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연정아가 쓰러졌던 다음 날 아침, 태운은 간만에 직접 밥상을 차렸다.
“밥 차리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태은은 한동안 밥을 직접 차린 적이 없었다.
애초에 집에서 밥을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연구소나 길드 사무실, 훈련 시설에서 항상 도시락이나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었다.
‘뭐, 요즘은 집밥이나 도시락이나 별 차이 없으니까.’그래도 가끔은 이런 식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어났어?”
태운은 간만에 서는 주방에서 연정아의 방문이 열리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어, 일어났어…. 어제 그 일 때문인가… 조금 뻐근하네.”“밥 거의 다 차렸으니까 윤아 좀 깨워줘.”
“알았어.”
연정아는 자연스럽게 윤아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윤아를 깨웠다.
“흐아아암….”
윤아는 잠에서 반쯤 깨어나 비몽사몽 한 상태로 식탁에 앉았다.
“뭐야. 오늘은 오빠가 차린 거야? 되게 오랜만인 거 같네.”
“거의 반년 만이지.”
태운은 마지막으로 된장찌개를 식탁 위에 올리고 식탁에 앉았다.
“먹자.”
태운의 말에 모두 밥을 먹기 시작했다.
윤아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로 밥을 먹고 있었고 연정아는 윤아를 꾸준히 신경 쓰면서 밥을 먹었다.
태운의 눈에는 모두 정겨운 장면이었다.
태운은 이 모습을 전부 눈에 담아두기로 했다.
앞으로 이 모습을 한동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연정아는 윤아가 밥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말을 꺼냈다.
“윤아야, 근데 너 슬슬 학교 갈 준비해야 할 시간 아니야?”
“헐… 벌써 8시 30분이야?”
“우리나라는 학교 안 쉬어?”
“전대섭 선생님이 빨리 정리해서 한국은 치안 유지가 되고 있어서 말이지.”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난 그 사건으로 인해 다른 국가들의 경우 대부분의 행정이 멈춰 버렸다.
특히 공권력이 약한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들은 이미 반파되어 국가의 기능을 상실했다고도 한다.
“그럼 나 먼저 일어날게!”
윤아는 시계를 보고 급하게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태운아, 이제 이야기해 볼까?”
“그래.”
연정아와 태운은 윤아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칠죄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윤아가 들어봐야 도움도 안 되고 좋은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스모데우스가 얼마나 강한지 알면 좋을 텐데.”“그건 나도 몰라. 직접 본 적은 없었거든.”
그도 그럴 게, 연정아도 아스모데우스가 이 세상에 있을 때는 고작 4~5살의 어린아이일 뿐이었으니까.
본 적이 있다고 해도 그의 강함을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과거 인류의 전력과 지금의 전력을 비교하면 지금이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있어. 생각보다 쉬울지도 몰라.”
“과연 그럴지….”
연정아의 긍정적인 해석에 태운은 동의하지 못했지만 승산이 있다는 것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스모데우스의 위치가 일본이라고 했지?”
“응, 일본….”
그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름 모를 나의 핏줄아.]
스스스스!
그 순간, 연정아와 태운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네가 여기 왜…,”
연정아의 뒤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 머리에 둘둘 말린 산양의 뿔을 가지고 있는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서 있었다.
그는 인간이 아닌 ‘무언가’였다.
처음 보는 녀석이었지만 태운과 연정아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마주한 것만으로 느껴지는 엄청나게 강렬한 마기와 음기.
이 정도로 강렬한 마기와 음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아스모데우스….”
그는 바로 아스모데우스였다.
“가, 갑자기 왜 나타난….”
연정아는 온몸을 덜덜 떨며 갑자기 나타난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 있는 나의 핏줄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더구나.]
“…네가 무슨 낯짝으로 날 만나러 와!”
연정아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떠올렸다.
연정아의 어머니는 칠죄신교에 연정아를 넘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칠죄신교에 연정아를 빼앗겼고 연정아의 어머니는 하늘섬 한가운데에 묶여 3일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하고 말라가다가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었다.
돌에 맞아 죽은 그녀의 나이는 고작 20살이었다.
그때, 연정아의 나이는 4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나이 16살, 연정아의 어머니는 고작 16살의 나이에 아스모데우스에 의해 연정아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20살에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연정아는 페이지의 최면에 의해 탈출해 그녀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칠죄신교에 자신을 팔아넘기고 하늘섬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연정아가 아스모데우스와 칠죄신교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연정아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음… 왜 그러지? 너는 내 핏줄이기에 다른 사람은 평생을 노력해도 얻지 못할 힘을 태어난 순간에 얻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냐.]
“뭐라고…?”
연정아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오히려 연정아가 자신에게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네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알겠다. 하지만 나에게 네가 필요하다. 나에게 와라.]
그 순간, 연정아의 어깨에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씨에서 엄청난 마기가 뿜어져 나오며 연정아의 정신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크… 크윽….”
연정아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스모데우스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만을 떠올렸다.
