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78화 (78/336)

078화

* * *

[세계수의 공간에 입장합니다.]

[세계수가 ‘이한성’을 살핍니다.]

[‘세계수의 권능’이 시전됩니다.]

[신체 능력이 100% 하락합니다.]

[스킬 : 왕의 위압이 저항합니다.]

[일부 저항에 성공, 세계수의 금제가 제한됩니다.]

[스킬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스킬 : 해방된 마력의 소유자가 저항합니다.]

[일부 저항에 성공, 세계수의 금제가 제한됩니다.]

‘음…?’

세계수의 권능이라….

한성은 유심히 방을 살폈다.

세계수의 방은 거창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열 평 남짓한 크기의 아담한 방이었다.

게다가 방에는 방 전체를 자신의 가지와 뿌리로 채운

백색의 나무 한 그루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뿐

그 어떤 집기나 도구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하나 신기한 것은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온통 나무뿌리와 가지들로 폐쇄된 방이었음에도

나무에서 새어 나온 빛으로 온 방이 환하다는 것이었다.

바닥에는 습기를 머금은 듯 촉촉한 녹색의 이끼가 무성했고

푹신푹신한 기분 좋은 쿠션감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수를 뵙습니다.”

백색에 나무에다 고개를 숙인 티에라의 인사에는

정숙함과 따라 할 수 없는 우아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한성도 티에라를 따라

세계수의 정신으로 추정되는 나무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신기한 아이로구나.]

세계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성이 들려왔다.

퍽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당신이 세계수입니까?]

한성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단다.]

[절 보고 싶어 하셨다고….]

[그래. 그랬지.]

“이 모습이 너희에게는 더 편할 것 같구나.”

빛무리와 함께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

녹색의 머리칼을 가진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동그란 눈을 가진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였다.

그녀는 잎사귀와 넝쿨들로 멋지게 장식을 한 옷을 입었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년의 나이임에도 아름답고 우아했다.

“세계수를 뵙습니다.”

티에라가 황급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늘 지켜보고 있었다. 내 축복을 받은 아이야.”

티에라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세계수였다.

세계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성을 바라보았다.

“볼수록 참으로 신기한 아이로구나.

종(種)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도 모자라 신의 영역을 넘보기까지….”

“…그렇습니까.”

세계수는 한성의 창조와 해방된 마력의 소유자를 꿰뚫어 본 듯했다.

“지금까지… 지루하고도 오랜 삶을 살아왔지만

나의 신성(神性)을 거부하고 밀어낸 자는 네가 처음이구나.

신격(神格)에 가까운 힘을 얻은 게 아니고야 이는 불가능한 일이지.”

‘역시 대단한 분이었어.’

한성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수와 티에라였다.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티에라의 눈이

전보다 반짝거리는 것 같아 부담스러운 한성이었다.

“….”

“너의 이야기는 이미 마물들 사이에서도 파다하단다. 후후….

그나저나 말이 통하는 걸 보니 벨루몬의 힘 때문이겠구나.”

“…예. 맞습니다.”

“그래. 그래. 후후 앉거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세계수의 손짓에 바닥에서 금세 풀과 넝쿨로 만들어진

푹신한 의자 셋과 탁자가 솟아올랐다.

“…감사합니다.”

한성을 쳐다보던 세계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널 만나고 싶었단다.”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왜 절…?”

“후후….”

싱긋 웃는 세계수였다.

“이 정도의 강대한 마력을 품은 아이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궁금하더구나. 후후후.”

“…그러셨습니까.”

한성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또 부탁할 것도 있고 해서 말이야.”

“…무슨?”

“알아 봐줬으면 하는 것이 있단다. 그분의 생각도 알고 싶고.”

“?!”

“…그분이라 함은…?”

놀람도 잠시 한성이 침착하게 물었다.

세계수는 말없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신을 말하는 건가.’

“…무슨 말인지 듣고 나서 생각하겠습니다.”

“후후. 신중한 아이구나.

흡족한 표정의 세계수였다.

“이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 할 것 같구나. 그게 우선일 게야.”

“….”

“신격을 부여받았다고는 하나, 나 또한 그분의 피조물이란다.

그분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니 내가 알고 있는 것까지만

그리고 내게 허락된 것까지만 말해주도록 하마.”

세계수는 아이들에게 옛날 옛적 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의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태곳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단다.”

“….”

세계수가 손을 휘젓자, 은은하게 방을 밝히던

세계수의 빛이 사라지고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이윽고 세계수의 손에서 비롯된 반짝이는 가루가

공중으로 흩뿌려졌고 이는 그림판이 되었다.

세계수의 말을 부연설명이라도 하듯이.

“태초에 아무것도 없던 무의 공간에 그분께서 나타나셨단다.

세상을 만드시고 그 안에 빛과 어둠, 땅과 하늘

해와 달, 물과 불, 산과 바다를 채워 넣으셨지.”

‘창세 신화쯤 되나 보군.’

한성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옛날이야기쯤 되겠다 싶어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그분께서 만드신 세상에 생명이 하나둘 깃들기 시작했고,

금세 많은 생(生)들이 제각기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단다.

그 삶들 중에는 너와 같은 인간들도 끼어 있었지.”

세계수가 한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요?”

‘인간이라고? 마물이 아니라? 이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건가?’

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면에 티에라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세계수가 그린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였단다.

먹을 것이 필요한 인간들에게는 먹을 것을 내주셨고,

태양에 더워하는 인간들에게는 나를 키워내 그늘을 내주셨지.

