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80화 (80/336)

080화

* * *

마을에서는 최고장로의 장례와 1장로의 취임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온 마을에는 꽃을 엮어 만든 장식들이 즐비했고,

마을 정중앙에는 술과 음식들이 성대하게 차려져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일족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최고장로의 죽음이 마치 오래전 일이기라도 한 양

술을 나눠 마시는 그들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연주하는 악기의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있었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도 있었다.

일족 그 누구에게라도 친절했고 따뜻했던

최고장로의 영혼이 세계수의 곁에 갔을 거라 믿고

이를 축하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애도 방식이었으니까.

마을의 수호를 위해 긴장을 늦추어선 안 될 파수꾼들도

지금 순간만큼은 술잔을 들어 최고장로에 대한 애도와

새로운 장로의 탄생에 대한 기대, 일족의 번영을 기원하며

술을 마셨다.

‘쯧…죽어서조차 방해하는구먼.’

자신만을 위한 행사가 되어야 하는데,

최고장로의 죽음을 애도할 겸

자신의 취임을 축하하는 식의 행사가 되어버려

지금의 상황이 영 마뜩잖은 1장로였다.

그는 겉으로 박수 치고 웃으며 최고장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척했다.

그러나 단상 위에서 일족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최고장로가 되는 그 즉시 세금을 올려 폭리를 취하고

젊은 엘프들을 품으리라는 더러운 생각을 하는 그였다.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모든 일족이 모인 가운데

취임사와 함께 공식적으로 최고장로가 되었음을 선포하려 했으나

족장인 티에라가 보이지 않아 이를 잠시 유보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다크 엘프의 자랑이자, 상징적인 존재였으니까.

“티에라는 어디 갔느냐.”

1장로가 추종자 엘프 하나에게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백방으로 찾아다녔습니다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마음이 많이 아플 게야.

나도 마음이 아픈데… 티에라는 오죽하겠나.

내 슬픔은 그녀에 비할 데가 못될 걸세. 좀 더 기다려 보세나.”

1장로가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지만.

그런 1장로를 보며 추종자 무리 중 하나가 소리쳤다.

“없으면 없는 대로 진행하시죠. 미뤄져서 좋을 일 없으니까.”

“그래도 되겠나…?”

1장로가 중얼거렸다.

“족장이라는 자가 중요한 행사에 사적인 일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족장이 없다고 행사를 중단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구요.”

“그건 맞는 말일세.”

눈치를 보던 2장로와 3장로가 이때다 싶었는지 이를 거들고 나섰다.

단상으로 걸어 나온 추종자 엘프가 부족민을 향해 소리쳤다.

“족장께서 불참하셨으나, 예정대로 취임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시끄럽던 음악 소리가 멎었다.

춤을 추고 노래하던 일족들도 행동을 멈추고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웅성웅성

좌중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사실 주민들로서는 최고장로가 누가 되든 별 상관없었다.

실제적인 마을의 수호와 사냥, 채취, 채집 등으로

일족의 번영과 안전을 도모해온 것은 족장인 티에라였으니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티에라지 최고장로가 아니었다.

행사에 티에라가 보이지 않는 것도 마음이 쓰이고 안타까운데

그녀를 내버려 두고 진행되는 행사가 좋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마뜩찮아 하는 반응에 추종자 엘프는 진땀을 흘렸다.

점점 웅성대는 소리가 커져만 갔고,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장로들조차 당황스러워하던 그때, 티에라가 저 멀리서 걸어왔다.

“족장님이다!”

일족 중 하나가 티에라를 발견한 듯 소리쳤다.

착.

족장이라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디아를 비롯한 파수꾼들은

먹던 술과 음식을 내려두었다.

술을 먹어 옷이나 몸을 가눔에 있어 흐트러질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은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그들은 몸을 바로 하고 군기 잡힌 자세로 티에라를 맞이했다.

다시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일족들은 티에라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오롯이 자신의 날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족들의 관심이

티에라에게만 쏟아지자 부아가 치민 1장로였다.

‘제길… 할미나 손녀나 방해만 해대니 원….’

“오 티에라. 어서 오렴. 많이들 기다렸단다.”

