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 * *
녀석이 예고도 없이 꼬리를 휘둘렀다.
거체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느리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의 빠른 공격에 당황한 건 한성 쪽이었다.
후우웅.
한성의 귀로 꼬리가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이런?!’
쾅!
“끄억.”
녀석의 꼬리는 피하기는커녕, 막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녀석의 속도에 반응할 수 없었던 한성이
팔을 십자로 포개 올려 충격을 줄여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꼬리 자체의 무게도 무거웠지만
그걸 휘두른 바실리스크의 힘이 엄청났다.
꼬리에 맞은 한성이 탄환처럼 벽으로 쏘아져 날아가 처박혔다.
콰직!
충격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갈비뼈가 몇 개는 부서진 듯했다.
눈앞이 까매지며 의식이 흐려졌다.
“커헉.”
기침과 함께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숨이 돌고 의식이 또렷해졌다.
단순히 꼬리를 휘두른 것뿐인데도 그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무식한 새끼… 쿨럭… 쿨럭.”
벽면 한쪽이 한성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다.
[경고 : 방어구의 내구도가 다했습니다.]
[경고 : 방어구의 파괴로 인해 민첩과 체력이 줄어듭니다.]
[경고 : 피격으로 전체 HP의 60%가 소모됩니다.]
[경고 : 전장에서 이탈할 것을 권장합니다.]
투둑, 툭.
한성이 몸을 일으키자, 한성에게 쏟아져 내린
바위 파편들과 흙먼지들이 우수수 흘러내렸다.
단 한 방에 방어구의 내구도가 다했다.
육탄전으로는 녀석을 이길 수 없음이 분명했다.
한성은 지금부터 녀석에게 단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허락하면 위험할 것을 직감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
제대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후속타가 날아왔다.
후우우웅.
녀석의 꼬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쾅!
‘그림자 이동’
녀석의 꼬리는 목표물을 잃고
그대로 한성이 쓰러져 있던 벽을 무너뜨렸다.
“…쿨럭. 두 번은 안 되지.”
한성이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로 몸을 옮겼다.
한성의 두 손에는 언제 소환했는지
단검이 들려져 있었고, 역수로 이를 쥐고 있었다.
바실리스크 또한 한성의 마력 파동을 따라 눈을 돌렸지만,
한성이 한발 더 빨랐다.
푹.
한성의 두 단검이 바실리스크의 머리에 박혔다.
30cm 남짓한 단검의 검신이 모두 박혀 손잡이만 남겼다.
이에 바실리스크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한성을 떼어내려 했지만 손잡이를 굳게 잡은 채 끈질기게 버텼다.
홱홱 돌아가는 녀석의 고개에 따라
한성의 눈에 비친 세상도 롤러코스터마냥 어지럽게 돌아갔고,
귀에는 태풍이 몰아치듯 광풍이 불어댔다.
금방이라도 단검을 쥔 두 손은 이를 놓칠 듯 힘이 빠져 갔고
양어깨는 빠지기라도 한 듯 요란한 뼛소리를 내었다.
‘크윽….’
한성은 붉어진 얼굴로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그나마 다행이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녀석의 비늘이 쉽게 뚫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타격을 주기에는 상처가 너무 얕았으니까.
상처라고 해봐야 가죽의 겉 부분에 난 생채기 수준이었을 뿐,
깊게 파고들지는 못했다.
바실리스크의 몸이 워낙 크고 또 두꺼웠기 때문이리라.
녀석도 아파서라기보다는
한성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한성을 떼 내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치명적 일격’
‘격전의 어금니’
[스킬 : 치명적 일격이 발동]
[20초간 공격력과 공격속도, 관통력이 증가합니다.]
단검의 검신에 보랏빛과 검은 아지랑이가 동시에 어렸다.
푸화아아악!
상처에서 검은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녀석도 자신의 머리 위에서 뭔가가 피어오름을 느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더 거칠게 고개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림자는 더 크게 일었다.