참으로 따뜻한 분이셨단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신화란 말인가.’

세계수가 인간과 함께했다는 말을 들은 한성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신격(神格)을 부여받은 세계수가 허튼소리를 할 리는 없을 텐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힘이 필요하단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으니 그 피곤함은 더 하셨겠지.

힘을 다 소진하셨는지 기력을 회복하려 잠깐 눈을 붙이셨단다.”

‘…흠.’

“잠깐 눈을 붙이시려던 계획과 달리 많이 피곤하셨던지

그분의 잠은 꽤나 오래도록 이어졌단다.

사실 이것이 자신의 피조물들을 시험하려 의도하신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잠이 드신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단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아픔과 굶주림, 슬픔을 호소하며

애타게 그분을 찾았지만 그분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어.

그렇게 인간들은 자신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던

그분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지.”

허공에 신을 찾아 울부짖는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분의 사랑을 갈구하던 인간들은 점점 지쳐만 갔고

결국 평화롭던 세상은 점점 혼탁해지기 시작했단다.”

‘종교 교리(敎理)를 듣는 기분이군….’

“인간들은 서로의 것을 탐내고, 가진 자를 시기하고,

사소한 것에 분노하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질투하고

권력을 얻어 오만해지고, 색(色)을 탐하는 등

서로를 죽이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했지.

결국 세상은 어지러워졌단다.”

공중에는 칼로 사람을 베고 돌로 치고 때리는 등의

눈을 찌푸릴만한 잔혹한 장면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자 인간들이 뿜어내는 부정적 감정들이 모여

사기(邪氣)와 마기(魔氣)가 되고 사기들이 모여 마물이 되었단다.”

“마물이… 되었다구요?”

몰래 하품하던 한성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마물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존재란 말인가?’

“그래. 이야기는 지금부터란다.”

한성의 눈이 빛났다.

“인간들의 부정적인 감정에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진

마물들은 강했고 또 다양했단다. 너무나도 무서웠지.”

허공에는 갑자기 나타난 마물들이

인간들을 죽이고 잡아먹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인간들도 이에 저항하려 싸워 봤지만 소용없었단다.

이들에 대한 공포와 분노가 강해질수록

마물들의 힘은 더 커져만 갔으니까….”

‘…마물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존재라 그런 건가.’

한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죽음이 닥쳐오자 인간들은 다시 그분을 찾았지만

그분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여전히 답이 없으셨어.”

“….”

“눈물을 흘리며 그분을 찾는 인간들도….

그리고 태어남과 동시에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마물들도 너무나 불쌍하더구나.”

“그랬군요….”

이야기에 몰입한 듯 공중의 그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티에라였다.

‘그럼 마물과 인간이…공존했다는 소리인가?’

“보다 못한 내가 그분께 빌었단다.

마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없는 사이라면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각각의 세계를 만들어 달라고.

당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만들어진 저 마물들 또한

하나의 생(生) 아니냐고. 내가 저들을 품고 살겠다고.”

“자애로우신 분….”

티에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그분께서 답해주시더구나. 그렇게 해주겠다고.

그리곤 마물의 세계를 만들어 마물들과 나를

이 세계로 옮기시고는 두 세계의 사이를 단절시키셨단다.”

‘…그러면 인간의 세상에 마물의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한성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세계수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곤 인간들의 기억과 기록에서

마물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지워버리셨지.

아마 인간들의 역사에 마물에 대한 기록은 몇 없을 게야.

아니면 아예 없거나 말이지. 후후.”

“…그게 지금 이 세계의 탄생이었군요.”

‘…믿을 수 없군….’

“그래. 그런 셈이지.”

믿을 수 없는 말들의 연속에 한성의 머리가 복잡했다.

“인간의 세상과 마물의 세계를 단절시켰다고는 했지만,

완벽하게 단절된 것은 아니었단다.”

“…그게 무슨…?”

한성이 묻자 세계수가 웃으며 답했다.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에너지가 모이면

다시 한번 인간들의 세계에는 마물들이 판을 칠 테니,

그를 정화할 수 있는 존재를 정해 주셨지.”

“…그게 세계수이십니까?”

“그래. 그것이 나란다. 후후. 인간들의 사기를 양분 삼아

이 세계를 지탱하고 마물을 품으라는 역할을 부여받았지.”

“아….”

“그리곤 그분께서 내게 자신의 권능을 나누어주셨단다. 평범한 나무인 내가 그 독한 힘을 흩어낼 능력이 없으니까. 후후….”

“…그랬구나.”

“덕분에 난 세계를 지탱하는 세계수가 되었고

이 세계에 가득했던 사기와 마기를 흩어냈단다.

또 뿌리를 뻗고 가지를 내려 많은 마물을 품었지.”

티에라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짓는 세계수였다.

“지금에서야 짐작하는 것이지만… 아마 그분은

일이 그렇게 흘러가리라 짐작하시고 날 만드신 게 아닌가 싶어.

인간도 마물도 모두 그분께는 소중한 자식일 테니까.

참으로 전지전능하신 분이야. 후후.”

“그러셨구나….”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의 부름에 응답해주지 않으셨단다.”

세계수의 표정이 씁쓸했다.

세계수의 말을 들으며 한참을 뭔가 생각하던 한성이 중얼거렸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물어보렴.”

세계수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인간과 마물 모두를 아껴 두 세계를 단절시켰다는 신께서

이제 와서 다시 이를 연결시킨 이유가…?”

“그게 내 부탁이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