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 * *
끼이이익.
기분 나쁠 정도로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한성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홀(hall)과 홀의 끝에 놓여있는 화려한 왕좌였다.
홀은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조명 장치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천장 샹들리에의 촛불과 벽에 걸린 수많은 횃불들이 다였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홀은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중세 유럽 귀족의 방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패턴의 무늬가
가득 새겨진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창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과
창이 있어야 할 곳에 해골이 그려진 그림만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레드 카펫은 왕좌로 이어져 있었고,
레드 카펫의 양옆으로 검은 철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벨루몬을 호위하기라도 하듯 가득 도열해 있었다.
그 수만 해도 어림잡아 50은 되어 보였다.
2미터는 가뿐히 넘을 키에 꽤나 큰 덩치,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으로 보아 벨루몬의 소환수인 듯했다.
왕좌에는 마력석인지 보석인지 알 수 없으나
형형색색의 반짝이는 물체들로 잔뜩 꾸며져 있었고
이는 화려하다 못해 어지럽고 시끄러웠다.
[어서 오게 낯선 이여.]
한성의 시선이 왕좌의 주인에게 닿았다.
거기에는 해골이 있었다.
해골은 왕좌의 손잡이에 팔꿈치를 올린 채 손으로 턱을 괴고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한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벨루몬인가.’
[망자의 왕 벨루몬]
녀석의 머리 위에 박혀 있는 글자는 선명한 핏빛이었고
황금색의 띠로 둘러져 반짝이고 있었다.
이는 필드 몬스터 중에서도 특수한 개체나
필드 전체를 장악하는 보스급에 해당하는 몬스터임을
뜻하는 것으로 일종의 표시 같은 것이었다.
녀석의 복장은 푸른색 안광을 가진 해골이라는 점만 빼면,
몬스터라기보다는 교황이나 추기경의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녀석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백색의 로브를 걸치고
왕좌 못지않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왕관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보스 몬스터임에도,
외양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없었다.
이전의 녀석들에 비해서 몸집이 작아서 그런가.
하지만 한성은 알고 있다.
이런 인간형 몬스터들이 오히려 더 상대하기 까다롭고,
생각지 못한 변수가 많다는 것을.
녀석은 손가락마다 화려한 반지를 끼고,
목걸이 등의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러나 장신구들은 단순히 치장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는지
장신구 하나하나마다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단순한 장신구는 아니고 아이템인 듯했다.
시전 속도가 느린 마법사들이
마법을 언제든지 시전할 수 있도록
미리 아이템에 캐스팅해 둔 것이리라.
[참으로 흥미롭군. 흥미로워.]
마력에 누구보다 민감한 마법사임에도
벨루몬은 한성의 마력을 쉽사리 읽어낼 수가 없었다.
죽음과 파괴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이 생명체는….’
정신없이 한성을 살피던 벨루몬을 향해 한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초대해줘서 고맙긴 한데 바빠서 너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한 가지 제안을 하마.]
[…제안? 무슨 제안? 한번 들어나 보지.]
한성의 말에 벨루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수하가 되어라. 아니면 죽는다.]
[……? 뭐라고…?]
[말 그대로다.]
[…날 죽이겠다고? 망자의 왕. 불사자 리치를?]
[크하하하하하하하하! 그거 걸작이구만!]
[….]
[재밌군. 아주 재밌어. 하하하.]
[이렇게 크게 웃는 게 얼마 만인지 하하하.]
[그래. 내가 불멸불사의 존재임은 알고 있나?]
그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훔치며 한성에게 빈정거리듯 말했다.
[글쎄… 불멸불사인지는 몇 번 때려보고 죽여 보면 알겠지]
한성이 목을 꺾으며 말했다.
벨루몬의 푸른 안광이 더욱 형형하게 빛을 냈다.
[너는 특별히 죽인 다음 장난감으로 만들어주마.]
[바로 곁에 두고 오래오래 가지고 놀아주지. 후후….]
[너의 혼은 영원히 안식을 얻지 못하리라.]
[할 수 있다면야.]
[퀘스트 : 왕의 친위대]
[망자의 왕, 불사자 리치를 복속시키십시오]
‘두들겨 패면 답이 나오겠지.’