불처럼 일어난 그림자는
조금씩 녀석을 좀먹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성은 녀석이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았고,
계속해서 바실리스크의 대가리를 난도질했다.
적의 피부가 두꺼워 데미지를 입히기 힘들다고 한다면,
답은 아주 간단하다.
쓰러질 때까지 그리고 두꺼운 피부가 갈라질 때까지
수백 수천 번을 휘두르면 된다.
한성은 암벽등반이라도 하듯 한 손으로 매달린 채
나머지 손으로는 무식할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녀석의 대가리를 쑤셔댔다.
상처가 쌓일수록, 피어나는 그림자의 수가 많아졌다.
이에 바실리스크의 당황스러움도 더욱 커져만 갔다.
금방 꺼질 줄 알았던 불은
꺼지기는커녕 더욱 그 수와 크기를 불려갔고
느껴지는 고통은 더욱 커져 날카롭게 자신을 좀먹었으니까.
생채기들에서 피어오른 그림자들이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불길이 되었다.
불길은 생명을 가진 것처럼,
의지를 가지고 녀석을 집요하게 불태우고 찢었다.
“키햐아아아아악!”
바실리스크가 비명을 질러댔다.
‘먹혔다.’
한성이 쾌재를 부르며 바실리스크에게서 떨어졌다.
쾅!
녀석이 고통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우르릉.
쩌저저적.
거대한 동굴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런.’
바실리스크의 거대한 몸을 생각하지 않은 한성의 실책이었다.
쾅!!!! 쾅!!!!!!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녀석은 이제 한성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지
그저 자신의 몸을 갉아 먹고 있는 격전의 그림자를 털어내려
계속해서 벽에 몸을 부딪치고 비벼대기만 했다.
충격으로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비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성 또한 자신에게 떨어지는 돌덩어리를
이리저리 피하거나 쳐내며 바실리스크의 동태를 살폈다.
바실리스크는 무너져 내리는 동굴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머리와 등에 붙은 검은 불길을 털어내기 위해
모래에 몸을 비비고 벽에 몸을 부딪칠 뿐이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악!”
녀석의 처절한 울음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크윽….”
쿠구구구궁.
녀석이 발버둥 칠수록 동굴의 흔들림은 커졌고,
떨어져 내리는 돌덩어리의 수는 많아졌다.
녀석의 목을 베고 마무리 지어야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녀석의 목을 베기도 전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게다가 쏟아져 내리는 바위와 돌덩이, 희뿌연 먼지로
시야조차 확보되지 않았기에 공격은 쉽지 않아 보였다.
또 몸부림으로 인한 예상외 피격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우선 나가자.’
‘그림자 이동’
한성의 시야가 바뀌었다.
찰박.
동굴의 입구에서도 100미터 정도 이격된 늪이었다.
“후욱… 후욱….”
한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동굴을 바라보았다.
동굴의 붕괴는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녀석은 여전히 격전의 그림자를 털어내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고
동굴 여기저기에 몸을 세차게 부딪쳐댔다.
“크윽….”
바실리스크가 보이지 않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야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빠진 듯 골격의 아귀가 맞지 않았고 삐걱댔다.
바실리스크의 도리질을 버텨내느라 어지간히 힘을 준 듯했다.
“으윽….”
‘하나… 둘… 흡….’
우드득.
“끄으윽… 헉… 헉….”
고통을 참으며 빠진 어깨를 밀어 넣고 골격을 재조정했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한 고통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충격으로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기라도 하는지
숨 쉴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내구도가 다했다는 경고 알림도 틀림이 없었던지,
방어구는 넝마가 되어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연신 계속되는 시스템의 경고 알림처럼
HP는 이제 겨우 40%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한 대라도 더 맞았다간 위험했다.
MP 또한 남은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라 해봐야
큰 거 한 번에 자잘한 거 대여섯 번 정도였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때였다.
쾅!!!
쿠르르르릉.
마지막 충돌 소리를 기점으로 동굴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조용했다.
침묵만이 늪지대를 가득 채웠다.
