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 * *
뛰어가던 한성의 눈에 낭창낭창한 나무가 보였다.
‘저거다.’
늪지 보아 뱀을 상대할 때의 전략이 떠올랐다.
한성이 뛰어올라 나무에 몸을 실었다.
나무는 한성의 무게에 활처럼 탄력 있게 휘었다.
한성은 이를 이용해 나무가 휘어진 상태 그대로
아래까지 내려가 옆의 나무 밑동을 잡고서는
바실리스크가 공격 사정권 내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하나… 둘… 셋. 지금!!!!!!!!!’
팡!
손을 놓자 휘었던 나무가 빠르게 원상태로 돌아갔다.
탄환이 쏘아지듯, 한성이 바실리스크를 향해 날아갔다.
한성의 손에는 언제 소환했는지 단검이 쥐어져 있었고
빠른 속도로 녀석에게로 쏘아져 날아갔다.
이를 본 녀석은 한성을 집어삼킬 생각인 듯,
아가리를 크게 벌려 한성을 맞이했다.
‘됐다.’
늪지 보아뱀과 같은 패턴이었다.
역시 몸이 크다고 해봐야 뱀은 뱀인가라는 생각에
한성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두꺼운 몸이 문제라면, 안에서부터 자르고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치명적 일격’, ‘격전의 어금니’
[스킬 : 치명적 일격이 발동]
[20초간 공격력과 공격속도, 관통력이 증가합니다.]
검신에 보랏빛과 검은 그림자가 서렸다.
바실리스크의 행동을 주시하던
한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녀석이 입을 벌린 것은 한성을 삼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바실리스크의 독니에서
보랏빛의 독액이 몽글거리며 솟아나고 있었으니까.
푸화아아아아아아악!
화염방사기 마냥, 보랏빛의 독액이 뿜어져 나왔다.
한성은 급히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
바실리스크의 콧잔등으로 몸을 옮겼다.
녀석은 영악하게도 한성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이를 발사한 듯했다.
워낙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브레스였기에
한성조차도 이를 완벽하게 피해내지는 못했고,
한성의 가슴팍에는 녀석의 독액이 묻어났다.
정통으로 독액을 맞은 것도 아니고,
소량의 독액 몇 방울이 튀다시피 한 적은 양이었음에도
방어구와 옷은 치지직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녹아 들어갔다.
“크아아아악!”
부아악!
살이 녹아드는 통증이 느껴지자마자, 독액이 튄 부분을 찢어 냈다.
[경고 : 피격으로 전체 HP의 20%가 소모됩니다.]
“이 새끼가!!”
상처를 살필 새도 없이, 녀석의 콧잔등을 발판삼아 도약한 한성이
그대로 바실리스크의 오른쪽 눈을 찍어 내렸다.
푸욱.
바실리스크의 눈에 박힌 두 개의 단검에서
격전의 어금니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거칠게 피어올랐다.
“끼야아아아악!”
바실리스크가 고통으로 몸을 비틀었다.
한성을 향하던 브레스가 늪지대의 온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나무와 풀들이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야트막한 둔덕, 울창하던 나무 군락지, 나무 넝쿨들까지
바실리스크의 독과 몸부림에 모두 사라졌다.
늪에는 바실리스크의 고통에 찬 울음만이 가득했다.
“끼야아아아아악!”
바실리스크가 한성을 떼어내려 미친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흔들림으로 인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과
종이 조각마냥 몸이 휘날리는 상황 속에서도
한성은 하나의 목표에만 집중했다.
‘눈알 하나는 박살 낸다.’
다음 기회는 없다는 생각에 한성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지금 녀석에게 큰 데미지를 주지 못하고
어설프게 공격하다 녀석이 도망이라도 하게 된다면,
경계는 심해질 것이고 다시 사냥하는 데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녀석이 뭔가 다른 수를 쓰기 전에 끝을 봐야 했다.
푹.
푹.
푹.
