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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먹는 헌터-293화 (293/379)
  • 293화

    멀른 백작의 어렸을 적, 정확히는 멀른에게 입양되기 전에 ‘케빈 모란트’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을 때.

    케빈 모란트는 테렌 왕국의 몰락 이후 빈민가를 떠돌며 소매치기로 연명했다.

    하지만 고작 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뒷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기며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뒷거리를 전전하며 살기를 2년. 소매치기의 프로가 되어 버린 케빈이 살던 도시에 처음 보는 얼굴의 상인이 왔다.

    굉장히 어수룩했지만 재산은 굉장히 많아 보였다.

    그 당시 케빈이 알아본 바로는 옮기고 있는 짐은 큰 도시 하나의 1년 경비와 비슷한 수준의 금화 주머니였다.

    그걸 본 케빈은 크게 한탕 하고 다른 나라로 도망갈 생각을 했다.

    마차에 쌓여 있는 돈주머니 하나만 가지고 도망갈 수 있다면 치안이 좋은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 먹을 것 걱정 없이 살 수는 있을 것 같았으니까.

    물론, 실패했다.

    도시 하나의 1년 경비에 맞먹는 돈에 대한 보안에 소홀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의 케빈은 붙잡혀 어떻게 살아 나갈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마차에 쌓여 있는 돈이 어디에 쓰일 것들이었는지를 듣고 살아 나갈 생각을 접었다.

    마차에 실린 돈은 헤온 제국이 비밀리에 전쟁을 준비하는 자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헤온 제국의 전쟁 자금을 운반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은 철혈의 장군이라고 불리며 이민족들의 침략으로부터 헤온 제국을 지키고 있는 파이크 멀른이었다.

    물론, 파이크 멀른이 직접 오지는 않았지만 그가 담당하고 있던 마차를 건드린 이상 살아 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케빈은 그 말을 듣고 삶을 포기했다.

    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갇힌 마차에는 전장에서 혼자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불리는 멀른 백작의 기사 두 명이 항상 붙어 있었으니까.

    그들은 케빈이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하면 바로 과격하게 제압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빛도 보지 못하고 마차에 갇혀 멀른 백작령에 도착했다.

    파이크 멀른은 케빈에 대한 보고를 들은 후 바로 케빈이 있는 마차에 들어왔다.

    그때, 파이크 멀른이 한 말은 아직도 케빈의 뇌리에 박혀 있다.

    “너에게 칼을 쥐여주마.”

    파이크 멀른은 마차에 들어오자마자 케빈을 묶은 포승줄을 잘라내고 케빈의 앞에 검을 던져두었다.

    “분명히 말하겠다. 넌 무슨 짓을 해도 날 죽일 수 없다.”당연한 말이었다.

    케빈은 몰랐겠지만 파이크 멀른은 각성자 중에서도 강한 편이었고 케빈은 한 달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꼬맹이였으니까.

    “그렇다면 넌 자신의 배를 가르겠느냐 적의 배에 칼을 꽂겠느냐?”10살짜리 아이에게 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말.

    하지만 파이크 멀른의 눈에는 조금의 망설임이나 연민조차 보이지 않았다.

    빠-득.

    케빈은 이를 갈았다.

    한 달 동안 마차에 갇혀 삶의 의지를 잃고 포기한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죽었다고 생각한 몸, 공포라는 것은 잊은 지 오래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생채기라도 하나 내고 싶었다.

    덜컥.

    케빈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을 들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파이크 멀른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하지만 케빈은 파이크 멀른의 손찌검에 힘없이 쓰러졌다.

    “흠, 패기는 쓸 만하군. 훈련병으로 편입해 훈련시켜라.”

    “10살 아이를 말입니까…?”

    “지금 당장 병사로 쓸 생각은 없다. 15살은 되어야 근육이 붙어서 쓸 만해.”파이크 멀른은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였다.

    그 말을 들은 케빈은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자신의 가족을 모조리 몰살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생겼는데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 바엔….’

    케빈은 멀른의 손에 맞아 날아갈 때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검 끝을 자신의 복부에 대고 쑤셔 넣으려는 순간.

    챙!

    파이크 멀른이 달려와 케빈의 검을 쳐냈다.

    “뭐야. 그냥 꼬마인 줄 알았더니 할복할 깡이 있어?”파이크 멀른은 케빈의 뒤로 돌아가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

    “치료한 뒤에 객실에 눕혀둬라. 깨어났을 때 바로 식사를 할 수 있게 밥도 준비해놓고.”

    “넵.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재미있는 녀석이군. 이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다니.”10살밖에 되지 않은 꼬맹이가 저런 독기를 가지는 이유는 거의 대부분 같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런 아이는 보통 죽을 때가 되면 울며불며 소리치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가끔 난 놈은 죽을 때까지 발악을 하다가 얻어맞기도 한다.

    하지만 발악을 하다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후 수치심을 느껴 할복까지 하려는 놈은 본 적이 없었다.

    “어디까지 올라올 수 있는지 한번 보고 싶군.”

    * * *

    그 이후, 케빈은 열심히 훈련했고 각성은 하지 못했지만 전략과 전술,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공부해 파이크 멀른에게 인정받았다.

    그렇게 케빈이 15살이 되던 해. 파이크 멀른은 여전히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후계를 찾고 있었고 결국, 눈여겨보았던 케빈을 택했다.

