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라스트 엠페러-50화 (50/336)

050화

* * *

“…이 일에 대해서 충분히 해명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못하면 협회와 정부에 이를 회부해서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어요.”

애림이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며 붉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개소리하지 마. 해명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지.”

“이한성 헌터! 말조심하세요!!”

김애림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쉴드가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그게 사실이었다면, 당신들은 여기 있으면 안 됐어.

집무실에서 우아한 옷차림으로 편히 앉아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게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몬스터에 맞서야 했다고. 알아?”

“윽….”

한성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살기에

설화가 놀란 듯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을 흘렸다.

살기는 점점 더 짙어져만 갔고 짙어져 가는 한성의 살기에

설화와 애림은 살갗이 저릿함을 느꼈다.

“언제 투입해야 길드의 손해가 적고,

어떻게 해야 길드의 이미지가 좋아질지를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계산하고 각도기로 각을 재는 게 아니라!!

전 길드원을 투입해 단 하나의 생이라도 구하기 위해

개지랄이라도 해야 했다고. 알아?!!”

“….”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는 한성의 말에 설화의 얼굴이 붉어졌고,

애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묻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당신에게는 쉴드의 장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건가?”

“…당신의 말이 다 맞다 해도 그게 어때서요?”

“뭐?”

뻔뻔하고 대담한 애림의 말에 한성은 화가 나다 못해 기가 막혔다.

“난 한 집단의 장이고 대표입니다. 많은 이를 책임져야 하죠.

내 지위와 이익을 보존할 수 있고 집단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면… 난 그게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그게 설령 국민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해도요.”

애림이 말했다.

“…그래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생의 무게보다 돈과 훈장의 무게를 더 무겁게 여기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니까.”

“뭐요?! 이한성 헌터! 말조심하라 했을 텐데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더 이상 가만 안 있습니다.”

“가만 안 있으면…?”

한성에게서 마력이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설화는 이미 남아 있는 모든 마력을 짜내

한성의 살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지 행동불능상태가 되었다.

애림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상당한 마력을 할애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버티기 힘든 듯 보였다.

‘미친… 괴물이 아닌가.’

그녀의 표정에는 한성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어려 있었다.

“다시 한번 묻지.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건데?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크윽….”

애림이 급히 머릿속으로 전력을 계산해 봐도

눈앞의 성난 괴물을 이길만한 자원은 길드에 없었다.

아니, 길드 전원이 덤빈다 해도 그를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맞서 싸운다 해도

잠깐 막아낼 수는 있을지언정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후우….”

한성이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커헉… 컥… 크…헉… 헉….”

설화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찢어 죽이고 싶지만….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진 않으니 그건 참도록 하지.”

한성이 마치 더러운 것을 봤다는 얼굴로 내뱉듯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당신이 거절 못 할 거래를 하나 제안하지.”

“거래…?”

한성이 품에서 USB 크기의 뭔가를 꺼내 들었다.

삑.

“그게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그게 설령 국민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해도요.”

삑.

“녹음기야. 당신과의 대화 내용이 모두 녹음되어 있지.”

“…이 자식….”

애림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단순히 당신을 죽이는 것보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가 끌어내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더 즐거울 것 같아서 준비한 선물이다.”

“…거래 내용이 뭡니까.”

애림이 벌게진 얼굴로 물어왔다.

“지금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주겠다.

아이템과 사체, 마력석 또한 모두 쉴드에 양도하겠다.

원한다면 기자회견에도 친히 나가주마.

그렇게 좋아하는 명예도 모두 당신에게 주지.

대신, 이것으로 우리 던전 공략 계약은 끝이다.

또 한 가지. 삼촌을 치료해라. 완벽하게.

만일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난 이 녹음기를 언론사에 뿌릴 것이다.”

“…….”

고압적인 한성의 태도에 반발심이 드는 애림이었지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 봐도 너무 남는 장사였다.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에게 모욕을 당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게 대수랴. 이번 건만 무마되면 입지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고,

길드 내 물자와 재원은 넘쳐나게 될 텐데.

다만 한성의 침입과 모욕에 대한 보상이나 질책 없이

가벼이 승낙하게 되면 길드의 장으로서 면이 서지 않기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애림이었다.

“…내가 저 사람을 치료하지 않겠다면?”

“아니? 치료해야만 할 거야. 안 해도 죽고 못 해도 죽는다.

약속하지. 절대로 곱게 죽이진 않겠다.”

애림은 서슬 퍼런 한성의 태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뭐지…? 두려워한다고…? 내가? 저 애송이를…?’

“대답해라. 할 건지 말 건지.”

“…어차피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죽일 거지 않나요?”

씨익.

“역시… 머리가 좋아.”

“알겠습니다. 계약하시죠.”

“좋아. 나중에 가서 딴말하거나 말장난을 쳐도 죽는다.

당신이 만약 계약을 실행하지 않고 도망한다면

그 어딜 가든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찢어 죽여주지.

그러니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마.”

“….”

“삼촌한테 장난질 쳐도 죽어. 알겠어?”

“…알았어요.”

“…좋아. 치료를 당장 시작해라.

계약이 이행된 것이 확인되면 녹음기를 보내도록 하지.”

스르륵.

한성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변해 그림자로 스며들어 갔다.

비틀.

한성이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듯 애림이 비틀거렸다.

급히 이를 부축하는 설화.

“괜찮으세요?”

“…괜찮아.”

한차례 폭풍이 일고 간 집무실을 바라보며

애림이 분한 듯 중얼거렸다.

