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허억… 허억….”
벨자하는 태운에게 수십 번의 패배를 경험하고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발악해보기도 했고 그만하고 죽이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거늘….’
이제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지금 벨자하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지금까지 수만 명을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하며 강해지기 위해 노력해 왔다.
스스로를 키메라로 만들면서까지 강해졌다.
강태운도 자신처럼 비정상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한 자신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애초에 자신은 과거의 강태운조차 따라잡지 못한 것이었다.
“거… 괴물이었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태운은 지금 시점에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괴물이었다.
태운은 벨자하가 전의를 잃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쓰러져있는 벨자하의 앞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뭐 해? 안 일어나고.”
“…개 같은 놈….”
벨자하는 이것이 태운의 본래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놈은 오로지 자신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기 위해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죽여라!”
“설마, 내가 너를 그냥 죽일 거라고 생각해? 내가 그 정도로 착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굳이 선악을 구분하자면 태운은 선한 사람에 가까웠다.
하지만 자신의 적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난 헤온 제국을 무너뜨릴 생각이다.”
“허… 가능할 거라 생….”
벨자하는 생각조차 안 하고 태운의 계획을 무시하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이 80만이라는 대군을 데리고 원정을 나와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전쟁을 벌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나에게 헤온 제국에 대한 충심 같은 게 있을 줄 아나? 헤온 제국은 내가 연구를 하기 위해 몸을 맡긴 장소였을 뿐이다.”“그래, 알고 있지. 네놈에게 충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는 걸.”
“그럼 그걸로 협박하는 이유가….”
“그런데 네놈의 연구 자료가 어디 모여 있지?”
“……!”
벨자하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이 확 깨었다.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이 난도질당하고 온몸에 이식했던 눈과 귀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꺼져 가던 의식이 순식간에 확 깨어났다.
“이… 미친 자식이…!”
“역시 이것에는 반응을 하네.”
벨자하는 자신을 비웃는 태운을 보고 격노했다.
“네놈! 네놈도 마법사라면 내 연구 자료의 가치를 알고 있지 않나!”“뭐, 그렇지. 내가 없었다면 네 연구 자료는 수백 년 동안 마법의 기초로 활용되며 발전해 나갔겠지.”“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그런 악랄한 짓을…!”“그런데 네놈의 연구 자료는 필요 없어. 네가 평생을 연구해서 알아낸 것들이 나에게는 상식으로 통하는 것들이니까.”
“이… 개자식이!!!”
벨자하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몸을 움직여 태운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태운은 자신의 멱살을 잡은 벨자하를 밀쳐내고 말했다.
“난 네놈의 연구실에 불을 지를 거다. 그리고 네놈의 배움을 받은 모든 녀석들을 죽일 거야. 네놈의 제자, 마법 병단의 병사들,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배우고 있는 생도들까지. 모조리 죽일 거다. 헤온 제국 황실 도서관에 있는 마법에 관련된 모든 책을 찾아내 태워 버릴 거야. 그렇게 되면 네놈이 평생에 걸쳐 연구한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
“안 돼… 안 된다…!”
“그리고 네놈의 지식이 남아 있는 장소가 네놈의 머리뿐일 때, 비로소 그때가 되면 네놈의 머리통을 부숴 주마.”
“아… 아아…!!!”
벨자하는 끔찍한 상상에 소리를 질렀다.
“그럼 일단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야겠지. 가도 님, 가까이 와주시겠어요?”태운은 가도를 불렀다.
“저한테 마나를 천천히 주입해주세요.”
태운은 벨자하와의 전투로 전체 마나의 80% 정도를 소모했다.
그 정도로는 지금 태운이 하려는 일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짓을….”
“가만히 있어. 안 그럼 팔다리 다 뽑혀.”
태운은 벨자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가도에게 받은 마나로 벨자하의 어깨 부근에 있는 마나 회로의 길을 막았다.
“좀 아플 거다.”
그 후, 태운은 벨자하의 어깨에 있는 마나 회로에 마나를 주입했다.
마나를 강제로 주입 당한 벨자하의 마나 회로가 빠르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벨자하는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태운은 멈추지 않았다.
퍽-.
벨자하의 어깨에서 아주 작은 폭발이 일어난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끄아악… 내 몸에 도대체 무슨 짓을….”
“어깨에 있는 마나 회로를 파괴했다. 한 다섯 군데 정도 더 파괴할 생각이니 버텨라.”그렇게 주요 부분의 마나 회로를 파괴하면 더 이상 마나를 운용할 수 없다.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면 극심한 고통만 남을 뿐, 메테리얼 조차 만들어지지 않는다.
“끄아아악!!!”
벨자하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순간에도 전선에서는 그림자 야수와 괴수들에 의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끝났다.
적장인 벨자하가 처참한 상태로 태운의 손에 끌려 나왔으니까.
손도 쓰지 못하고 학살을 당하던 순간에 대장이 생포당한 채로 등장했으니 전의를 잃는 것은 당연한 일.
전선에서 태운의 그림자 야수와 싸우던 병사들은 진즉에 항복했고 후방에 있던 병사들 후퇴해 설산 너머로 도망갔다.
그렇게 헤온 제국의 야망은 수십만 명의 사상자만 내고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태운은 결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이대로 헤온 제국으로 돌격합니다.”헬켄 영지의 병사들과 항복한 헤온 제국의 병사들.
