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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먹는 헌터-299화 (299/379)
  • 299화

    가웨인은 처음 포박당했을 때 저항하지 않았다.

    쇠사슬로 묶여 있다고 한들 가웨인은 아주 쉽게 풀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지 믿고 싶기 때문이었다.

    헬리온 2세가 자신을 그렇게 쉽게 버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14살이 되던 해에 용사로 지목받고 그 이후의 인생을 바쳐 충성했던 나라의 수장에게 배신당할 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열화, 완전한 축복.”

    하지만 이제 헬리온 2세 아니, 헤온 제국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버렸다.

    이젠 증오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헤온 제국은 이제 내가 섬기는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펜달 왕국의 편에 서겠다.”가웨인이 그렇게 선언하고 천천히 성벽으로 걸어가자 헬리온은 식겁하며 소리쳤다.

    “녀, 녀석을 죽여라!”

    하지만 병사들은 나서지 않았다.

    가웨인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같이 싸웠던 병사들이었으니까.

    “나에게 검을 겨누지 않는 사람들은 죽이지 않겠다. 하지만 같이 싸웠던 전우로서의 예우는 여기까지다. 나에게 맞선다면… 장담하마. 너희는 사지 멀쩡히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거다.”가웨인은 그런 병사들의 공포심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어… 어떻게 할 거야?”

    “자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병사들은 웅성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볼 뿐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헬리온은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자 가웨인의 목에 돈을 걸었다.

    “가웨인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금괴 다섯 상자를 내려주겠다! 그리고 그자의 집안은 명예 귀족으로 임명해 앞으로의 모든 노역에서 면제해주도록 하겠다!”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순간 소란스러워졌다.

    “금괴 다섯 상자면…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아도 절반이 넘게 남는 정도 아냐…?”

    “게다가 명예 귀족이라니….”

    “앞으로 노역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고…?”일부 병사들은 그 말을 듣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웨인에 대한 두려움과 포상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그러자 몇몇 병사들이 미친 것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병사 5명이 10명이 되고 50명이 되고 수백 명이 되었다.

    “허….”

    가웨인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깟 금괴가 뭐라고…. 목숨보다 중한 게 뭐라고….”가웨인은 그들을 안쓰럽게 생각했다.

    돈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힘든 생을 살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웨인은 이미 선언한 대로 녀석들을 멀쩡히 돌려보낼 수 없었다.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키지 않고 그들을 살려준다면 다른 적들을 쉽게 설득할 수가 없다.

    “다들 미안합니다.”

    가웨인은 손을 휘둘러 열화를 쏘아냈다.

    “끄아아악!!!”

    “흐악! 흐아악! 살려줘!”

    “으아아악!”

    그러자 열화의 불꽃은 넓게 퍼져 나가 병사들을 불태웠다.

    검은 없었지만 맨손만으로도 수백 명의 병사들을 일거에 처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

    병사들은 그 광경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는 단 한 명의 병사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가웨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헬리온 2세는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병사들이 자신의 위해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 개자식들이! 어서 싸워라! 죽이란 말이다!”헬리온은 발악을 하며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지금 싸우란 말이다! 지금 움직이지 않는 녀석들은 삼족을 멸할 것이다! 싸워!!!”병사들도 알고 있는 사실을 헬리온 2세만 외면하고 있었다.

    기둥이었던 가웨인을 버리고 그 가웨인이 펜달 왕국에 투항해 칼끝을 반대로 돌린 이상 헤온 제국은 이미 망했다는 것을.

    “포터스! 인테로! 어서 싸워라! 이런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게 호위 기사가 아니냐!”포터스와 인테로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도 일이 이렇게 굴러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투항한다면 살려줄…. 아니, 가웨인과 적장은 모종의 연줄이 있었다. 그러니 가웨인도 이렇게 빨리 마음을 돌린 거겠지.’포터스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나오는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인테로, 따라와라. 우린 도망간다. 헤온 제국은 망했어. 어떻게든 도망쳐서 살아남는다.”

    “포터스! 어째서….”

    포터스는 헬리온 2세가 듣고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헬리온 2세는 충격을 받은 듯 포터스를 바라보았다.

    “폐하를 모시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영광이었습니다.”포터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인테로도 그를 따라 했다.

    그리고 포터스와 인테로는 성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 나도 데려가라!”

    헬리온 2세는 한심스럽게도 목숨을 구걸하며 포터스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포터스의 검이었다.

    포터스는 헬리온 2세의 목에 검을 대고 말했다.

    “당신은 어디서 죽어줘야 합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무슨 말이냐! 포터스!”

    헬리온 2세가 호통을 치자 인테로가 비웃었다.

    “하… 얼마나 머리가 안 좋은 거야? 네가 우리랑 같이 다니면 펜달 왕국이 추격하지 않겠냐고…. 그냥 여기서 죽어야 우리가 편할 거 아니야? 쓸모도 없는 짐 덩어리 데리고 다니고 싶지도 않아.”

    “무슨 그런 망발을….”

    퍼억!

    헬리온 2세는 인테로의 멱살을 잡았지만 인테로는 헬리온 2세를 내동댕이쳤다.

    “어…?”

    헬리온 2세는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곱게 살아왔던 헬리온 2세는 인테로에게 처음 ‘폭력’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고통보다 공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멍청한 새끼야. 적당히 하고 여기서 죽어. 넌 이제 황제가 아니라. 사형수니까.”헬리온 2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황위에 올라 고위 관료들만으로 나라가 굴러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헬리온 2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떵떵거리며 놀기만 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멍청한 왕의 참으로 한심스러운 말로였다.

