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화
* * *
한성이 손을 들어 눈에 대고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눈 속에서 뭔가 튀어 올라 한성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스 트롤이었다.
악명 높은 녀석들임에도 녀석들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이름의 색은 초록이었다.
일반적으로 게임에서 몬스터의 이름이 녹색이라는 것은
캐릭터와 몬스터의 레벨이 유사함을 뜻했다.
같은 B급 게이트인데도 이리 차이가 난다는 것은
한성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뜻이리라.
기존의 트롤들이 진한 녹색의 피부를 가진 것에 비해
아이스 트롤은 파란 눈에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진화와 적응의 결과였다.
숲에서 살던 녀석들이 밀려와 이곳으로 정착했을 것이고,
세대를 거쳐 눈과 같은 피부색으로 진화하게 되었을 것이다.
녀석들은 피부색 외에도 기존의 트롤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피부의 두께였다.
극지방에 살다 보니 기온에 적응해야 했고
자연스레 피부층이 두꺼워진 것이었다.
“쿠와아아아악!!!!”
쿠궁! 쿠궁! 쿠궁! 쿠궁!
설산이 크게 울릴 정도로
뛰어오는 녀석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빠른 기동을 위해 네 발로 뛰어오는 그 모습은
마치 한 무리의 곰 떼와도 같았다.
녀석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한성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녀석들은 역시 거대했다.
신장도 3미터는 가뿐히 넘어 보였고
두꺼운 피부, 길게 자란 털은 전설 속 동물 예티를 연상케 했다.
녀석들의 등에는 나무로 만든 둔기나
솜씨 좋게 뼈를 깎아 만든 창과 몽둥이가 매여 있었다.
“치명적 일격.”
[스킬 : 치명적 일격이 발동.]
[35초간 공격력과 공격속도, 관통력이 증가합니다.]
쉭.
“쿠악.”
가장 먼저 한성에게 달려든 녀석의 목에 나이프가 날아가 박혔다.
녀석의 단단한 근육은 찢겨나가다 못해 뜯겨졌고
힘을 이겨내지 못한 녀석의 대가리는 떨어져 내렸다.
뒤에서 다가오는 녀석들은 동료가 죽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겁내거나 놀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분노한 듯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왔다.
다가오는 녀석들에 한성의 나이프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두꺼운 피부도 한성에게는 별다른 소용이 없어 보였다.
두부 잘리듯 녀석들의 대가리가 잘려나갔고 가슴이 뚫려 나갔으니까.
일 열에 서 있던 녀석들이
한성의 나이프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져 내렸다.
후열에 있던 녀석들 또한,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성 하나만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녀석들이 먼저 죽어 버린 트롤들의 시체를 지나친 순간.
‘그림자 이동’
녀석들의 사체에서 늘어진 그림자로
한성이 피어나 이, 삼열로 뛰어오는 녀석들의 뒤를 쳤다.
눈앞에 있던 먹잇감은 사라져 버렸고,
뒤에선 동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상황.
놀란 녀석들이 다시 등을 돌려 한성에게로 뛰어갔지만,
그럴 때마다 한성은 나이프를 쏘아 대거나
그림자 이동으로 녀석들의 뒤를 점해 목과 배를 꿰뚫었다.
빠르게 공수를 전환하며 이리저리 찌르고 쏘아내는 한성에
녀석들은 하나둘 죽어 나갔고,
순식간에 순백의 눈밭은 녀석들의 초록색 피로 물들어갔다.
‘흠….’
너무 쉽게 일이 풀리자 한성은 늘어난 자신의 완력과
새로 구상한 자신의 초식도 시험해 볼 겸
다가오는 몇몇 녀석들을 그대로 맞이했다.
“크아아아악.”
쾅!!!
순식간에 한성과 거리를 좁힌 녀석들이
재빨리 등에서 몽둥이와 둔기를 꺼내 한성을 내려쳤다.
‘…허…?’
녀석들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녀석들에게 스킬을 사용 한 것도 아니거니와
마비 독을 바른 것도 아니었음에도
녀석들의 움직임은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치명적 일격의 스킬사용 시간이 이미 끝난 상황임에도,
녀석들의 움직임은 느릿느릿했다.
