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 * *
쾅!!!!!!
끼익.
킹의 몸만큼이나 큰 흙 손 두 개가
벼락처럼 일어 킹의 몸을 강하게 압박했다.
깍지 낀 두 손 사이에서 킹은 옴짝달싹하지 못했고
생각지도 못한 강한 압박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끼에에에에엑!”
뭔가 불안함을 느낀 킹이 자신을 압박하는 손을 물고
독액을 쏘아 내고 발버둥 치며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다.
녀석의 움직임에 손이 녹아내리고
균열이 생겨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형!! 빨리!! 더 이상 못 버텨!!”
선우의 이어폰에서 지환의 재촉이 들려왔다.
지환의 말대로 킹을 붙잡은 흙 손은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킹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흙 손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지환의 마력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 더 컸으리라.
지환의 재촉에도 언제 건물에서 내려왔는지,
킹의 앞에 선 선우는 느긋하게 칼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얼른!!”
“재촉하지 마라.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니.”
짧게 호흡을 들이마신 선우가 다시 읊조렸다.
“제1격. 용오름.”
선우의 칼끝이 빛났다.
단 두 번의 휘두름
좌하단에서 우상단, 우하단에서 좌상단으로
올려치는 그의 칼은 요란할 것도, 화려할 것도 없는
그저 단순한 베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단순한 베기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검기는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선우에게서 내쏘아진 검기가 심상치 않음을 킹도 느꼈는지
어떻게든 도망치려 발버둥 쳤으나,
지환의 흙 손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키이익!?”
킹은 선우의 공격이 이미 자신의 몸을 지났음에도
자신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자신을 압박하던 흙더미가 부서져 나갔으면 나갔지
자신을 상처 주진 못했다.
“크륵…?”
뭔가 이상했다. 배가 뜨거웠다.
킹은 급히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지만,
여전히 별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음…? 저게 뭐지…?
킹의 희고 단단한 뱃가죽에 실금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실금은 이내 그 기세가 완연해져
X자로 변해 벌어지기 시작했다.
푸화아아아아악!
피가 솟구쳐 올랐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얕았나. 아직도 수련이 부족하군….”
일격으로 끝낼 생각이었던 선우가 아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형!! 빨리 끝내!”
“…알았다.”
지환의 채근에 다시 칼을 고쳐 잡은 선우.
“제2격 태산….”
“끼약 끼약 끼야아아아아악!”
선우의 압도적인 힘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아픔 때문인지 킹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여전히 듣기 싫은 고주파임에는 다름이 없었지만,
이전의 비명 소리와는 뭔가 달랐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달까.
그때였다.
쾅!!
뭔가가 토벽을 쳤다.
쩌적….
토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환과 선우의 눈이 빠르게 게이트를 향했다.
“일 났군….”
“설마…?!”
콰가가강!
두 번째 충격에 토벽은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쿠와아아아아악!!”
무언가가 내지른 소리가 하나의 신호였는지
무너져 내린 토벽 사이로 유충들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껏 밀려 나오던 수의 곱절은 되어 보이는 수였고
그 기세는 성난 파도와도 같았다.
“제기랄….”
지환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퀸인가….”
“쿠와아아아아악!!”
지환의 말대로 무너진 토벽 뒤에는
크게 포효하고 있는 지네 하나가 보였다.
그랬다. 센티페드 퀸이었다.
보통 자이언트 센티페드들은 번식을 마치면
암컷은 새로운 수컷을 찾아 떠나고,
수컷은 남아 새끼들을 기르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데 가끔, 평생을 같이 살며 가족을 이루는
녀석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녀석들인 듯했다.
퀸은 킹에 비해 몸의 길이나 두께가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포션 몇 병 가지고 있냐. 지환아.”
“어? 나 세 병.”
“먹고 가서 유충들 막아. 죽일 수 있으면 더 좋고.
지금 상황에서 막을 수 있는 건 너뿐이다.”
담담히 말하고는 있지만,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선우였다.
“내가 여기서 형 보조하고 있는 게 낫지 않아?”
“…물론 그게 더 편할 수는 있지.
하지만 우리 목표는 보스몬스터를 잡는 게 아니다.
시민들이 대피할 때까지 시간을 벌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거지.
그게 확인이 돼야 맘 편하게 사냥을 시작할 수 있고.
퀸이나 킹보다 걱정되는 건 유충들이다.
유충들이 서울시를 빠져나가 둥지를 틀고,
번식을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다.
내가 녀석들을 붙잡고 있는 동안 넌 유충들을 막아.
이런 일에 제격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니까.”
“…형은?”
“아마 퀸이 곧장 이리로 올 거다. 제 남편 구하러 오겠지.
난 여기서 그걸 막아 낼 거다.”
“….”
“걱정 마라. 무턱대고 싸우진 않을 테니.
네가 다시 올 때까지 최대한 사리며 싸우고 있으마.”
“형 그때까지 혼자서 버틸 수 있겠어…?”
“질문이 잘못됐다. 혼자서 잡을 수 있냐고 물어봐야지.”
씩 웃는 선우와 반대로 지환의 표정은 어두웠다.
선우가 웃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금의 웃음도 아마 지환을 안심시키려 억지로 짜낸 웃음이리라.
“후… 알겠어. 형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그래.”
“…무리하지 마. 알지?”
“오냐.”
“좀 이따 봐.”
“그래. 가라.”
어느새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지환을 바라보며 선우가 중얼거렸다.
“가볼까.”
* * *
게이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역의 한 빌라.
한철에게 할당된 마지막 구역이었다.
1층에서 시작된 불은 위층으로 번져 빌라 전체를 태웠고
쉽게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센티페드 킹이 쓰러진 충격으로
빌라 아래의 지반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거기 누구 없어요?!”
