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 * *
“일족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손님을 모셔다 놓고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죄송하구요.”
늦은 밤 한성의 숙소로 찾아온 티에라가
한성에게 감사와 사과의 인사를 전했다.
“별거 아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이미 장로들도 인사차 들렀다 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한성이 침대 옆을 가리켰다.
형형색색의 과일들로 가득한 바구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장로들이 감사의 뜻으로 가져온 것이리라.
“…그렇네요. 그래도 전 감사드릴래요.
‘리’가 아니었다면 우리 일족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어요.”
“내가 없었더라도 잘 해냈을 거다 넌.”
한성의 말은 진심이었다.
다소 피해는 있었겠지만,
한성이 없었더라도 그녀는 잘 해냈을 것이다.
현명하고 강한 여자였으니까.
“아니에요. ‘리’가 아니었다면 큰일 났을 거예요.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엘프들이 수십이었는걸요.
게다가 건물까지 수복시켜 주셨구요.”
“…뭐 그래. 그건 그렇고 넌 괜찮나.”
한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티에라를 살폈다.
자신과 가까운 자를 잃는 경험은 한성 또한 겪었기에
누구보다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 네. 괜찮아요. 뭘 이 정도 가지구요. 후후.
장군 개미한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아요.
물론 ‘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양팔을 들어 탄탄한 자신의 근육을 자랑하는 티에라였다.
“아니. 최고장로 일 말이다.”
“아….”
웃음이 가득하던 티에라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괜찮아야죠… 전 족장이니까.
누구보다 강해야 하는 족장이니까… 후후….”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
“부모님 얼굴도 몰라요 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두 분의 얼굴도
희미하게 그 형태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에요.”
“음.”
“제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앤트들이 침입했고,
두 분이 녀석들에 맞서 마을을 지키다 전사하셨다 들었어요.
그런 저를 거두어 키워주신 게 할머니셨구요.”
“….”
“많이 사랑해주셨어요. 그 누구보다도….
말로는 최고의 전사가 돼야 한다 하시며
혹독한 훈련을 시키기도 하셨지만 전 알고 있었어요.
할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그랬나.”
“제가 훈련할 때 한 번도 절 보러 오시지 않았어요.
아마 손녀가 쓰러지고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으셨겠죠.
그리고는 밤마다 제 방에 몰래 들어오셔서
다치고 멍든 제 몸을 보며 숨죽여 우셨어요.”
“….”
담담히 말하는 티에라에게서 진한 슬픔이 느껴졌다.
“세계수의 곁에 가셨을 겁니다. 할머니는 좋은 분이셨으니까요.”
티에라가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러셨을 거다.”
그런 티에라를 위해 한성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같이 마주 보고 웃어주는 것뿐이었다.
“후후… 아 참. 세계수 뵈러 가지 않으실래요?
할머니 말씀도 있으셨고 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수께서 ‘리’를 만나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요.
물론 세계수께서 허락을 하셔야 만날 수 있겠지만.”
[퀘스트 발생.]
[퀘스트 : 마물의 세계.]
[퀘스트 내용 : 세계수와의 대화.]
[케스트 보상 : 경험치 + a.]
[수락하시겠습니까?]
‘확인.’
“세계수를…? 문만 열어도 볼 수 있는데 굳이…?”
한성이 문을 열어 숲속 가득 드리운 세계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건 세계수의 몸이구요. 제가 말씀드린 건 정신이에요.”
“정신…?”
“네. 세계수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세요.
마물의 세계가 날 때부터 이 세계를 지탱해온 태고의 존재세요.
신격을 부여받은 신성한 나무이시기도 하구요.”
“호오… 그래?”
“저희에게 할 말이 있으시면 저희가 그것을 이행할 수 있도록
직접 말씀해주시거나 흔적을 남겨주세요.”
“…대화가 가능한 신성한 나무라….”
“후후. 신기한가요.”
“그게 사실이라면 신기한 일이지.
우리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저도 실은 두 번밖에 못 봤어요.
실제로 본 것은 아니고 할머니께 전해 들은 거지만요.”
“그래?”
“네. 제가 태어날 때 한 번,
‘리’께서 마을에 들어오실 때 한 번 반응하셨다고 해요.”
“나에게? 반응했다고?”
“네.”
“마물의 세계에 사는 것도 아닌 날 어떻게 알고…?”
“글쎄요. 세계수님의 의지를 저 같은 평범한 엘프가 알 리 없죠.
아마도 만나 뵈게 되면 직접 말씀해주시지 않을까요?”
티에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대단한 존재를 외부인인 내게 보여줘도 되는 건가?”
“뭐. 제가 족장인데요 뭐.”
“그럼 부탁해도 되겠나?”
“물론이죠. 후후.”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따라오시죠.”
티에라가 앞장섰다.
* * *
마을의 외곽에 위치한 3장로의 집이 꽤나 떠들썩했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해 주변에 엘프들이 살지 않는
조용한 외곽에 집을 지은 3장로인데 본인이 더 시끄러울 줄이야.
“최고장로 일은 일단락되었고, 이제 앞으로 어찌할 거요? 1장로.”
“1장로라니. 이제 최고장로가 될 분이요.”
2장로의 말에 3장로가 핀잔을 주었다.
“아. 그렇군. 하하하.”
2장로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은 아니오.”
1장로가 손을 내저으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이제 1장로가 되었구려. 축하하오.”
“아이. 그러는 그쪽도 이제 2장으로 아니오.
하하하. 이거 원. 축하할 일뿐이군.”