이대로는 꼼짝없이 아스모데우스의 종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연정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야, 보고 싶었다.”
쾅!
태운은 에테르 건틀릿에 열화를 사용해 아스모데우스의 안면에 꽂아 넣었다.
그와 동시에 아스모데우스의 씨가 마기를 내뿜는 것을 멈췄고 연정아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스모데우스는 안면에 태운의 공격을 받고 큰 타격 없이 조금의 찰과상만 입었지만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그 더러운 기운을 쓰는 녀석이 이 세대에도 있었구나. 게다가 에테르까지… 두 개의 힘을 동시에 다루는 녀석은 처음 보는군.]
“나도 너희같이 악랄한 놈들은 처음 봐.”
[칭찬으로 듣지.]
아스모데우스는 태운을 공격하기 위해 마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태운은 지금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하지. 네놈의 최후가 지금이면 마계로 돌아가서 얼굴이나 들고 다닐 수 있겠어?”악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다.
그리고 악마의 힘은 다른 존재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한 가지 개념을 직접적으로 맡고 있는 악마라면 더더욱 그렇다.
즉, 아스모데우스가 우스운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그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질 거라 생각하는 거냐?]
“못할 것도 없다고 보는데?”
태운은 에테르와 신성력을 천천히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난 혼자도 아니거든.”
어느새 정신을 차린 연정아는 자신의 힘을 모두 끌어 올린 채로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두 명이 너를 이기는 게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그리고 태운은 지금까지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그것을 뚫고 여기까지 도달했다.
“만에 하나 네가 나에게 진다면 너는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될 거다.”
[그런가….]
아스모데우스는 마기를 다시 회수했다.
[그럼 지금은 돌아가야겠군.]
아스모데우스는 왠지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정아를 얻지 못한다면 다른 핏줄을 만들면 그만. 네 얼굴에 절망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싶구나.]
아스모데우스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그 순간, 태운은 아스모데우스의 말에 아차 싶어 바로 윤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제발… 아닐 거야….’
벌컥!
“오, 오빠… 이거 뭐야…? 나 갑자기 아랫배가 답답해….”문을 연 순간 태운은 절망했다.
제발 아니길 바랐던 그 상황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윤아의 어깨에는 연정아의 것과 비슷한 혹이 나 있었고 배에는 칠죄신교의 문신 중 색욕을 의미하는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오빠… 이거 뭐야…? 아니지…?”
태운은 윤아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 일 아니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아니게 만들 테니까… 너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고 있어. 정말 아무 생각하지 말고. 집에서 TV만 보고 있어….”태운은 애써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윤아를 안심시켰다.
‘아스모데우스….’
윤아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그런 아이에게 아스모데우스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태운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태운은 윤아를 안심시킨 뒤 연정아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스모데우스에게 당하면 일주일 동안 마기의 안정화 과정을 거쳐. 안정화가 끝나면 바로 임신이 될 거야. 그리고 한 달 뒤에 아이를 낳게 되겠지.”
“…….”
태운과 연정아는 소리 차단 마법을 사용하고도 윤아에게 들리지 않게 소리를 낮춰 말했다.
“…해결 방법이 없는 거야?”
“아니, 있어.”
“무슨 방법이야.”
“안정화가 끝나기 전에 아스모데우스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는 거야.”아스모데우스는 색욕의 마기를 만들어내는 근원이다.
그 근원을 잘라 버리면 윤아의 몸에 들어와 있는 마기는 소멸할 것이다.
“일단 네 신성력으로 마기를 없애 보자. 그걸로 없앨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래. 그래보자….”
태운은 연정아와의 대화를 끝내고 윤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윤아야. 잠깐 누워볼래?”
태운은 누워 있는 윤아의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음…?’
하지만 마기에 의해 신성력이 사라져 버릴 뿐, 마기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태운아, 안 돼?’
태운의 표정을 읽은 연정아가 작은 소리로 물었고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운은 계속해서 신성력을 불어넣던 중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아스모데우스라는 근원에서 나온 마기 그 자체다. 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신성력은 기억의 신에게서 빌려오는 신성력이라 이길 수 없는 거지.’마기와 신성력은 서로에게 큰 피해를 주는 상극의 속성이다.
하지만 그 둘에 상하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원의 마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 기억의 신에게 근원의 신성력을 빌려달라고 하면….’태운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태운의 머릿속에서 단호한 기억의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된다.]
기억의 신의 너무나도 단호한 말에 당황했지만 태운은 다시 정중히 부탁해보았다.
‘제발 부탁….’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근원의 신성력은 나라는 존재 그 자체다. 근원의 신성력을 빌려달라는 건 내 손목을 잘라 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태운은 속으로 말하다가 분노해 육성으로 소리를 질러 버렸다.
하지만 기억의 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너는 밭을 일구기 위해 키우는 소에게 손목을 잘라 먹여주겠느냐?]
태운은 그 말을 듣고 기억의 신이 준 호의 때문에 자신이 신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다른 존재, 그리고 그들은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려라. 그게 네가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