속마음을 감춘 채, 티에라를 반가이 맞이하는 척하는 1장로였다.

“….”

1장로의 환대에도 티에라는 아무런 말 없이

단상으로 천천히 다가가 그 위에 올랐다.

“…티에라?”

그런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다 여긴 1장로가

재차 그녀를 불러 보았지만 그녀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마침내 티에라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뭐 하는 거냐 티에라.”

“닥쳐라. 쓰레기.”

1장로의 티에라가 입을 열어 내뱉은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뭐… 뭐?!”

장로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설마 알았나…?’

“…뭐…? 최고장로가 될 분께 무슨 말버릇이야 그게?!”

추종자 하나가 티에라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티에라는 그런 추종자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었다.

“1장로 및 2, 3장로 당신들을 최고장로 및,

전대 족장과 그의 부인을 살해하고 이를 묵인한 죄로

장로직을 박탈하고 현 시간부터 일족에서 추방한다.

복종하지 않을 시 이 자리에서 사형을 집행하겠다.”

“…뭐?! 이 여자가 미쳤나.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우리 최고장로님께서 그랬을 리가 없….”

흥분한 추종자가 언성을 높였지만,

언제 다가왔는지 이디아가 칼을 빼 추종자의 목에 가져다 대며

음습하게 말을 이었다.

“닥쳐라. 쓰레기 자식아.”

“히익….”

“1장로가 최고장로에 취임한 것도 아닌데

벌써 최고장로라 칭하며 꼬리를 흔드는 꼴이 참으로 한심하구나.

그가 최고장로가 된다 해도 그것은 그의 일이지,

네놈이 최고장로가 되는 것이 아닌데 어찌 이리 오만하단 말이냐.

함부로 족장께 입 놀리지 마라. 그렇게 식겁하고도 정신 못 차렸나.

목에 바람구멍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추종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다물었다.

“족장. 제 아비라 그런 것이 아니라,

죄를 물으시려면 그에 합당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저와 파수꾼들은 족장이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 무슨 말씀이라도 믿고 따르겠습니다만….”

이디아가 어렵게 입을 뗐다.

“아무리 족장이라 하시더라도 증거 없이는….

죄를 물으실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이런 일은 더욱이요.”

이디아가 침착하게 티에라에 말했다.

“그것에 대해선 내가 증명하지.”

티에라의 그림자 뒤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인영이 하나 솟아올랐다.

한성이었다.

“벨루몬. 보여라.”

* * *

“…….”

벨루몬의 영상이 시작되고 끝나는 동안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흔한 새소리 하나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저 침묵뿐.

모두가 입을 벌린 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로들의 이야기를 볼 뿐이었다.

영상이 끝나자 눈을 질끈 감아버린 1장로와 달리

2장로는 한성을 가리키며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이… 이건 모함이오! 저자가 꾸며낸 일이라고!!”

“…? 내가 꾸몄다고?”

한성이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래!! 대마도사인 리치를 시켜 조작하고 꾸민 게지!

3장로 또한 이에 맞장구를 쳤다.

“뭐 물론, 충분히 가능하긴 하지. 그 정도 일쯤이야,

벨루몬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울 테니까.

그런데 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 그래야! 티에라를 쉽게 빼 갈 테니까!”

2장로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난 분명 말했다. 티에라가 원치 않는다면 그냥 두겠다고.

원치 않는 자를 데려가 봐야 내게도 좋을 것 하나 없어.”

“…그… 그건.”

“보여라.”

한성의 말에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1장로의 손가락 끝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 이건?”

놀란 1장로가 자신의 빛나는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잘 봐라. 저자의 손끝을.

반짝반짝하는 게 예쁘지 않나? 이유가 뭔지 아는가.”

“…모르오.”

이디아가 부들부들 떨며 벨루몬의 말에 답했다.

“저자가 개미들을 소환하는 스크롤을 찢었기 때문이지.

스크롤에는 마법진을 새기느라 염료가 묻어있거든.

마력을 발동시킬 때 마력과 반응하는 염료 말이야.”

“세상에….”

