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 * *
“크허어어억….”
한성이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주… 주군!! 괜찮소?! 주군?!”
고통스러워하는 한성의 모습에
타우한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옥체에 손대지 마라.”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벨루몬이 단호히 말했다.
“군사….”
안절부절못하는 타우한에 비해 벨루몬의 모습은 평온했다.
“으허어억….”
“주군….”
시시각각으로 창백해져가는 한성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타우한이었다.
“겨우 이 정도 일 따위에 망령되이 굴지 마라.
주군의 가신이 되기로 했으면 그에 맞는 품격을 갖추어라.
주군께서 저따위 냉기에 굴복하실 분으로 보이느냐.”
“…그렇진 않지만….”
“그럼 닥치고 자리나 지켜라.”
벨루몬이 담담히 말했다.
“하… 하지만….”
“주군께서 네게 맡기신 일이 있을 것이다.
넌 그 자리에서 네게 주어진 본분을 다하라.
그것이 주군을 돕는 일이며 주군을 위하는 일이다.”
타우한의 말을 자른 벨루몬의 모습은 단호하고 결연했다.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틀렸다.”
“…그…게 무슨 소리요?”
속이 타는 듯한 표정의 타우한과 달리 벨루몬은 너무나 담담했다.
“잘못될 것이라는 너의 그 같잖은 가정 자체가 틀렸다.
주군은 장차 이곳과 마물의 세계 모두를 다스릴 왕이 되실 분이다.
저 정도의 자그마한 시련에 쓰러지실 분이 아니란 말이다.
주군께선 혹한을 이겨내시고 당당히 원하는 바를 이루실 것이다.”
“….”
“또 네놈의 그 태도가 틀렸다.
설령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네 놈과 내가 있는 것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주군께서 혹여라도 잘못되신다면
네놈의 값싼 혼을 갈아서라도 주군을 살려야 할 것이다.
나 또한 주군의 혼을 붙잡아 죽음을 계속 유예할 것이고.”
“….”
“네놈이 무슨 알량한 생각으로
주군의 가신이 되겠다 자청한 것인지는 내 잘 모르겠으나,
그 자리는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라.”
벨루몬의 진중한 꾸짖음에
타우한 또한 자신이 하려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가신으로서 옳지 못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알겠소.”
“명심해라. 네가 모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벨루몬의 말을 끝으로 둘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고
창백해져가는 한성을 바라만 보았다.
* * *
‘젠장할… 어째서….’
[경고 : 전체 체력의 25% 남았습니다.]
생각보다 빙옥의 한기는 견디기 어려웠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얼어붙었고
콧속은 숨을 들이마시고 뱉을 때마다 얼고 녹고를 반복했다.
증기 기관차마냥 힘차게 뛰던 심장은 냉기에 점점 느려져
그 움직임이 둔해졌고, 이제는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경고 : 전체 체력의 20% 남았습니다.]
방 안의 온도는 이미 영하를 돌파한 지 오래였고
방 안의 물건들은 액체질소에 닿은 장미꽃 마냥 부서지기 시작했다.
[경고 : 전체 체력의 15% 남았습니다.]
지독한 한기에 온몸이 떨렸다.
이제 몸마저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동상이 온 것처럼 손끝과 발끝의 감각은 저리다 못해 사라졌다.
뚜둑….
힘을 어찌나 주고 있었던지, 손가락 하나가 부서져 나갔다.
[경고 : 전체 체력의 10% 남았습니다.]
‘시끄럽군.’
5% 단위로 체력을 알려주는 시스템의 알림도 이제는 성가셨다.
핏줄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피가 흘렀고
그조차 조금씩 얼어 굳어갔으며 이제는 흐르지도 않게 되었다.
냉기를 밀어내려 뜨겁게 용솟음치던 마력은
혹한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서히 꺼져 들고 있었다.
‘…만용(蠻勇)이었나….’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한성이었다.
바실리스크의 독을 이겨낸 건
하늘이 내려준 하나의 기연 같은 것이었다.
그런 바실리스크의 독도 이겨냈으니 어떻게든 되리라,
한 번 더 행운이 따라 주리라 생각했던 한성에게
혹한의 소용돌이는 너무나 뼈아픈 실책이었다.
‘…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 건…ㄱ….’
그때였다.
의식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에 들려온 시스템의 알림이
흐릿해져가는 한성의 의식을 붙잡았다.
[경고 : 전체 체력의 5% 남았습니다.]
[업적 : 죽음을 이겨낸 자가 발동합니다.]
[공격력, 방어력, 회복력 100% 증가합니다.]
[10초 남았습니다.]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식었던 피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의식도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업적!!’
[9.]
늘어난 HP만큼이나 빠르게 다시 줄어드는 HP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며 한성이 결심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8.]
끌어올릴 수 있는 모든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크으윽….’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가운데
앞뒤 재지 않고 급히 끌어올린 마력이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했다.
한성의 내부는 마력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울컥.
핏덩어리가 한성의 코와 입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주군!”
이제나저제나 한성이 정신을 차리길 바라 마지않던
타우한의 눈이 빠질 듯 커졌다.
“가만.”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한성을 잡아 흔들 듯한 기세의 타우한.
그런 그를 보며 벨루몬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쩌저적.
입가와 코로 흘러내린 피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7.]
내장이 뒤틀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고통에 눈이 뒤집혔고 정신을 놓을 것 같은 와중에도
한성은 계속해서 마력을 끌어 올렸다.
[6.]
