그들을 쳐내고
짓밟으려는 듯 데스나이트들에게 다가갔지만 소용없어 보였다.
휘두르는 앞발을 향해 나이트들 또한 마주 칼을 휘둘러
이를 잘라 내거나 방패로 막아 흘려 내거나 막아 냈고,
짓밟으려는 장군 개미를 오히려 방패로 쳐내 넘어뜨리고는
녀석의 배를 베고 갈랐다.
같은 철이라 할지라도 단단함에 있어서 그 차원이 달랐다.
데스나이트들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벨루몬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었으니까.
한낱 저급 마물이 가진 강도와 비교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방패와 갑옷, 칼에 새겨진 문양과 술식들은
타우한과 벨루몬의 힘과 지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으로,
신체 강화와 마법 저항력을 높인 일종의 마법 무구였다.
개미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크하하하하하하.”
흡족한 듯 웃어 보이는 벨루몬이었다.
그 시각 타우한은 티에라에게 각종 버프를 시전하고 있었다.
티에라의 주변에 꽂힌 토템들에서 푸른색과 녹색,
노란색의 기운들이 뒤엉켜 티에라에게로 스며들었다.
티에라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고, 신기해하는 반응이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들려오는 파수꾼들의 신호에 활시위를 당겼다.
쏘아 낸 화살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 녀석들에게로 나아갔다.
생각지 못한 반응인 듯 그녀는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쿠구궁.
전의 위력의 배는 되는 푸른 화염이 황무지를 뒤덮었다.
폭발하다 못해 파도처럼 넘실대는 화염이었다.
화염의 파도에 쓸려 내려간 개미들은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녹거나 증발되었다.
[3546 / 10000]
‘살벌하군. 순식간에 이천이라니….’
타우한은 티에라를 뒤로하고 파수꾼들에게로 가
그녀에게 걸어주었던 강화의 술과 강체술을 시전해주었다.
티에라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파수꾼들의 화살에 어린 기운도 전에 비해 꽤나 강해졌고
이에 이제는 장군 개미들도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져갔다.
“부름에 답하라.”
벨루몬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와 파수꾼들에 의해 죽어 나간 개미들의 시체가
푸른 안광을 빛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가라. 가서 죽여라. 크하하.”
벨루몬의 흡족한 웃음이 이어졌다.
수백에 가까운 개미들의 시체가 개미 군단에게로 향했다.
형세가 쉽게 역전되리라 생각했으나 개미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이는 한성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센티페드들이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던 것과 달리
개미들은 어째서인지 적과 아군을 명확히 구분했다.
체내물질 분비 여부에 따라 이를 구분하는 것일까.
벨루몬의 군사가 되어버린 개미들이 군체를 향하자,
녀석들은 적이 되어버린 앤트들의 시체를 갉아 부수고 뜯어냈다.
“…이런….”
벨루몬이 쓰러진 시체를 다시 일으키려 했지만,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녀석들은 꽤나 지능이 높았던지 벨루몬의 능력을 알아챘고,
시체들을 잘게 조각내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게 했으니까.
파수꾼들은 화살이 떨어지자, 단검을 꺼내 들고는 백병전을 택했다.
타우한의 주술로 강화된 육체라 해도
장군 개미의 외피를 뚫어내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기에
데스나이트를 귀찮게 하는 일개미와 병정개미를 상대했다.
데스나이트에게 계속해서 엉겨 붙고 달라붙어
그 움직임을 봉쇄하려는 녀석들을 파수꾼들이 치우기로 한 것이었다.
파수꾼들의 선택은 옳았다.
걸리적거리던 개미 떼들이 하나둘 줄어들자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은
한결 자유로워졌고, 도륙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개미의 파도는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세계수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