[가라.]
촥.
벨루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옆으로 도열되어 서 있던 갑옷의 기사단이
오와 열을 맞추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
벨루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구석에 있는 무기 거치대에서
대검, 도끼, 창, 방패, 활 등이 날아와 기사단들의 손에 쥐어졌다.
[죽여라.]
“우워어어어억!”
벨루몬의 명에 기사들은 고함으로 대답했다.
“후웁.”
쾅!
다가오는 기사들을 향해 한성 또한 마주 달려나갔다.
탄환처럼 내 쏘아진 한성의 속도와 힘을
대리석 바닥은 견디지 못했고 과자처럼 부서져 나갔다.
기사들은 전투 상황에 익숙해 보였다.
다가오는 한성을 막아내기 위해
방패를 든 기사들이 가장 최전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창을 든 기사들은 사이로 창을 거치해 한성의 진입을 어렵게 했다.
끼기기기긱.
투확!
후방의 진영에서는 수십의 화살이 빠르게 날아왔다.
흘깃 봐도, 화살은 단단한 재질에 굵은 몸체였다.
그 말은 녀석들이 당기는 활과 현의 강도가 강하다는 뜻이고,
이는 곧 녀석들의 완력 또한 상급 몬스터에 육박한다는 뜻이 된다.
‘꽤나 훈련이 잘되었군.’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한성은 여유롭게 피하며 전진했다.
[경고 : 대상 ‘벨루몬’이 ‘악마의 저주’를 시전합니다.]
[업적 :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가 발동합니다.]
[상태이상 ‘공포’, ‘혼란’이 사라집니다.]
‘어쭙잖은 짓을….’
하긴, 가만히 보고 있진 않겠지.
흑마법사의 가장 기본적인 공격 형태는
소환수를 앞세워 어그로와 방어를 맡기고
뒤에서 저주나 마법으로 데미지를 주는 것이니까.
하지만 녀석의 저주는 무위로 돌아갔다.
[…내 힘에 저항한다라… 대단하군.]
벨루몬의 안광이 흔들렸다.
한성과 기사단의 충돌 직전,
한성의 양손에 날카로운 그림자가 어렸다.
‘흑월난무’
소환된 한성의 단검에서 1미터나 되는 검은 칼날이 솟아올랐다.
기사단을 향해 검무를 추듯 한성이 칼을 움직일 때마다,
검기는 어지러이 쏟아져 날아갔다.
들려야 할 금속성이나, 충격파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서걱서걱 소리와 함께,
녀석들의 몸은 조각조각 나 쓰러져 내렸다.
텅… 텅텅텅.
이삼십이 넘던 기사단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아니?!]
벨루몬은 다시 기사단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움찔거리기만 하고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망자의 왕인 벨루몬보다 눈앞의 한성을 더 두려워해
소환당하기를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검기와 한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벨루몬을 향해 묵묵히 나아갈 뿐이었다.
애초에 기사단은 한성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벨루몬에게 가는 길목에 서 있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치명적 일격’
‘격전의 어금니’
[스킬 : 치명적 일격이 발동]
[30초간 공격력과 공격속도, 관통력이 증가합니다.]
단검의 검신에 보랏빛과 검은 그림자가 어렸다.
자신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한성과 흑월난무의 검기들을 보며
벨루몬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의 반지들이 반짝였다.
[‘벨루몬’의 스킬 ‘절대방어’가 시전됩니다.]
녀석의 왕좌 앞에 반투명한 우윳빛의 원형 돔이 생겨나
벨루몬을 감싸고 섰다.
꽝!!
먼저 도달한 검기 하나가 녀석의 방어막에 부딪치자,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이 일었다.
우윳빛의 방호는 좌자작 소리와 함께 금이 가더니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걸레 조각이 되었다.
‘절대방어’라는 이름이 무색한 순간이었다.
벨루몬의 안광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이어서 나머지 검기들이 벨루몬에게로 쏘아져 왔다.
녀석은 급하게 손을 들어 방호를 더 만들어냈다.
