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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먹는 헌터-287화 (287/379)
  • 287화

    잭의 보고 이후 한 달이 지났다.

    설산은 더 이상 설산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에도 새하얀 자태를 뽐냈던 설산은 어느새 앙상한 나무와 힘없는 풀들만이 남아 있는 황량한 산이 되어 버렸다.

    설산 위에 살던 강력한 몬스터들은 대부분 벨자하와 그의 마법 병단에 의해 소탕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몬스터들도 급격히 바뀐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설산을 떠났다.

    ‘그나저나 벨자하의 성취가 내 예상보다 높은 것 같아.’무려 대륙을 양분하고 있는 거대한 산맥이다.

    벨자하는 그런 산의 기후를 한 달 만에 바꿔 버린 것이다.

    ‘나도 못 하는 걸 해낸 건 아니지만… 벨자하의 성취가 높다는 건 그 녀석이 키워낸 마법 병단의 수준도 내 예상을 상회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태운은 영주의 서재에서 주변 지리를 기록한 지도를 펼쳐놓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산맥을 넘어온 군대가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헬켄 후작령을 공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헬켄 후작이 산맥 부근 국경의 영지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기본적으로 바인트로를 중심으로 주변 영지의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는 거야.’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헤온 제국군의 움직임을 제대로 읽지 못해 한쪽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힘도 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 것이다.

    “후… 곤란하네.”

    단신의 힘으로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수백 대 수천이라면 강한 사람 한 명이 전장을 휘어잡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수만 대 수십만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가도, 잭, 레일로프, 라온, 태운 중에 혼자 수십만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후….”

    태운이 본신의 힘을 전부 가져올 수 있다면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마음만 먹으면 홀로 헤온 제국에 쳐들어가 에테르로 폭발을 일으켜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하다못해 마나의 근원 하나만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좋겠는데.”지금 태운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마나의 총량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마정석을 흡수해 마나를 수급하거나 마나의 근원으로 마나를 수급했었지만, 이곳에서는 마정석 흡수는커녕 마나의 근원으로도 마나를 수급할 수 없었으니까.

    마나만 충분했다면 이렇게까지 골머리는 썩진 않았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전장에서는 내가 제일 약한 모습을 보일 거다.’가도와 레일로프, 잭, 라온는 전부 마나 총량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태운의 훈련과 교육으로 지구의 헌터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성취를 이뤄냈다.

    오히려 그들을 지구로 데려갈 수 있다면 명운 길드의 1군 공격대에 편입시키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과 비교하면 전장에서 나는 가장 비효율적인 인원이야.’소수 인원 간의 전투라면 태운이 가장 강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가장 강하지만 전투 지속력이 부족한 태운이 전장에 서는 것은 분명한 손해다.

    ‘나 혼자 별동대로 움직여야겠어.’

    가도, 잭, 라온, 레일로프는 전부 따로 배치해 전장에서 전선을 유지하도록 하고 태운은 혼자 움직이며 특수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내가 작전을 세울 수 없게 되지만… 이번에는 머리가 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헬켄도 언젠가는 벌어질 전쟁을 대비해 전술과 전략을 공부해왔고 테렌 왕국 세라오니의 명장이라고 불리던 가도도 있으니까.

    똑똑.

    “누구십니까?”

    그때, 누군가가 태운이 있는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날세. 들어가도 되겠나.”

    가도의 목소리였다.

    “아, 들어오십쇼.”

    가도는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릿속에 구상되는 것은 있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말씀드렸던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음…. 우리가 흩어져서 전선을 유지하고 자네가 홀로 움직이며 후방을 흔들어놓겠다는 그것 말인가?”

    “네.”

    태운은 이 작전을 가도에게 말해 보았었다.

    하지만 가도는 이 작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었다.

    “분명히 일반적인 전쟁이었다면 좋은 방법이었겠지. 적들이 우리가 가진 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니 우리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

    “…….”

    곧 일어날 전쟁의 발단은 바로 벨자하의 개인적인 감정이다.

    태운과 가도 일행을 죽이겠다는 욕구 때문에 발발한 전쟁이다.

    “만약 벨자하가 전쟁을 벌인 후 군대를 미끼로 우리를 죽이러 온다면? 벨자하와 그의 제자들이 한 번에 덤벼든다면 혼자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그렇군요.”

    보통 사람이라면 개인적인 감정으로 벌인 전쟁이라도 수십만의 병사들을 미끼로 두고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이루려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벨자하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태운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가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정면 승부 어떻겠나?”

    “네…?”

    최소 서너배의 병력 차이.

    가도의 입에서 정면 승부라는 말이 나왔다.

    * * *

    헤온 제국의 황성.

    그곳에서는 헬리온 2세와 벨자하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벨자하, 이번 전쟁에서 절대 져서는 안 된다.”“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웃 대륙의 왕국은 3개로 나뉘어 있어 그들은 헤온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제가 사람을 보내두어 연합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이웃 대륙 침략은 헤온 제국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번 전쟁에는 80만 명이라는 대규모의 군대가 동원되었고 그 정도 대군을 모으는 것은 헤온 제국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힘들었다.