“이 수모는… 반드시 갚겠다. 애송이.”

* * *

“끼에에에에에엑.”

퀸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상태가 나빠져 가는 킹을 보금자리로 데려가기 위한 시도가

조그만 것의 방해로 인해 번번이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킹이 입은 상처는 잘 먹고 잘 쉬다가

탈피 한 번 하고 나면 다 사라질 수준의 것이지만,

이는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는 가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

만일 퀸이 혼자였다면 녀석에게서 도망을 치든

쪼그만 녀석과 싸우든 할 테지만 지금 퀸은 킹을 보호해야 했다.

따라서 이동하거나 공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간간이 찔러오는 녀석의 공격 또한

단순히 무시하기에는 꽤나 매서웠다.

단단한 자신이라면 몰라도 부상당한 킹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므로

행동에 신중을 기하는 퀸이었다.

푸화아아아아악!

‘지치지도 않나?’

선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화염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다.

체내에서 생성되는 인화성 물질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일부러 공격을 유도한 것이었다.

선우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쏘아지는 화염의 양도, 지속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탁.

“키에에에에엑!”

또다시 선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바짝 약이 오른 퀸이 울부짖었다.

‘…음…?’

건물 옥상에서 퀸을 공략할 루트를 찾던 선우의 눈에 뭔가 포착되었다.

꾸물거리며 다가오는 센티페드의 파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뭐…지…?”

“키에에에에에엑!”

“…실패한 건가….”

아무리 하급 몬스터라지만 그 수가 수백 수천을 넘어간다면

그 위험도나 헌터가 가지게 되는 심적 부담감은

이전과 차원이 다르게 커지게 된다.

지환은 육체를 사용하는 전투형 헌터가 아니라

마력을 치환해 원소를 다루는 마법 계열 헌터이다.

그렇다보니 운용할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고

마력이 떨어지면 그저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수많은 녀석들을 막기에는

마력의 양이 그리 많지 않은 지환에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으리라 생각한 선우였다.

“지환아. 어떻게 된 거야. 실패냐?”

선우가 이어 마이크를 눌러 물었다.

“아냐. 지금 뭔가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해.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가서 얘기해. 좌표 찍어줘.”

“알았다.”

방어구 가슴팍에 달려 있는 전자기기 장치를

만지작거리자 삑 소리가 들렸다.

이는 헌터들이 고립되거나 갇혀 있을 때를 대비해

자신의 위치를 팀원이나 협회에 전송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일종의 GPS 장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콰자작.

선우가 있는 건물의 옥상 바로 옆으로 토벽 하나가 솟구쳐 올랐다.

탁.

가볍게 토벽에서 점프한 지환이 토벽을 허물고 선우에게로 다가왔다.

“나 왔어. 형.”

“그래. 다친 데는 없냐.”

지환의 안부를 물어오는 선우의 말이 퍽 따뜻했다.

“나? 아유 걱정도. 괜찮아.”

“그래. 뭐가 이상한데?”

“자세히 보면 녀석들이 좀 달라.”

“다르다고?”

“녀석들 눈을 보면 빨간 놈이 있고 파란 놈이 있어.”

“…그런데?”

“원래 파란 놈들은 없었단 말이야.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갑자기 생겨나더니

빨간 눈을 한 녀석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더라고.

그것도 숨어 있는 녀석들까지 싹 다 찾아내서.”

“…세력 다툼일 확률은?”

“아냐. 그건 아닌 것 같아.

빨간 눈의 센티페드들은 물려 죽었으면 죽었지.

파란 눈의 녀석들을 공격하지는 않았거든.

적이라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얘기야.”

“…흠….”

“이상한 건 그 파란 눈의 센티페드들이

빨간 눈의 센티페드 외에는 어떤 것도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이야.

대피하는 시민도 군인도 공격하지 않았어.

심지어 공격을 퍼붓는 나에게조차도 반격을 하지 않았단 말이지….”

“그래? 확실히 그건 좀 이상하군….”

“근데 더 이상한 건 빨간 녀석들이 죽어갈수록

파란 녀석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야.”

“기생형 몬스터일 가능성은?”

“뭐 마인드 컨트롤러? 아냐. 그건 아닌 것 같아.

걔네는 강한 숙주에 기생하려 하지 약한 애들한테 기생하려 안 해.

또 개체 수가 워낙 적은 애들이잖아.

이제까지 사냥한 거 다 모아도 저 정도는 안 될걸.”

“그럼 강령술(降靈術)을 사용하는 헌터나 마물일 가능성은?”

“처음에는 나도 그걸 의심했어.

벌레의 움직임이나 행동치고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으니까.

그런데 강령술이 맞다 해도 이 정도 규모의 스킬을 쓸 수 있는

헌터가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형은 아는 사람 있어? 난 없어.

있었으면 우리가 벌써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몬스터라 해도 우리가 느꼈겠지?”

“…그도 그렇군.”

“덕분에 내가 할 일이 없어지기는 했는데….

이걸 좋아해야 하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흠… 우선 지켜봐야겠지.”

“알았어. 아 참 킹이랑 퀸은?”

“킹은 점점 상태가 악화되고 있고,

퀸은 제 서방 지키기 급급하다. 뭐 퀸도 곧이다.”

“역시 우리 형이야.”

지환의 호들갑이 싫지만은 않은 선우였다.

“형이잖냐.”

“크… 가끔씩 이런 것만 아니면 참 멋질 텐데.”

지환의 농담에 선우가 씨익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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