[‘벨루몬’의 스킬 ‘절대방어’가 시전됩니다.]
[‘벨루몬’의 스킬 ‘절대방어’가 시전됩니다.]
[‘벨루몬’의 스킬 ‘절대방어’가 시전됩니다.]
[‘벨루몬’의 스킬 ‘절대방어’가 시전됩니다.]
[‘벨루몬’의 스킬 ‘절대방어’가 시전됩니다.]
다섯 겹의 반투명한 방어막이 벨루몬의 앞을 가로막았다.
쾅쾅쾅쾅쾅!
검기들이 연속해서 녀석의 앞을 가로막은 배리어에 부딪쳤다.
마치 망치로 철판을 내려치는 것과 같은 수준의 굉음이었다.
그 충격파로 성 전체가 울렸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시야를 가린 돌가루와 흙먼지가 방을 가득 채웠다.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벨루몬을 지키고 서 있는 절대방어 하나가 보였다.
그러나 그 하나마저도 곧 부서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다.
우윳빛이던 빛깔은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고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거의 투명해져 있었다.
기운을 유지하는 게 고작인 것처럼 보였다.
벨루몬은 자신이 자랑하는 절대방어를 부수어버린
한성에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쉬익.
먼지를 가르고 나타난 한성의 나이프 하나가 방호에 꽂혔다.
콰각.
하지만 그의 방호를 뚫어내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어디서 얕은수를….]
사사사사삭.
벨루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이프의 비가 방호로 쏟아져 내렸다.
[이런.]
콰자자자자작!
배리어가 부서져 흩어졌다.
이와 동시에 갈라진 먼지 사이로 한성이 쏘아져 들어왔다.
[안녕?]
벨루몬의 가슴팍에 검은 섬광 두 개가 꽂혔다.
푸화아아아악!
한성이 박아 넣은 단검이었다.
녀석의 후속 공격을 염려한 한성은 즉시,
자리를 이탈해 녀석의 반응을 살폈다.
격전의 어금니로 인한 검은 불꽃이
가슴팍에서 피어나 녀석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녀석의 안광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형형하게 빛나던 녀석의 안광이 흐릿해졌다.
‘음…?’
[…금방 돌아오지.]
녀석이 사라졌다.
벨루몬의 시전 속도가 빨랐다고는 하나
불안정한 채로 시전되었기에 멀리 이동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판단,
마력의 흐름을 쫓아 한성도 그림자 이동을 시전했다.
“…….”
길게 늘어진 창대의 그림자에서 한성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의 흐름을 쫓아 한성이 도착한 곳은 성의 외곽인 망루였다.
망루에는 녀석의 가슴팍에 꽂혀 있었어야 할 단검이
아무렇게나 놓여 흐릿해져 있었을 뿐 어디에도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한성에게 입은 상처를 회복할 수 없다는 판단에,
새로운 육체로 갈이를 했을 게 자명했다.
불멸불사라는 수식어가 거짓이 아닌 셈.
‘역시….’
[추태를 보였군.]
마력이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며 아무것도 없던 공중이 일그러졌다.
이내, 공간을 찢고 벨루몬이 나타났다.
탁.
공중에 있던 녀석이 한성이 서 있는 망루의
반대편으로 서서히 내려왔다.
‘저게 아공간 마법인가.’
다른 몸으로 갈이를 했을 거라는 한성의 추측은 맞았다.
벨루몬의 골격과 키가 전과는 확연히 달랐으니까.
[….]
한성을 바라보는 벨루몬의 눈이 달라졌다.
자신의 군대를 이겨내고 성까지 찾아온 상대는 가끔 있었어도,
회복 못 할 정도의 상처를 남긴 상대는 단 하나도 없었는데….
자신조차 본 적, 들은 적 없는 힘을 사용하는
저 녀석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자신이 자랑하는 절대방어마저
손쉽게 박살 내버린 녀석은 대체….
한성은 조용히 단검을 불러 손에 쥐었다.
[몇 번을 해봐도, 결과는 같다.]
한성의 손에 쥐어진 단검을 보며 벨루몬이 중얼거렸다.
[글쎄… 해보면 알겠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한성의 몸이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