한성도 녀석들이 자신보다 약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맨손으로 센티페드까지 박살낸 한성에게
이 정도 수준의 마물들이야 숨 쉬는 것보다 가벼울 테니까.
하지만 분명 얼마 전만 해도 같은 B급 게이트의 졸개 마물인
보아 뱀을 잡는 데도 숨을 헐떡였는데
지금은 숨이 차기는커녕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스킬은 무슨….
하다못해 한성이 만든 초식의 기본 연결 동작조차도
다 받아내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녀석들을 보며
한성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너무 강해진 것인가 녀석들이 약한 것인가.
트롤들의 가공할만한 회복력도 한성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재생할 틈도 없이 머리가 잘려나가고 심장이 꿰뚫렸으니까.
덕분에 한성은 지금 상대하는 마물들이
B급 게이트에 출몰하는 마물이 맞나 의심할 정도였고
성체가 아니라 아직 어린 마물이라 그런가 하며
혼자 별생각을 다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성이 자신의 강해진 힘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한성에게로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날아왔다.
푸확.
한성이 재빨리 피한 자리에는
운석 마냥 큰 돌덩어리가 정확하게 꽂혔다.
워낙 눈이 두꺼웠기에 땅을 울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고
분화구처럼 큰 구멍만 났을 뿐이었다.
후로도 계속해서 집채만 한 바위는
한성을 노리고 정확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래 봐야 지척에서 쏘아진 수준의 속도도 아니었고,
궤적을 그리며 천천히 날아오는 정도였기에
맞아주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흠. 꽤나 정확한 데? 제법이야 아주.
마력 파장이 느껴지지 않은 걸 보니 스킬을 쓴 건 아니고
그 말인즉슨 순수하게 힘으로만 던졌다는 소리인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무식하구나 진짜.”
한성이 중얼거리며 돌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오.”
바위는 한성이 있는 산 주변이 아닌
건너편의 산꼭대기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거리는 꽤나 멀었다. 1km는 돼 보였으니까.
그 정도 거리에서 집채만 한 바위를
꽤나 높은 정밀도로 던지는 녀석이라면
자신과 힘겨루기를 할 정도는 되리라 생각한 한성이었다.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녀석의 주변에는 졸개들이 여럿 포진해 있었다.
우두머리 녀석은 키와 덩치가 졸개들에 비해
세 배 내지는 네 배 정도 되어 보였고,
뿜어내는 기세도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역시 보스 몬스터의 수준인가.
게다가 지능도 높은 편인 듯했다.
자신이 직접 먹잇감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을 먼저 보내어 먹잇감의 시선을 끈 뒤
자신은 안전하게 원거리에서 바위를 투척해
사냥감을 사냥하는 방식을 쓸 정도였으니까.
한성의 발아래에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트롤들이
녀석이 보낸 선발대이리라.
저곳이 본진이겠구나 싶어 생각을 마친 한성이
은신을 시전한 뒤, 그림자 이동으로 녀석들에게 몸을 옮겼다.
* * *
“보고 드리겠습니다.
현재 F급 게이트 20개 모두를 3분 32초 만에 공략했습니다.
예. 저…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액션 캠에 찍힌 영상을 보시는 게 이해가 더 빠를 듯합니다.
예. 이한성 헌터는 현재 B급 게이트를 공략 중에 있고
그의 수하가 E급 게이트를 모두 공략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알고 계신 리치입니다.”
현철이 상부에 공략 사항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 동안
벨루몬은 게이트에 풀어 놓은 데스나이트 20기와
스켈레톤 100기를 불러들였다.
벨루몬의 앞에 정렬해 있는 데스나이트와 스켈레톤은
군기 가득한 군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딱.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데스나이트와 스켈레톤들이
벨루몬의 앞에 사체와 마력석 등의 부산물들을
모조리 가져와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이에 벨루몬은 차원을 열어
부산물들을 모조리 아공간 안에 쌓기 시작했다.
이를 넋 놓고 쳐다보던 현철에게
벨루몬이 다가와 조금 짜증 난 듯 현철을 불렀다.