투척 나이프 여럿을 소환한 뒤 격전의 어금니를 둘러
그대로 녀석의 눈에 박아 넣었다.
“끼에에에에에엑.”
고통스러운지 녀석이 몸부림쳤다.
검게 피어오르던 아지랑이가 이제는 하나의 큰 불이 되어
녀석의 눈을 집요하게 찢고 씹어 삼켰다.
푸슉.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끈적끈적한 액체가 한성에게 분사되었다.
‘됐다.’
바실리스크의 눈이 격전의 어금니에 찢기고 뜯기다,
이내 이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었다.
한성은 바실리스크가 고통으로 잠시 멈칫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녀석의 눈에 박혀있는 단검을 발판삼아
힘껏 발을 굴러 바실리스크의 아래로 뛰어내렸다.
쾅!
푸확!
한성의 발 구름에 의한 반동 때문이었을까?
충격을 이기지 못한 녀석의 눈알이
터져나가다 못해 완전히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충격으로 바실리스크의 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풍덩.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풀 더미나 나무라도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물이라니….
운이 좋았다.
쿠궁.
‘쓰러졌나.’
수면 아래에서도 녀석의 쓰러짐으로 인한 진동이 느껴졌고,
충격으로 물이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한성이 수면을 향해 헤엄쳐 올라갔다.
푸확.
못은 생각보다 수심이 깊었고,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한성이 재빠르게 물에서 빠져나와
혹시나 있을 공격에 대비하며 추이를 살폈다.
“….”
온 사방이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엑.”
쿠과가가가가가각가가가각!
엄청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뭐야?’
한성이 빠르게 녀석에게로 다녀갔다.
녀석이 쓰러져있어야 할 자리엔 거대한 구덩이 하나와
녀석의 핏자국 그리고 그로 인해 부식된 바위들의 흔적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녀석이 도망을 택한 듯했다.
그게 전략적 후퇴인지, 그저 살기 위한 도주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후자라면 이를 찾기 쉽지 않을 듯했다.
‘기다려라. 곧 갈 테니.’
구멍으로 뛰어내리려던 한성은
바실리스크가 은신을 했음에도 자신을 알아본 것이 기억났다.
이에 한성은 물웅덩이로 가 진흙을 온몸에 펴 발랐다.
한성은 이것으로 한동안은 자신의 몸에서
열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한성이 노린 바는 아니었지만, 한성에게는 운이 한 번 더 따랐다.
물에 빠졌을 때 씻겨 나간 피 냄새가 그것이었다.
또 펴 바른 진흙 덕에 희미한 피 냄새마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한성은 기감을 넓혀 숨어버린 바실리스크의 흔적을 쫓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바실리스크의 마력 파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은신처를 만들어 숨죽이고 있는 것이겠지.
“후우우우.”
‘기다려라. 끝장을 보자. 이 개자식아.’
굳은 다짐을 하며 구덩이로 향하는 한성이었다.
* * *
“이한성 헌터가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네. 9시간 17분 34초 됐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요원이 설화의 질문에 대답했다.
“별다른 이상은 없나?”
이설화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게이트와 연결된 전자기기가 있었다.
이는 게이트의 마력 파장을 분석해 내부에서 발생하는 충격이나
게이트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고안된 장치였다.
기계에선 지속적이고 반복된 전자음과
같은 파형의 그래프만을 나타낼 뿐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네. 이상 없습니다. 아까 보고 드린 것과 같이
6시간 21분 19초, 7시간 04분 15초 경과 시점에
마력 파장이 큰 폭으로 변화를 보인 것이 다입니다.”
“… 계속 주시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설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계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삐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빅!
“뭐야?!”
이설화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기계의 수치가 빠른 속도와 큰 폭으로 움직였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삐비비비빅… 치직… 치지지직.
쾅!
기계는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폭발했다.
“야! 소화기 가져와!!”
불을 끄기 위한 요원들의 야단법석으로 주위가 어수선했다.