    “이번 전쟁에서 실패한다면 자네의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황좌에 앉았다면 벨자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의 헤온 제국은 완전한 기반을 마련하여 앞으로 100년간은 아무런 문제 없이 황금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전쟁 준비로 귀족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만일 이번 전쟁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리라.

    벨자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벨자하는 그런 것 따위 보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강태운, 가도, 레일로프, 잭, 라온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패배할 리가 없다.’설산의 눈을 녹이면서 첩자를 보내 그들이 지내고 있는 바인트로라는 영지, 그리고 그 영지를 품고 있는 왕국인 펜달 왕국의 전력을 알아냈다.

    ‘녀석들이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고작 20만여 명. 소국치고는 나름 괜찮은 병력이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헤온 제국의 병력 중 약 3만 명은 마법 병단이다.

    그들이 군대 사이사이에 섞여 들어가 마법으로 병사들의 진격을 돕는다면 적들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벨자하는 이 전쟁을 질 수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벨자하는 이 전쟁 이후 지금까지 참아 왔던 자신의 야망을 이룰 생각도 하고 있었다.

    ‘펜달 왕국을 멸망시킨 후 나는 그 공적으로 펜달 왕국의 지배권을 요구할 것이다.’펜달 왕국을 지배하게 된 벨자하는 병력을 키워 같은 대륙에 있는 다른 국가들을 집어삼키고 다시 헤온 왕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혼자가 아니라 수십만의 병사들과 함께겠지.’벨자하는 펜달 왕국에서 멈추지 않고 주변에 있는 모든 국가와 심지어 헤온 제국까지 집어삼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명분과 동기를 만들어줘서 고맙군… 강태운. 널 죽임으로써 그 감사함을 표현해 주도록하지.’벨자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황제인 헬리온 2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내일 출사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알겠다. 내 자네만 믿고 있도록 하겠다.”

    벨자하는 그대로 뒤를 돌아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너의 목을 자르게 될 것이다.’벨자하는 웃으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 * *

    선전포고를 받은 지 3일이 지났다.

    적들은 이미 산맥을 넘어오고 있었고 펜달 왕국의 병사들은 모두 헬켄의 영지에 집결해 있었다.

    “자네의 말대로군. 적군의 숫자가 80만이 넘는다고 보고가 들어왔어.”헬켄은 태운에게 말했다.

    “긴장되는군요. 이제 적들은 반나절 안에 이곳에 도달할 겁니다.”이곳은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골짜기였다.

    대륙을 가로막는 산맥을 넘는 최단 거리 루트이기 때문에 적들은 이곳을 보급로로 사용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이곳을 반드시 뚫어야만 했다.

    “장기전으로 이끌 생각이었다만… 이 산맥에 이런 좋은 보급로가 있었다니… 이걸 모르고 장기전으로 이끌고 갔다면 전쟁이 얼마나 길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80만의 대군을 먹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보급품이 필요하다.

    그 보급품을 옮기기 위해서는 이런 길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보급로를 알고 있었으면 녀석들이 이 보급로를 사용하도록 유지했다가 보급을 차단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게 좋지 않았겠나?”“이곳은 보급로로 사용할 때 가장 효율적인 길일 뿐, 다른 길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저희가 상대하는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대군의 숨통인 보급로를 하나만 만들지는 않겠죠.”“그렇군. 나도 한참 부족한 것 같아. 앞으로도 많이 배우겠네.”헬켄과 태운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한 가지 보고를 받았다.

    “우측면 복병이 적의 선봉대를 발견했습니다!”

    “시작됐군. 선봉대의 규모는?”

    “약 1만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참… 선봉대의 덩치부터가 말이 안 되는구만.”태운은 옆으로 돌아올 만한 길에 2,000명의 복병을 숨겨두었다.

    그들과 정면 승부를 한다면 순식간에 몰살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주 믿음직한 사람을 한 명 붙여두었다.

    “복병이다! 죽여라!”

    “화살이 날아온다! 마법병은 방벽을 설치하라!”

    “우오오오!!!”

    헤온 제국의 선봉대는 복병의 존재를 순식간에 알아차렸고 빠르게 대처를 시작했다.

    2,000명과 10,000명.

    거기에 병사들의 수준까지 달렸다.

    하지만 이 정도 차이는 한 명의 강한 사람이 전장을 휘어잡는 게 가능한 수준이다.

    “병사들에게 마나의 가호를.”

    백은의 갑옷을 입고 있는 외팔의 남자.

    그를 중심으로 밝은 빛의 아우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돌격하라.”

    그는 바로 잭이었다.

    잭은 전장의 오라라는 특성을 각성하고 수천 명의 병사들에게 버프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우오오오오!!!”””

    잭의 능력 덕에 한층 강해진 병사들은 적들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잭 또한 적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나 블레이드.”

    잭은 검에 마나를 주입하고 적들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앙!!!

    그러자 거대한 검기가 쏘아져 헤온 제국군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벨자하를 내 눈앞에 데려와라.”

    동생들의 원수를 가까이 둔 잭의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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