전부 합치면 20만에 가깝다.
게다가 새로 얻은 태운의 특성인 ‘그림자 폭군’은 전쟁에서 더욱 큰 성능을 보인다.
이제 수적 열세라는 말은 태운의 앞에서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헤온 제국은 더 이상 무서운 적이 아니야.’이제 헤온 제국을 무너뜨릴 일만 남았다.
* * *
“젠장…! 후퇴하라! 헤레인 성을 버린다!”
헤온 제국의 변경백인 멀른 백작은 펜달 왕국과의 전쟁이 발발한 지 3달 만에 영지 5개를 빼앗겼다.
펜달 왕국군은 뒷일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점령 후 관리도 하지 않고 무작정 전선만 밀어내고 있었다.
“천혜의 요새라 불리던 헤레인 성이 이렇게 무너지다니….”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최적화된 헤레인 성은 지금껏 결코 뚫린 적이 없는 하늘이 내린 요새였다.
과거 1,500명의 병사들이 5만 명의 적들을 상대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5달을 버텨낸 사례도 있었다.
그런 헤레인 성이 고작 3일 만에 뚫려 버린 것이다.
“저런 걸 어떻게 막으라고….”
병사들의 방패 역할과 전선을 뚫는 창 역할을 동시에 하는 그림자 야수와 높은 성벽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림자 괴수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날아서 성벽 위를 초토화하는 그림자 괴수를 상대로 천혜의 요새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후퇴하라! 물러나서 한 번 더 태세를 정비한다!”병사들의 전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주변 귀족들에게 서신을 보내보아도 묵묵부답이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내가 야만인들을 막아줄 때는 형제인 것처럼 말하더니… 위험에 처하니 도와주는 놈들이 하나 없어.’멀른 백작은 이를 갈았다.
주변 귀족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들이 전부 가식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임에도 답신조차 없다니.
황성에서도 지원군을 보내준다고 해놓고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내가 이런 국가에 충성을 다할 이유가 있을까.’멀른 백작은 자신이 미끼가 되어 시간을 벌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3대째 헤온 제국의 국경을 지켜왔다는 자부심 하나로 애써 참고 있었다.
그때, 멀른 백작과 병사들의 퇴로에 검은색 그림자가 깔렸다.
“뭐지…?”
구름이 빛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하늘을 본 순간 퇴로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고 도망치게 둘 거라 생각했나?”
“강태운…!”
검은색 그림자에서 그림자 야수 수백 마리가 튀어나와 퇴로를 막았다.
모두 태운의 손바닥 위였던 것이다.
“젠장….”
태운은 홀로 움직여도 수백 마리의 그림자 괴물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혼자 적군의 뒤를 잡아도 순식간에 적을 포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르르르….]
그림자 야수들은 침을 흘리며 병사들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운의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너희들을 공격하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을 거다.”
“…조롱하는 것이냐.”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멀른 백작가. 3대째 헤온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으로 활약하고 있는 명문 가문. 3대 모두가 능력 있는 장군들이지. 지금 대를 이은 케빈 멀른은 테렌 왕국 기사의 아들이었고 테렌 왕국 멸망 이후 자녀가 없던 파이크 멀른에게 입양되어 백작의 자리에 앉았다. 맞나?”
“그걸 어떻게….”
케빈 멀른은 테렌 왕국 기사의 아들이었다.
테렌 왕국이 멸망한 뒤 멀른 백작의 눈에 띄어 입양된 것이다.
입양아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테렌 왕국 출신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 굉장히 적었다.
“너는 헤온 제국에게 버림받았다. 너는 지금 미끼가 되어 시간을 벌고 있을 뿐이지.”“닥쳐라! 버림받는다 하더라도 헤온 제국을 향한 충심을 지키는 것이 멀른 가의 마지막 자존심이다!”그때, 태운의 옆에 멀른 백작의 눈에도 굉장히 익숙한 사람 하나가 등장했다.
“훌륭하게 자랐구나, 케빈.”
“가도 장군님…?”
가도는 테렌 왕국에서 자란 남자아이들의 우상이었다.
특히 그중에 케빈은 기사의 아들로서 가도에게 직접 검술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케빈은 가도를 우상으로 삼아 같이 전장에 서는 날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테렌 왕국은 멸망했고 가도는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군님이 어째서….”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부정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가도의 소식이 들리지 않자 마음속으로는 과거의 꿈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지금 죽은 줄 알았던 어릴 적의 우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케빈, 멋지게 자랐구나. 충성을 지키는 것은 신하된 자의 최고 미덕이지.”
“장군….”
이게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를 봐서라도 그 충심을 버려줄 수 있겠나. 테렌 왕국의 복수를 위해서 자네의 힘이 필요해.”
“…….”
멀른 백작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낳아준 국가와 자신을 키워준 국가.
어떤 나라를 마음에 품어야 하는가.
그 고민은 어릴 적에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고민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그 고민이 끝났다.
“전군. 무기를 버려라.”
“백작님!”
멀른 백작은 무기를 버렸다.
‘나는 나를 위해서 헤온 제국을 버릴 것이다.’그렇게 멀른 백작령, 16개 영지가 펜달 왕국의 산하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