2장로와 3장로도 서로에게 축하를 건네며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최고장로께서 전대 최고장로를
죽인 게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싶구려.”
2장로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어허. 말조심하시오. 죽이다니.
티에라와 신궁이라는 보물을 밖으로 빼내려는
범죄자에 대해 엄중히 법을 집행한 것뿐이오.”
1장로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게 그거 아니오?”
2장로가 중얼거렸다.
“왜 아니겠소? 하하하하하.”
1장로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진지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풀어지며 순식간에 웃음판이 되었다.
“다크 엘프들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최고장로뿐 아니라 더한 것도 죽일 수 있소.”
1장로가 자랑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암. 그래야지요. 저 멍청한 우민(愚民)들이
우리 없이 어떻게 이 척박한 마물의 세계에서 살 수 있겠소.
우리가 다 희생하고 피를 뒤집어썼으니 가능한 일이지.”
2장로가 1장로의 말을 받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당연한 거 아니겠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티에라의 애미와 애비도 죽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티에라는 나오지도 못했을 거요.
제 딸이 상처 입는 걸 허락이나 했겠소?”
“맞소. 맞는 말이오. 하하하하.”
“그나저나 1장로.
그 장군 개미를 소환하는 스크롤은 어디서 구한 게요?”
3장로가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보요.
아버님께서 필요할 때 쓰라 하셨으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쓰겠소?”
“맞는 말씀이시오. 아버님이 아주 현명하셨구만. 하하.”
그 후로도 즐거이 말을 주고받으며 흥겹게 술을 마시는 셋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티에라 하나뿐인데….
우리가 저자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고….”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2, 3장로의 대화에 1장로가 선뜻 큰소리쳤다.
“그녀가 가진 우수한 피는 아쉽긴 하지만,
그가 데려간다고 하는데 어찌 막을 수 있겠소.
대신 신궁은 반납하라고 하고,
데스나이트를 10기 정도로 늘려달라고 하면 충분할 것이외다.
뭐 칼 하나 없다고 전쟁에서 지겠소. 어디?”
“크… 역시. 최고장로의 재목이로다. 하하하.”
“오늘을 기념하며 건배합시다. 자. 건배.”
“건배!”
“하하하하.”
밤이 깊도록 불은 꺼지지 않았고 방의 한구석에는
은신한 채로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벨루몬이 있었다.
* * *
“여기예요!!”
티에라가 크게 소리쳤다.
“뭐라고…?”
티에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한성이 마주 소리쳤다.
“여.기.라.구.요!”
티에라의 곁으로 다가가서야 그 말을 알아들은 한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티에라가 한성을 데리고 간 곳은
막대한 양의 물이 끝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였다.
떨어지는 물과 바닥의 물이 맞부딪쳐 나는 소리는
귀가 먹먹할 정도였고, 전력을 다해 고함을 친다 해도
바로 옆의 사람에게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티에라조차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른다는 이 폭포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메마른 적이 없다고 했다.
세계수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폭포는
세계수의 규모와 크기에 비례하는 모습이었다.
폭도 높이도 최소 100미터는 되어 보였으니까.
폭포의 깊이도 꽤나 깊어 보였다. 어림잡아 15~20미터 정도?
물은 에메랄드빛이었고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게다가 이쪽 세계에도 반딧불이 비슷한 것이 있는지
반짝이는 곤충들이 폭포 주변을 떼 지어 날아다녔다.
‘아름답군….’
물보라에 몸이 흠뻑 젖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했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한성을 웃으며 보는 티에라였다.
“저 따라오세요.”
티에라가 귀에다 대고 소리쳤다.
한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티에라가 앞장섰다.
폭포의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돌아가자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 나무의 사이로 길이 하나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자 폭포의 뒤쪽으로
꽤나 큰 규모의 공동(空洞)이 하나 보였다.
바로 뒤에 폭포가 떨어지고 있음에도
공동 안은 딱히 시끄럽지 않았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발소리도 선명히 들렸으니까.
천장에는 마법인지 반딧불이인지가 걸려 반짝이고 있어
시야 확보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공동은 썰렁했다.
이렇다 할 만한 구조물 하나 없었고,
세계수를 지키는 경비원 하나 없었다.
소중한 게 맞긴 한가?
아니면 애초에 이리로 오는 길을 아는 자가 적은가?
별생각을 다 하는 한성에게 티에라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리로.”
공동의 끝에 다다르자, 바닥에서 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알 수 없는 문양과 글자들이 빽빽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마법진인 듯싶었다.
“세계수의 정신이 있는 곳으로 옮겨 줄 시험대예요.”
“시험대?”
‘세계수의 허락이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네. 오르면 알게 될 거예요.”
[세계수가 대상 ‘이한성’을 살핍니다.]
한성이 위에 올라서자 녹색이던 진의 색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역시.”
티에라가 중얼거렸다.
“음?”
“세계수께서 ‘리’께 반응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확실히 틀린 것은 아니었나 봐요.”
“왜.”
“세계수는 만날 존재와 만나지 않을 존재를 구별하세요.
이렇게 진에서 파란빛이 나타나면 적합자라는 뜻이에요.
만날 기회를 얻었다는 뜻이죠.”
“그렇군.”
“만일 붉은 빛이 나타나면 부적합자로 판명되어
폭포 밖으로 강제 이동 당해요.
그리고 그는 다시는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해요.”
“…그래?”
경비원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였다.
티에라가 상기된 얼굴로 진 위로 올라섰다.
파란색이던 색은 변하지 않았다.
“오! 세계수께서 허락해주셨어요!”
티에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환한 빛무리가 일었고
둘은 어딘가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