“인간.”
“ㅇ… 예?!”
“다음 게이트를 안내해라. 주군께서 오시기 전에 공략해야 한다.”
“ㅇ…예. 여… 여기 있습니다.”
김현철이 손을 떨며 게이트의 좌표를 건네주었다.
이를 홱 하고 채간 벨루몬은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술식의 계산을 모두 완료한 듯 차원을 열어 게이트로 다가갔다.
“따라라.”
“…예.”
벨루몬이 차원을 열자 10개의 게이트가 보였다.
김현철이 건네준 E급 게이트 10개가 그것이었다.
딱.
다시 한번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20개의 조로 나누었던 데스나이트와 스켈레톤들이
다시 10개의 조로 일사불란하게 정렬한 뒤
10개의 게이트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봐 인간.”
“예… 예 말씀하세요.”
“이 등급의 게이트를 최단기간으로 깬 자의 기록이 얼마냐?”
“예…?”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저기 걸어가고 있는 스켈레톤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벨루몬의 안광이 번뜩였다.
“아… 아닙니다. 지금 찾아보겠습니다.”
현철이 식은땀을 흘리며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1… 19분 45초입니다.”
“그래…? 그럼 오늘부로 그 기록은 깨질 것이고
그 기록에는 주군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다. 크하하하.”
벨루몬의 안광이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한성아 빨리 와… 얘 너무 무서워….’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김현철이었다.
* * *
“쿠아악?”
“쿠악.”
“쿠이익.”
산 정상의 고원에는 사라진 한성을 찾기 위해 분주히
눈을 돌리는 트롤들로 가득했다.
수는 약 20~30여 마리쯤 돼 보였다.
한성이 이미 죽인 트롤들의 숫자를 감안하더라도
녀석들의 수는 일반 트롤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보통의 트롤들이 부족 단위로 생활하며
약 100~200에 가까운 무리를 이루고 사니까.
그도 그럴 것이 척박한 환경이라 번식이 쉽지 않았고
번식에 성공한다 해도 먹이가 풍부하지도 않은 데다
살을 에는 한파를 이겨낼 정도로 강인한 개체가 아니면
성장하는 도중에 죽어 버리니 그 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스 트롤들을 한 마리라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극한의 환경을 이겨내고 성체로 자란 아이스 트롤 하나가
일반 트롤 열 마리만큼이나 강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척박한 설산에 나타난 인간은 녀석들에게 귀한 단백질이자
좋은 먹이로 인식될 테니까.
돌덩어리를 던져대던 트롤들의 우두머리 피린은
목표하던 한성이 사라지자 이를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은신을 하고 그림자 이동으로 사라져 버린 한성을
녀석이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력에 민감한 몬스터도 아니고
무지막지한 회복력과 무식한 근력을 가진 게 다였으니까.
그렇다보니 피린을 비롯한 휘하의 부하 트롤 녀석들은
은신을 한 채 뒤에서 자신들을 보고 있는 한성을 알아채지 못했다.
약 5미터는 될 법한 키와 근육질의 몸,
두껍다 못해 빵빵하기까지 한 피린의 피부를 보고도
한성은 긴장은커녕 녀석을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흠… 흑월난무까지도 필요 없고
그냥 격전의 어금니 몇 번 찔러주면 기뻐서 춤출(?) 정도 같은데….’
‘아냐. 잔챙이부터 처리하고 보스 놈이랑 한번 힘을 겨뤄볼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하던 한성이 생각을 정리한 듯
걸터앉았던 바위에서 일어나 녀석들에게로 다가갔다.
한성의 손에 10개의 검은 그림자가 피어올랐고
이내 그것들은 투척 나이프의 모습으로 변했다.
“비뢰(飛雷)의 술.”
나이프들이 한성의 손을 떠나 공중에 떠올랐고
이내 한성의 주위를 어지러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이.”
“크륵?”
한성의 기척을 들은 트롤 하나가
뒤돌아 본 순간 녀석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이와 동시에 한성의 은신도 해제되었다.
[은신이 해제됩니다.]
“까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