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 * *
“벨루몬.”
“하명하소서.”
어둡고 음침한 벨루몬의 목소리에
타우한이 기겁하며 황급히 품에 손을 넣었다.
품에서 손을 꺼낸 그의 손에는 어느새
황금빛 찬란한 기운이 어린 토템이 들려 있었다.
“이 위험한 힘은 무엇이오!?”
그런 타우한을 보고 한성은 웃을 뿐,
질문에 대한 답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준비는?”
“이미 끝마쳤나이다.”
“가져와.”
“예.”
공간이 일그러지며 벨루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 망자의 왕…?! 도… 도망가시오!!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막겠소. 어서?!”
타우한이 한성을 붙잡아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소리쳤다.
“여기서부터는 한 발짝도 못 간다. 이놈!!”
타우한이 품에서 꺼낸 토템을 땅에 박아 넣으려는 순간,
한성이 웃으며 이를 만류했다.
“적이 아니다. 네 동료가 될 자다. 뭐 망자의 왕은 맞지만.”
“주군… 이제 그런 이명은 필요 없습니다.
왕은 제가 아니라 주군이십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하시나이까.”
벨루몬이 황급히 한성의 말을 받아 이를 부인했다.
“파사(破邪)의 힘인가. 상당히 불쾌한 힘이군….
첫 만남부터 이리도 무례할 수가 있나. 치워라. 죽기 싫으면.”
빛이 새어 나오는 토템을 보며
벨루몬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멍하니 벨루몬을 쳐다보던 타우한이 그의 말에
황급히 불어넣던 기운을 멈추었고 토템을 다시 품에 넣었다.
“다… 당신 리… 리치 킹을 수하로 둔단 말이오…?”
놀란 얼굴의 타우한이 말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당신…?”
벨루몬의 안광이 불타올랐다.
“말을 높여라. 네놈 따위가 함부로 말을 할 분이 아니시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주군께 예의를 갖추지 않고 말한다면
내 직접 네놈의 혀를 잘라낼 것이다.”
한성에 대한 타우한의 높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벨루몬이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그만. 그만해라 벨루몬.”
“그러나 주군. 주군의 위엄이 깎이….”
“그만하라 했다.”
“…지엄하신 왕의 명을 따릅니다.”
“줘.”
“예. 주군.
자. 받아라.”
마음에 차지는 않는 듯 벨루몬의 표정은 퉁명스러웠고
타우한에게 마력석을 던지다시피 건네주었다.
“읏… 이게 무엇이오…?”
“세상과 세상을 잇는 마법이 새겨진 마력석이다.
쉽게 말해 내가 사는 세계와 이곳을 연결할 수 있다는 뜻이지.
벨루몬이 내 명에 따라 널 위해 만든 것이고.”
“그 말은…?”
“그래. 언제든 너의 부족들에게 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한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정말이오?!”
“와!!”
벨루몬의 마력에 놀라 뛰어나온
부족원들이 한성의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
“사용 방법을 알려줘야지. 벨루몬.”
“예. 주군.”
“멍청한 타우렌을 위해 쉽게 만들었다.
그저 마력을 흘려 넣으면 된다.
너 또한 주술사이니 그 정도는 할 줄 알겠지. 해봐.”
“아… 알겠소.”
후웅….
타우한이 마력을 집어넣자, 마력석이 빛을 내며 허공에 떠서는
금세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
“오오… 이것은….”
“그다음. 마력을 회수하면 다시 마력석의 형태로 돌아올 게다.
잃어버리지 마라. 또 만들기 귀찮으니.”
“명심하겠소. 고맙소.”
“쳇.”
벨루몬의 말대로 마력을 회수하자 게이트는 사라지고
타우한의 손에는 마력석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딱.
한성이 손을 튕겼다.
쿵.
“데스나이트?”
그랬다. 데스나이트였다.
한철에게 붙여 준 것과 같은 데스나이트 두 기가
한성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어 기사의 예를 표했다.
녀석들 역시 이마에 검은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성이 입을 벌리고 있는 타우한에게 말했다
“네가 없을 경우 널 대신할 경비병이다.
이 초원에서는 이 녀석을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고
있다 해도 내가 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막아 낼 것이다.
별일 있으면 녀석이 내게 알려줄 것이고.”
한성이 고개를 돌려 데스나이트에게 말했다.
“너희의 임무는 이 마을의 주민들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것이다. 적을 배제하고 이들을 위해 일하라.”
데스나이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필요에 따라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도 멍한 표정의 타우한을 보며 한성은 싱긋 웃었다.
“초원 골짜기 부족은 모두 들어라.
도움이 필요하면 지체 없이 저 녀석들을 불러라.
그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녀석이 그대들을 도울 것이다.
그대들 또한 이제 내 수하이자 가족이나 마찬가지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도록 하고.”
“…고… 고맙소… 당신은 대체….”
“주군이라 칭하라. 감히….”
벨루몬의 안광이 불타올랐다.
“괜찮다니까.”
“안 됩니다. 주군.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벨루몬의 표정이 단호했다.
눈치를 보던 타우한이 재빨리 말했다.
“아…알겠소 주군이라 부르겠소.”
“진즉에 그랬어야지.”
이제야 만족한 듯 벨루몬이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고… 고맙소 주군. 이 은혜를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별거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그럼… 계약을 시작하지.”
[스킬 : 복속의 인을 발동합니다.]
타우한에게도 시스템의 알림이 들리는지
순간 멈칫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한성의 반응에
타우한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타우렌 대주술사 타우한’이 ‘이한성’에 복속됩니다.]