죽었나…? 아니. 이렇게 쉽게 녀석이 죽었을 리 없다.
방금 한성은 자신이 스스로 플래그를 세웠음을 깨달았다.
영화나 게임에서 보면 항상 주인공의 이런 대사 뒤에
적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제길….
경험치의 변화도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알림도 없었다.
녀석이 살아있다는 뜻이리라.
“크롸아아아아아아악!”
악에 받친 녀석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역시….
한성은 무너진 폐허에서 마력이 용솟음치는 것이 느껴졌다.
‘온다.’
치이이이이익.
무너진 동굴의 바위들 사이로 뭔가 녹아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의 코를 찌르는 날카로운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기 시작했고,
산처럼 덮여있던 바위와 돌들이 햇살에 내놓은 눈사람마냥
서서히 녹아드는 것이 보였다.
바위들이 녹아내리자 아래에서 뭔가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이내
녀석을 뒤덮고 있던 두꺼운 바위들이 완전히 다 녹아내린 듯
바위 사이로 보라색의 액체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푸화아아아아악!
치이이이이익.
녀석의 브레스가 닿은 바위들이 연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렸다.
‘산성 브레스인가… 아니면 독…?’
‘뉴 월드’에서 레이드를 돌 때가 생각났다.
솟구치던 녀석의 브레스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쉬익… 쉬익….”
녀석의 날름거리는 혀가 제일 먼저 구멍을 통해 나타났다.
“…지독하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의 몰골은 처참했다.
격전의 어금니가 어지간히도 뜯어댔는지,
머리와 허리까지의 비늘이 다 뒤집혀 있었고
살점은 상당 부분 찢겨나가 있었다.
조금만 더 뜯겼다간 녀석의 내장이 쏟아졌으리라.
찢겨져 나간 살점 사이로 보랏빛의 피가 진득하게 흘러내렸고
흘러내린 피에 바위가 치익 소리와 함께 그대로 녹아내렸다.
혈액에마저 독이 있는 듯했다.
녀석은 마비독과 부식성 독,
최소 2개의 독을 사용할 수 있다 봐야 했다.
바실리스크가 움직일 때마다 흘러내린 피로 바위는 녹아 내렸고
늪지대 주변의 식물들과 나무들이 죽어 나갔다.
[경고 : 대상 ‘늪의 지배자 바실리스크’가 분노 상태에 돌입합니다.]
[경고 : 전투 수행 능력이 부족합니다.]
[경고 : 전장에서 이탈할 것을 권장합니다.]
‘웃기지 마라. 이 멍청한 시스템아.
도망갈 거였으면 애초에 덤비지도 않았다.’
호기롭게 생각은 했지만,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이 축축해졌다.
‘긴장했나. 촌스럽군 나도.’
한성은 마에스트로가 되었다는 말에,
진짜 뭐라도 된 줄 알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눈앞의 뱀 하나 잡지 못하는 주제에
뭐가 마에스트로고 뭐가 최고란 말인가.
좀 더 겸손했어야 했다.
좀 더 노력하고 좀 더 준비했어야 했다.
착잡함을 감출 수 없는 한성이었다.
한성을 바라보는 바실리스크의 눈이 불타올랐다.
[경고 : 대상 ‘늪의 지배자 바실리스크’의 위협이 감지되었습니다.]
[경고 : 대상 ‘늪의 지배자 바실리스크’의 살기가 감지되었습니다.]
[업적 :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가 발동, 위협이 사라집니다.]
[스킬 : 왕의 위압이 발동, 대상의 살기에 저항합니다.]
경고음과 알림이 정신없이 들려왔다.
바실리스크도 더 이상 한성을
단순한 먹잇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으며,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한 대상이었으니까.
이제 한성은 목숨을 걸고, 죽여야 할 대상이 되었다.
“크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바실리스크가 한성을 향해 울부짖었다.
녀석은 부상당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민첩하고 빠르게 한성에게 기어갔다.
한성 또한 다가오는 바실리스크를 향해 마주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