충격에 휩싸인 듯 모든 좌중이 1장로를 바라보았다.

물론 추종자 엘프들도 함께.

“자. 더 변명해 봐. 아주 재밌구만 그래.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물에 빠진 쥐새끼 꼴이야.”

벨루몬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자. 이건 어떠냐. 이것도 꾸며낸 것 같은가?”

한성이 물었다.

“이… 이 또한 조작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니오!

인정할 수 없소. 여러분 믿지 마시오!”

2장로가 한성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잘라버리기 전에 주군께 향한 손가락 치워라.”

벨루몬이 타오르는 눈을 한 채 음습하게 경고했다.

2장로가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즉시 손을 내렸다.

“하아. 나 원 참… 이렇게 까지 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뻔뻔하네. 벨루몬. 가능하겠나?”

“왕의 명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보여줘.”

딱.

다시 한번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겼다.

단상의 위로 연녹색의 뭔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불분명하던 형체는 점점 그 모습을 온전하게 갖춰가고 있었다.

“…최… 최고장로…?”

1장로가 중얼거렸다.

“마… 망자의 왕….”

벨루몬을 보는 2장로의 입에서 공허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할머니!!”

티에라가 달려가 최고장로를 안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고장로는 실체를 가지지 못한 영혼이었으니까.

[…티에라. 괜찮니?]

따뜻하고 자상한 목소리에 티에라가 뒤돌아보았다.

“할머니….”

그곳에는 서글픈 표정의 최고장로가 서 있었다.

[괜찮다. 괜찮아.]

최고장로는 영체(靈體)의 몸으로 티에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퍽 따뜻했지만, 티에라에게 닿지는 못했다.

그녀는 영체였고 티에라는 산 자의 몸이었으니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소. 혼령은 묻는 말에 답해주기 바라오.”

벨루몬이 엄중하게 물었다.

[예. 말씀하시지요.]

“1장로가 그대를 죽인 것이 맞소?”

[예. 맞습니다.]

“2장로와 3장로 또한 이에 동조했고

그대의 죽음을 감추고 묵인하려 한 것이 맞소?”

[예. 그렇습니다.]

“더 할 말 있나. 장로들.”

한성이 싸늘하게 말했다.

“….”

“설마 망자의 왕 벨루몬이 죽은 최고장로를 불러내

거짓말을 하게 했다고 개소리를 지껄이지는 않겠지.

아니지 저 최고장로의 영혼마저 가짜라고 하려나…?

응? 어때. 말을 해봐. 들어 줄 테니.”

“….”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 가지 더 말해주지. 모두 최고 장로의 배를 보도록.”

한성이 최고 장로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배 한 가운데에 그어진 실금이 보이나?

자상(刺傷)이다. 날카롭고 얇은 날붙이에 당한 상처지.”

한성의 말에 좌중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디아.”

“예.”

“너의 아비가 아끼는 칼이 있지 않나.”

“…예. 있습니다.”

이디아는 그 칼이 무엇인지 직감한 듯 눈을 감으며 답했다.

“가져와 보겠나.”

“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난 이디아의 손에는

화려한 장식의 칼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여기.”

이디아 또한 자신의 아비가 탐욕에 눈이 멀어

남을 그것도 최고장로를 해했다는 사실이 큰 충격인 듯 보였다.

한성에게 칼을 건네는 그의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으니까.

촤릉.

칼을 뽑아내자 자상의 흔적과 꼭 일치하는 얇고 검신이 보였다.

“할 말 있나. 1장로.”

“…….”

“다른 장로들도 뭔가 할 말이 더 있다면 말해보도록.”

“…이… 이건 1장로가 시킨 일이오! 그가 협박했소!!”

“마… 맞소.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힘이 없어 1장로를 막지 못한 것뿐이오!!”

2장로의 말에 이때다 싶어 빠르게 답하는 3장로였다.

“하… 니들은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최고장로를 보내고 마저 이야기하지 이 쓰레기들아.”

한성은 장로들을 바라보며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씹어뱉듯 말을 내뱉는 한성의 말과 태도에

그들도 수치를 느끼긴 했는지 낯짝이 붉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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