자신을 위협하는 한성의 강대한 마력에
빙옥은 더욱 세차게 냉기를 내뿜어 이를 밀어내려 했지만
모인 기운은 그리 단시간에 흩어 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한성이 목숨을 걸고 끌어올린 마력의 양이 방대한 것도 있었지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버린 한성의 마력은
빙옥이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쾅!!!!!!!!!
“주군!!”
한성의 내부에서 들려온 정체 모를 굉음에
놀란 타우한이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잠깐!!”
한성의 상태를 살피려 다가가는
타우한의 팔을 급히 잡으며 벨루몬이 소리쳤다.
슈우우우우우우욱.
“……?”
“읏….”
한성으로부터 불어온 뜨거운 수증기가 둘을 덮쳤고,
방안은 수증기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타우한은 계속해서 뿜어져 오는 뜨거운 열기에
견디기 힘들었는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고
벨루몬은 미동도 없이 한성이 있을 자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사! 어찌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오. 당장 조치를 취해야….”
“쉿.”
다급하게 소리치는 타우한과 달리 벨루몬은
입에 앙상한 뼈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한성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벨루몬에게 뭔가 생각이 있으리라 판단한 타우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한성이 있는 곳만을 바라보았다.
1초가 마치 억겁(億劫)과도 같았던 시간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벨루몬의 만면에 웃음 비슷한 것이 지어졌다.
“됐다!! 됐어!!! 크하하하하하하하.”
벨루몬이 크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창문이 활짝 열림과 동시에
수증기가 빠른 속도로 밖으로 휘몰아쳐 나갔다.
수증기의 밀도가 어찌나 빽빽했던지,
수증기가 모두 빠져나가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수증기가 모두 빠져나가자 한성이 모습이 보였다.
평온한 표정이었고, 얼어 붙어있던 흔적들은 온데간데없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한성의 몸 전체가
달아오른 숯이라도 된 것마냥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몸 안의 남아있던 냉기가 마저 빠져나오는 듯
수증기가 피식거리며 미약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군 괜찮소?!”
“….”
타우한의 애타는 외침에도 한성은 묵묵부답이었다.
“…주군?!”
“조용히 해라. 곧 눈을 뜨실 테니.”
벨루몬의 차갑고 음울하던 음성이
웬일로 약간 밝고 들떠있음을 느낀 타우한이었다.
“군사 설명을 좀 해주시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오?!”
“멍청한 녀석. 보고도 모르겠느냐.
주군께서는 방금 한 단계 더 진보하셨다.
죽음과도 같은 혹한을 이겨내시고 원하는 바를 이루셨다 이 말이다.”
핀잔을 주면서도 벨루몬의 얼굴에는
웃음 비슷한 것이 떠날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내 정신 좀 보게. 주군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후후….”
벨루몬이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부서졌던 가전 집기며
수증기에 축축해진 벽지가 모두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이… 이게 무…슨?”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타우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한성의 몸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뼈들이 부러졌다 붙었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며
전투에 최적화된 형태로 새로이 재구성되어 자리 잡았다.
쩌저저저적.
이번엔 한성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
타우한은 눈앞의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빠져나올 것 같이 커진 두 눈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고,
벨루몬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팍.
팝콘 튀는 소리와 함께 갈라진 한성의 몸이 와사삭 부서져 내렸고
그 아래에 새로운 한성의 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에 꿈틀거리는 강인한 근육까지.
전보다 근육의 밀도는 더욱 빽빽해졌고 조직은 더 단단해져 있었다.
부서져 나갔던 손가락도 재생되어 제 모양을 되찾았다.
“푸후우우.”
기나긴 침묵 끝에 한성이 눈을 떴다.
[업적 : 환골탈태가 주어졌습니다.]
[업적 : 한서불침(寒暑不侵)이 주어졌습니다.]
“주군!”
타우한이 울먹거리는 큰 눈으로 달려와 한성을 껴안았다.
덩치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껴안았다기보다는
타우한의 털에 한성이 파묻혔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주군. 성취를 감축드리옵나이다.”
벨루몬 또한 그런 타우한을 비난하지 않고
부복하며 한성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 비슷한 것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만. 그만. 숨 막힌다. 타우한.”
한성이 가볍게 톡톡 타우한의 팔을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타우한이 품에서 한성을 꺼내(?)
한성의 몸 이모저모를 살폈다.
“괜찮다. 괜찮아.”
엄마와도 같은 타우한의 보살핌에 한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난 주군이 꼼짝도 없이 죽는 줄 알았소!”
“주군. 당당히 이겨내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후후후. 그래. 뭐가 어찌 되었든 고맙다.”
한성은 상태창을 열어 새로 얻은 업적을 살폈다.
[업적 : 환골탈태 (SS) 2/3]
· 뼈와 근육이 재조직되는 고통을 이겨낸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 전투에 최적화된 몸을 형성.
‘환골탈태가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사경(死境)을 헤맨 보람이 있구나.
그러나… 하나가 더 남았다. 이를 또 겪어야 하다니… 그건 좋지 않군.’
[업적 : 한서불침 (SS) 1/2]
· 한기와 열기의 고통을 이겨낸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 열기와 냉기에 대한 내성이 극한으로 강화, 열기와 냉기에 면역.
‘드디어 얻었나… 후우… 그나저나 하나의 조건이 더 남았구나.
냉기를 이겨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열기와 관련된 것이겠지.
이 또한 환골탈태와 이어진 것일 테고.’
한성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또 한 번 달라진 자신의 몸을 살폈다.
한층 강해진 육체에는 파도와 같은 마력이 유유히 흘렀고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새로운 몸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한성이 벨루몬을 불렀다.
“벨루몬.”
“하명하소서.”
“허상 결계를 열어라.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으니.”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