    “아… 아….”

    그렇게 주저앉아 절규하고 있는 헬리온 2세를 보고 인테로와 포터스는 천천히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포터스… 인테로… 너희들이 하자고 한 게 아니었느냐!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너희가 이렇게 만들어 놓고 어딜 가느냐!”헬리온 2세는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폐하, 죄송합니다.”

    그리고 성벽 위에서 같이 가웨인을 지켜보던 부관, 장군들이 헬리온 2세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이내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포승줄을 들고 헬리온 2세에게 다가갔다.

    “이 개자식들이… 어떻게 너희들이 짐을….”헬리온 2세가 몸부림쳐 보았지만 평생 자리에 앉아 먹고 놀기만 했던 그가 전장에서 구르던 병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만 움직여!”

    퍼-억!

    병사 중 하나가 헬리온 2세를 걷어찼다.

    “끄어어억….”

    병사가 신고 있던 금속 부츠에 복부가 걷어차인 헬리온 2세가 고통스러워했지만,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헬리온 2세를 구속했다.

    “이 개자식들이… 어떻게 나라의 근간인 황제를….”헬리온 2세의 말에 병사들이 비웃었다.

    “황제?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보네.”

    “아직도 모르겠어? 헤온 제국은 망했고 너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병사들의 모욕에도 부관들과 장군들은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이 황제에게 마지막 예우를 차린 것도 자신들의 체면을 위한 것이었을 뿐, 그에 대한 충심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으아아악!!!”

    자신의 부하들의 배신으로 몰락한 한심한 황제의 최후였다.

    * * *

    “하… 헤온 제국이 이렇게 빨리 무너질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그러게 말이다. 저런 멍청한 왕을 만나서….”포터스와 인테로는 성을 빠르게 빠져나와 도망치고 있었다.

    “앞으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인테로의 물음에 포터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른다. 발길이 닿는 대로 가야겠지.”“후… 옆 대륙으로 가고 싶었는데 그곳은 펜달 왕국이 지키고 있으니….”“반대쪽으로 가보면 언젠가는 다른 대륙이 나오지 않겠습니까?”“그쪽은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배 운항을 할 줄이나 아나?”

    “그, 그렇네요.”

    인테로와 포터스는 성 밖으로 나가 도망치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고 있었다.

    그때, 둘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자네들은 정말 충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놈들이군.”

    “음?”

    “누구냐.”

    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가도였다.

    가도는 둘을 보자마자 오른팔을 금속으로 재구성한 상태로 나섰다.

    “아… 펜달 왕국의 가도라고 하는 놈인 것 같군.”

    “혼자 우리 둘을 상대하겠다는 거냐?”

    가도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말했다.

    “혼자라니?”

    그 순간, 가도의 그림자에서 그림자 야수 30마리와 그림자 괴수 5마리가 나타났다.

    태운이 인테로와 포터스 같은 강자 둘에게 가도를 혼자 보낼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모습을 본 인테로와 포터스는 경악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인테로와 포터스는 열심히 버텨보았지만, 그림자 야수와 그림자 괴수에 의해 갈가리 찢어졌다.

    그렇게 수개월에 걸친 헤온 제국 원정은 끝이 났다.

    * * *

    헤온 제국이 무너진 지 3개월이 더 지났다.

    헤온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었지만 되지도 않는 충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전부 제압하고 대륙 전체를 장악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더 걸렸다.

    “벨자하. 이게 네가 만든 책 원본과 사본 전부다. 그리고 뒤에 있는 시체들은 전부 네 제자들이지.”태운은 벨자하를 헤온 제국의 수도로 데려왔다.

    그러고는 헤온 제국 대륙 전체를 뒤져 찾아낸 벨자하의 마법 연구 서적을 전부 찾아냈다.

    “아… 아….”

    벨자하는 그동안 긴 지하 감옥 생활과 자신의 연구 기록이 전부 사라진다는 절망감에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참… 서적을 불태울 때만은 제정신이길 바랐는데 말이지.”아쉬워하는 태운의 옆에는 가도와 잭, 레일로프, 라온, 가웨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데 정말 불태워도 되는 건가? 벨자하가 한 일이 끔찍한 일인 것은 맞지만 이 연구들은 인류에게 가치가 있는 것들이야.”태운은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놈이 만들어 낸 마법 상식은 몇 년만 있으면 라온에 의해 뒤집힐 겁니다.”

    “어? 그래?”

    “그만큼 벨자하의 이론에는 허점이 많다는 말이지.”태운은 그렇게 말하고 기름을 뿌려둔 서적에 횃불을 던졌다.

    그러자 벨자하의 서적들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아악!!!”

    벨자하는 미친 것마냥 소리를 지르며 불타는 서적 안으로 몸을 던졌다.

    “아아아악!!!”

    벨자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서적과 함께 불타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났을까.

    벨자하의 비명이 멈췄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로 인정받던 황실 마법사치고는 비참한 최후였다.

    ‘뭐… 어찌 보면 참 어울리는 죽음이네.’

    그렇게 생각한 태운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기회, 그리고 새로운 세상’의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마정석 안에서 일궈낸 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상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시겠습니까?]

    태운은 그 알림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들었던 그들과 이별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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