이런 어수선함 가운데에서도 설화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요원들에게 빠르게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녀 또한 놀란 마음을 쉬이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굳이 기계 장치가 아니더라도,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마력의 크기에
설화 또한 온몸이 경직될 수준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설화는 멍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 *
똑…… 똑…….
음습한 지하에 큰 굴 하나가 보였다.
급하게 팠는지 엉성했고 마무리되지 않아 그 끝이 거칠어 보였다.
똑…… 똑…….
흠칫
둘둘 감긴 똬리가 움찔거렸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작은 물소리에도 녀석은 극도로 경계했다.
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후우우우우… 후우우우우우.”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녀석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머리부터 허리까지 찢겨 나간 비늘과 살점은
전과 달리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실리스크는 자신의 일방적인 패배를 곱씹으며 이를 갈았다.
독 개구리의 강한 산성 독에도 빠르게 회복되었던 자신이었는데
조그만 쥐새끼한테 당한 상처는 회복은커녕 점점 심해져만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흘러내리던 피가 멈췄다는 것뿐.
어둠을 꿰뚫고 먹잇감을 바라보던 오른쪽 눈도 이제는 없다.
오른쪽으로는 희미한 빛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어둡고, 또 어두울 뿐이었다.
방심하는 게 아니었다.
호기심에 녀석이 뭔가 하게끔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다.
주춤했을 때, 몰아붙여 숨통을 끊어놨어야 했다.
그러나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녀석에게서 도망쳤고 살아남았다.
몸이 회복되는 즉시, 놈을 찾아낼 것이다.
녀석의 피를 마시고, 갈기갈기 찢어 온 사방에 뿌릴 것이다.
한성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좀처럼 흩어내지 못하는 바실리스크였다.
‘……?’
똬리 속에 대가리를 파묻고 회복을 기다리던
바실리스크의 감각에 뭔가 걸렸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지상으로부터 꽤나 깊게 파고 들어온 곳이다.
녀석을 속이기 위해 주위에 수십 개의 굴을 파두기까지 했다.
이렇게 빨리 발견할 수 있을 리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 하나 남은 눈으로 열심히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녀석이 근처에 접근했다면, 응당 났어야 할 피 냄새도 나지 않았다.
피 냄새는커녕, 주위에 널려 있는 축축한 진흙 냄새만 날 뿐이었다.
열도, 마력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예민했나….’
저 멀리서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졌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바실리스크였다.
다시 똬리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따끔
녀석에게 당한 상처가 쑤셨다.
따끔 따끔 따끔
하아… 언제쯤 괜찮아지려는지….
따끔따끔따끔따끔따끔따끔따끔따끔따끔따끔따끔
‘뭐야?’
고통에 황급히 고개를 들어 몸을 살폈다.
몸에는 수많은 가시들이 박혀 있었다.
한성의 투척 나이프였다.
‘?’
“…찾았다.”
소리가 들렸다. 분명 들었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바실리스크의 눈에 포착된 것이 있었다.
굴 입구에서 은신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낸 한성이 그것이었다.
“끝내자. 이 뱀 새끼야.”
바실리스크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내용이 뭔지 알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딱.
한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악!
바실리스크의 몸에 박힌 수십의 나이프에서
격전의 어금니가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곧 하나의 거대한 불이 되어 바실리스크를 집어삼켰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그 고통이 바실리스크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끼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콰과광!
바실리스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발광하듯 몸을 비틀었다.
흙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실리스크와 한성의 머리 위로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한성은 이에 개의치 않은 듯 보였다.
그저 바실리스크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막대한 마력과 살기가 피어올랐다.
바실리스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과 공포로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대상 ‘늪의 지배자 바실리스크’가 이한성에 공포를 느낍니다.]
[스킬 ‘왕의 위압’의 효과가 배가 됩니다.]
한성은 더 이상 먹잇감이 아닌 포식자였다.
자신의 몸에 비해 너무나도 보잘것없을 정도로
작은 한성이 이제는 자신보다 커 보였다.
“잘 가라.”
‘흑월난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