애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철이었다.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위태한 상태임에도
한철은 빌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층에서 4층까지 모든 집의 문을 부수어
갇혀 있거나, 기절해 있는 인원을 찾아냈다.
이를 들쳐업고 병사들에게 인도해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기까지를 몇십 차례.
땀은 억수같이 흐르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으며
체력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주먹에 들어가는 힘이 점점 희미해졌고,
다리도 이제 한철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 층만 더 뒤지면 된다는 생각에 힘겹게 도착한 5층.
쾅!!
“거기 누구 없어요?!”
쾅!!
열한 개의 집 문이 모두 박살 났다.
다행히 모두 대피했는지,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은 하나의 문.
“!%#^[email protected]^”
문 안에서 뭐라 소리가 들려왔다.
쾅!
급한 마음에 앞뒤 재지 않고 날린 주먹.
힘이 부족했는지 현관문은 찌그러지기만 했을 뿐
부서지지는 않았고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쾅!
그대로 발로 차 현관문을 박살 내고 집에 들어섰다.
현관에서부터 안방에까지 불타오르는 화염이 보였다.
“어디예요?!”
“여기예요!!”
화장실이었다.
벌컥.
“살려주세요!!”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여성은 똑똑하게도, 화장실을 대피 장소로 삼고
문을 향해 계속해서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문이 불타오르는 것을 막고, 수막을 만들어
연기가 새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리라.
“됐어요. 이제 안전해요. 나갑시다.”
아이와 엄마를 데리고 화장실 밖으로 나온 한철.
“야 진석아!!! 여기 생존자 두 명 찾았다!!”
한철이 문밖을 향해 소리 질렀다.
“네 아저씨 올라가요!!”
병사의 소리가 들렸다.
짧은 시간 동안 부쩍 친해진 듯,
둘은 서로를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털썩.
다리가 풀린 듯, 여성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 못 걷겠어요.”
“어디예요 아저씨!”
진석이 달려오며 말했다.
“여기다! 마지막 집!”
한철의 말이 제대로 들린 건지,
진석이 빠르게 5층까지 뛰어 올라왔다.
“자 애기 받아. 바로 내려가.
나도 애 엄마 업고 바로 뒤따라갈게.”
“네.”
아이를 소중하게 받아 든 진석이 1층을 향해 내달렸다.
피어오른 화마(火魔)는 집안의 가전이며 집기를 땔감 삼아
계속해서 커져만 갔고, 매캐한 연기가 집안을 가득 채워갔다.
“쿨럭 쿨럭.”
연기를 들이마신 여인이 기침을 토해냈다.
“자 우리도 갑시다. 시간 없어요. 자 업혀요.”
한철이 여인을 향해 등을 보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 어서요. 감사는 나가서 해도 안 늦어요.”
“네.”
대답과 함께 그녀가 업히자 한철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어어어?!”
지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여인을 업은 한철이 복도를 힘껏 내달렸다.
하지만 한철이 뛰어 내려가는 속도보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아저씨!! 뛰어요!!!”
1층에 먼저 도착한 진석이 한철을 향해 소리쳤다.
“에라 모르겠다.”
업었던 여인을 앞으로 돌려 안은 한철이
그대로 복도 밖으로 몸을 날렸다.
곽한철이 뛰어내림과 동시에 빌라는 무너져 내렸다.
간발의 차이였다.
“꺄아아아아악!”
쾅!
등부터 떨어져 내린 한철이었다.
“커헉….”
“아저씨 괜찮아요?!”
쿠구구궁.
빌라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한철과 여인은
무너져 내린 지반에서 한 뼘 앞에 떨어졌다.
운이 좋았다.
“쿨럭…아직 안 죽었다….”
한철이 기침을 토해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우리 아기. 우리 아기 어디 있어요?”
여인은 그 정신에도 아이부터 찾았다.
모성애란….
“여기요.”
여인은 퍼뜩 일어나 진석에게서 아이를 건네받았다.
그제야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해준 한철과
자신의 아이를 구해준 진석이 눈에 들어온 여인이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없이 인사하는 여인을 보며 한철과 진석은 흐뭇하게 웃었다.
“아직 끝난 거 아닙니다. 철수해야죠.”
“치이익. 당소 코끼리라 알리고
D구역 마지막 인원 데리고 돌아갑니다.”
“치이익. 수고했다. 속히 복귀하도록.”
“치이익. 입감완료.”
“가시죠.”
빌라를 나서는 한철과 진석, 여인의 귀에
뭔가가 부서지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쾅….
…콰가가가강.
“게이트 쪽인데…?”
한철이 고개를 돌려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저건…?!”
“치이익 코끼리 코끼리!!”
석진을 찾는 다급한 무전이 들렸다.
“뭐야?”
“치이익 송신.”
“치이익 석진아!! …치이익… 거기로 간다!! …해!!”
무전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질러대는 선임의 목소리는
어딘가 굉장히 다급해 보였다.
게다가 끊겨서 들리는 통에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았다.
“치이익 …잘못들었슴다…?”
“치이익 피하라고 병신아!!”
“에…?”
무전기에서는 치지직 소리만 들릴 뿐
더 이상 선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치이이익… 김 상벼임?”
“쉿!!”
한철이 입에 손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가가가가가각.
멀리서부터 뾰족한 무언가가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희미했다가 점점 커졌고
이내 총탄이 아스팔트를 때리는 소리처럼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센티페드들이 파도처럼 한철들에게로 쏟아져 오고 있었으니까.
“피하라는 게… 저… 저거였나.”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몸이 얼어붙은 여인과 석진이었다.
곽한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