한성의 표식인 검은 불꽃 모양의 문양이
타우한의 뿔에 새겨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주군.”
“나야말로.”
싱긋 웃는 한성과 타우한이었다.
“흠… 혹시 이 땅이 너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나?”
“아니오. 그저 외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쉽고
먹을 것을 구하기 쉬워서 여기 위치한 것뿐.
별다른 가치는 없소. 어찌 묻는 것이오.”
“너희 부족 전부를 내가 사는 곳으로
옮기려고 생각 중이어서 말이지.”
“…그… 그래도 되오…?”
“어. 된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좀 기다리도록.
준비가 되면 모두를 데리러 오겠다.”
아무런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한성을
본 타우한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허…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주군 같은 존재는 본 적이 없소이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벨루몬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나랑 벨루몬 먼저 저쪽으로 넘어가 있겠다.
부족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바로 넘어오도록.”
“예. 주군. 빨리 정리하고 주군께로 가겠소.”
“그래.”
“가자.”
“예.”
벨루몬이 게이트를 열었다.
“너희도 조만간 보자.”
“네. 주군!”
벨루몬의 말을 들었던지,
타우렌 꼬맹이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귀염성 있는 녀석들이군.”
꼬맹이들이 한성을 부르는 칭호가 마음에 들었던지
벨루몬이 흐뭇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후후. 그래. 나중에 보자.”
미소를 짓던 한성이 꼬맹이들에게 손을 흔들고는
먼저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벨루몬이 게이트를 빠져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타우한에게 경고를 날렸다.
“주군께서는 괜찮다 하셨지만, 난 아니다.
다음에 주군을 뵐 때는 말을 똑바로 높이는 게 좋을 거다.
그렇지 않았다간 네놈의 목이 어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벨루몬이 타우한을 보며 살벌하게 내뱉고는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슈왁.
“….”
“족장. 위험한 것 같습니다만….”
“괘… 괜…찮을 거다.”
게이트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왜인지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을 거라 생각한 타우한이었다.
* * *
“승객 여러분, 코리아 항공 1583편
뉴욕행 항공기의 탑승을 시작….”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이는 공항 안,
출입국 관리소를 유심히 관찰하는 인물이 있었다.
“치익. 각 팀 보고 바람.”
“치익. 알파 팀 준비 완료.”
“치익. 베타 팀 준비 완료.”
“치익. 감마 팀 준비 완료.”
“치익. 현 위치에서 대기할 수 있도록.”
“치익. 수신 완료.”
긴장된 표정으로 무전기에 명령을 지시하는
사람은 박 실장이었다.
삐빅.
박 실장이 전화를 들었다.
“어. 보고해.”
“예. 라이언 길드 측에 문의해봤는데,
그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는 것을 보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맞겠군. 그쪽 애들 일하는 방식이 그렇지.
그럼 16시 비행기에 험프가 타고 있는 건 맞아?”
“예. 정보원에 따르면 확실합니다.
그의 은빛 머리칼이나 옷차림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요.”
“…방한의 목적으로 추정되는 건?”
“확실치 않습니다.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치이기도 하고,
자유분방한 자다 보니….”
“…알겠어. 특이사항 있으면 연락해.”
“예.”
삐빅.
라이언 험프.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큰 길드인
라이언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엠페러급의 헌터로
종잡을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유명한 자였다.
딱히 성격이 괴팍하다거나 사나운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에 속을 알 수 없는 자였기에
그의 방한 의도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입국의 목적이 단순히 관광이나
유흥을 위한 목적이라면 다행이겠지만,
한국의 헌터 자원이나 기술을 빼가기 위한 입국이라면
이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하다못해 그가 방한한다는 것을
미리 헌터 협회에 알리기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경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딱히 은밀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를 헌터 협회에 알리지 않고 방한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조용히 관광을 즐기고 싶다거나, 은밀히 처리할 일이 있다거나.
전자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후자라면 일이 커지게 된다.
엠페러급의 헌터가 타국에 간다는 것은
국가의 전력 하나가 움직이는 것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잘못하다간 외교 분쟁이 일어
전쟁으로 번질 수가 있기에 그들의 움직임을 경계해야 했다.
“치익. 타겟 출현.”
“치익. 확인. 위치 고수할 수 있도록.”
“치익. 확인.”
알파 팀의 무전대로 험프의 모습이 보였다.
180의 큼직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
초록색 꽃 남방에 슬리퍼를 신고 선글라스를 낀 은발의 젊은 남성.
누가 봐도 험프였다.
“sir.”
박 실장이 긴장된 표정과 목소리로 험프에게 다가가 말했다.
“…?”
험프가 선글라스를 내리며 박 실장을 쳐다보았다.
“Could you….”
“괜찮아요. 한국어는 꽤 할 줄 아니까.”
놀랍게도 파란 눈에 은발을 한 미국인의 입에선
유창한 한국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 네. 실례가 많았습니다.
잠깐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흠… 귀찮은데 어쩌지.”
“…절차라는 것이 있기에… 험프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걸 안 하려고 협회에 연락도 안 하고 몰래 왔는데….
아 거 참… 들켜버렸네. 귀찮아. 얼른 끝내줘요. 바빠.”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쪽 부하들인 것 같은데,
피 보기 싫으면 철수시켜 줄래요? 누가 쳐다보는 거 싫어해서.”
험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흡….’
험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순간 숨이 막힌 박 실장이었다.
“하하. 장난이에요 장난. 겁먹기는. 어디로 가요? 저기?”
아무렇지 않게 살기를 감추고 앞장서는 험프를 보고
박 실장은 그제야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알려진 것보다 더 위험한 자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