    그렇게 케빈은 파이크 멀른의 양자가 되었다.

    케빈은 파이크 멀른의 아들로 지내며 한동안 느낄 수 없었던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케빈은 낳아준 가족이 아닌 길러준 가족의 정을 지키기 위해 헤온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 낳아준 가족에 대한 은혜를 다 갚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직시한 현실이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감정에 매료되어 마치 헤온 제국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충성했다.

    “이제는 저를 위해서, 기꺼이 헤온 제국에 칼을 겨누겠습니다.”“고맙구나. 나도 너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거든. 물론, 적이 되었다면 망설임 없이 너를 베었겠지만.”가도는 케빈의 합류에 굉장히 고마워했다.

    케빈이 다스리고 있던 16개의 영지, 그리고 수만의 병사들을 한 번에 얻은 것도 그렇지만 케빈과 싸웠다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나저나 병사들을 설득할 수 있겠나? 네 병사들은 너와는 달리 헤온 제국에 나고 자란 사람들인데.”가도의 우려에 케빈은 걱정 말라며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제 병사들의 대부분은 제 영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니까요. 헤온 제국에 창을 겨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충분히 설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괴물들을 다루는 모습을 다들 보았으니 먹힐 겁니다. 가도 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병사들의 마음을 가장 잘 움직일 수 있는 감정은 공포라는 걸.”“하긴… 확실히 그렇군. 나도 처음 봤을 때는 무서울 정도였으니까. 쉽게 죽지도 않고 죽음의 공포도 느끼지 않는 거대한 짐승들이라니….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구나.”“하…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정신이 나갔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아서 막막했었죠.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적입니다.”“이해하네. 나도 저 녀석이 아군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그런데 확실히 아군이 되고 나니 든든하긴 하군요. 그 괴물들이 전선에 나서서 적들의 진형을 부순다…. 상상만 해도 안심이 되네요.”“허허, 너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이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목검 휘두르는 것도 힘들어하는 꼬맹이였는데.”“마지막에 봤을 때라. 그때 가도 님도 참 젊으셨는데 말이죠.”

    “그때도 30살이 넘….”

    가도와 케빈이 간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있을 때 태운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간만의 재회를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하지만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말인가?”

    “펜달 왕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발렌 왕국과 요굴 왕국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하, 이 하이에나 같은 놈들….”

    발렌 왕국과 요굴 왕국은 펜달 왕국과 함께 대륙을 삼분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최근에 있던 전쟁과 태운의 원정으로 인해 잠시 국력이 떨어진 사이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 빨리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케빈은 그 말을 듣고 물었지만 태운과 가도는 동시에 부정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빨리 헤온 제국의 황성까지 밀어 버려야지.”“그렇지만 두 국가가 연합이라도 해서 전쟁을 일으키면…. 원정보다 왕국의 안위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왕국의 안위라. 그건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강제 철수 명령이 떨어질까 봐 걱정될 뿐이죠.”

    “네?”

    케빈의 입장에서는 조금 의아했다.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삼국의 관계에서 두 국가가 연합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헤온 제국과의 전쟁 중에 크게 다친 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과 믿음직한 녀석을 하나 펜달 왕국에 두고 왔거든.”

    “혹시, 잭 님과 레일로프 님입니까?”

    “오? 그들에 대해 알고 있나?”

    케빈은 가도와 달리 유명하지 않았던 잭과 레일로프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이죠. 잭 님과 레일로프 님도 제 우상이셨으니까요.”어린 나이에 가도의 측근 부하가 된 잭과 기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던 레일로프.

    어렸을 적 케빈의 우상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들이었다.

    “그나저나 두 분 다 살아 계셨다니. 그런데 누가 크게 다치셨다고….”“잭 녀석이 다쳤는데 그렇게 걱정할 건 없다. 지금은 거의 다 나았으니까.”“다행이군요.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두 분이라고 해도 전력 차이가 크면 힘들 텐데….”“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잭과 레일로프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니까.”전쟁을 승리로 끝내는 것은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피해를 최소화하면 전쟁을 오래 끄는 것은 아주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진군하겠습니다. 케빈 님은 멀른 백작령에 있던 병사들을 토닥이며 불만을 줄이고 진군할 수 있도록 해주십쇼.”

    “알겠습니다.”

    태운은 다시 막사 밖으로 나가 병사들에게 내일 아침에 진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앞으로 두 달.’

    태운은 앞으로 두 달 안에 헤온 제국을 무너뜨리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 시간 안에 무너뜨리지 못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단순히 태운의 다짐이었다.

    ‘또 내가 이 마정석을 흡수하는 동안 현실에서도 반년 정도가 지났으니…. 슬슬 명운 아카데미 졸업 시즌이라 영입을 준비해야 해.’태운의 명운 길드는 반년 동안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

    유명한 미국의 헌터인 케이가 한국으로 이민까지 오며 명운 길드에 들어온 이후, 태운의 길드는 굉장히 유명해졌다.

    그 이후, 온갖 대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으며 유망한 헌터들과 실력이 있는 B급 헌터를 엄청나게 영입해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헌터 길드가 되었다.

    ‘그리고 칠죄신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대비를 해야지.’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어떤 위험이 다가올지.

    녀석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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