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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먹는 헌터-279화 (279/379)
  • 279화

    “이게 무슨….”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말해주겠네. 지금은 헬켄 영주와 이야기를 나누게.”태운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가도가 태운에게 말했다.

    가도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도와 달리 잭은 역사 개변 탓에 생긴 기억과 현실의 차이에 괴리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도는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가…?’태운은 가도의 반응으로 추측해 보았다.

    ‘그런 것 같은데 말이지….’

    태운이 가도의 마정석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때와 그 이후에 레일로프의 마정석을 클리어하고 잠깐 대화를 했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 개변으로 인해 바뀐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모르는 게 이상한 거였다.

    ‘연결된 마정석 중에 가장 역사가 많이 개변된 마정석이… 가도의 마정석일 테니까.’역사 개변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가도인데 모르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했다.

    “레일로프 님과 강태운 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릴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지?”

    그때 태운의 뒤에 있던 레일로프가 까칠한 말투로 헬켄 영주에게 말했다.

    오랜 기간의 용병 시절은 역사 개변 이후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능력 있는 인재를 원하는 것은 군주로서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헬켄은 다소 무례한 레일로프의 말투에도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태운은 그 말로 헬켄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작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태운은 입을 열었다.

    “능력 있는 인재라…. 헬켄 영주님도 사람 보는 눈이 있으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지방 영지가 잘 돌아가게 하는 데에는 우리 같은 인재는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과하죠.”

    “…….”

    헬켄은 태운의 말을 듣고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태운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헬켄의 영지인 바인트로는 지방 영지일 뿐이다.

    지금 당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가도, 라온, 레일로프, 잭, 강태운이라는 거대한 인재를 품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땅이다.

    “…아직은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직은? 자신이 꽤 넘치시는군요.”

    태운이 지금 헬켄을 압박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헬켄이라는 사람이 태운, 가도, 레일로프 잭, 라온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릇인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가도 일행과 헬켄의 관계가 어떤 관계든 상관없다.

    [마정석의 흡수자가 마정석 안에서 역사를 바꾸게 되면 해당 마정석의 주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과거 마정석을 연결하면서 보았던 문장이다.

    ‘가도, 잭, 레일로프, 라온에게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는 기회다.’헬켄은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의 개념을 최초로 떠올렸을 정도로 명석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었다.

    만약 태운의 생각에 헬켄이 충분한 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가도, 잭, 레일로프, 라온을 데리고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다.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제가 고작 여기서 멈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이 영지를 제대로 잘 돌아가게 만드는 것. 영주님의 목표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죠.”헬켄의 말에도 태운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헬켄이 태운의 말에 조금 고민하는 듯한 낌새를 보이자 태운이 쐐기를 박았다.

    “어디까지 올라갈 생각이십니까.”

    태운의 단순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질문은 고민을 하던 헬켄의 마음에 불을 붙여 버렸다.

    그렇게 헬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인트로는 대장장이의 땅입니다.”

    질 좋은 금속이 나오는 광산이 있는 바인트로, 손기술이 좋은 대장장이들이 많은 영지였다.

    그 덕분에 오랜 과거부터 바인트로는 대장장이들의 성지로 여겨졌다.

    하지만 귀족들에 의해 바인트로의 능력 있는 장인들은 모두 수도로 끌려갔고 바인트로는 유명무실한 대장장이의 성지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바인트로는 경쟁력을 잃었고 척박한 땅 탓에 농지가 없던 바인트로는 나날이 말라가고 있었다.

    대장장이들이 만들었던 무기와 장비로 번성했던 바인트로는 대장장이들이 없어지자 순식간에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번성했던 바인트로가 천천히 죽어갔습니다. 광산에서 나오는 철을 팔며 연명하는 것도 잠시였습니다. 광산의 매장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까요.”대장장이들이 없어지고 살기 위해 과하게 철을 캤기 때문이었다.

    대장장이들이 모두 수도로 끌려가고 20년이 지난 시점에 바인트로의 광산이 텅 비고 말았다.

    이때가 바로 바인트로의 암흑기였다.

    구걸하는 아이들이 거리에 돌아다녔고 굶어 죽은 시체를 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생계형 매춘이 성행했고 도둑과 강도 같은 범죄들이 들끓었다.

    하지만 영주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나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감자를 심어 나눠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그 당시의 영주가 수명이 다해 죽었고 다음에 영주가 된 사람은 바로 헬켄의 아버지인 발로렌 남작이었다.

    발로렌은 선대 영주와는 달리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하지만 일을 벌이는 족족

    실패했고 그 때문에 생긴 불만은 세금을 낮추는 것으로 잠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로렌은 멈추지 않았다.

    낮춘 세금으로 인해 줄어든 재정 상황은 가문의 보물들을 팔아 메꾸었다.

    하지만 상황은 너무나도 좋지 않았고 발로렌이 성공한 정책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건 바로 농지 개발이었다.

    발로렌은 농지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사망했다.

    “제가 농사 개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저의 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지민들의 아버지를 향한 원망은 상상도 할 수 없이 거대했죠.”발로렌이 일을 벌이느라 허비한 것들은 전부 영지의 금고에서 꺼낸 것들이었으니까.

    발로렌이 벌인 일들 중 거의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영지민들은 발로렌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 식량을 사서 나누었다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영지민들은 발로렌을 찢어 죽여도 시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헬켄에게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던 분이었죠.”가문의 보물을 팔아 구휼 활동을 했다면 훌륭한 영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문의 보물이 모두 팔아 버리고 가진 것이 없는 순간이 오면 영지민들은 다시 끔찍한 과거로 돌아갔을 것이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모욕하고 발로렌의 이름을 버려 영지민의 신임을 얻어야만 했습니다.”헬켄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다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스스로 괴로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리화를 하며 존경하는 사람을 모욕하고 싶지 않습니다.”헬켄은 외압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를 모욕하며 가문의 이름을 버렸다.

    그것으로 영지민들의 신임을 얻기는 했지만 헬켄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 바인트로 같은 영지가 생기지 않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권력에 의해 몰락하는 영지와 고통받는 영지민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헬켄은 그렇게 말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바로 강태운이었다.

    “왕이라도 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그것이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헬켄의 의지는 굳건했다.

    태운은 헬켄의 눈을 피해 하늘을 보며 말했다.

    “권력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나라….”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같은 말이었다.

    “헬켄 영주님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죠?”“…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당연한 이야기였다.

    헬켄의 생각과 이상을 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힘이 필요하다.

    그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피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태운은 헬켄의 그릇을 판단할 수 있었다.

    “합격.”

    “네…?”

    태운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며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상론을 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이 대답이 나왔다는 것은 자신이 가려는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길은 한 나라의 왕이었다.

    헬켄은 왕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나라의 왕이 될 정도의 인물이라면… 우리를 품을 최소한의 그릇은 되는 것 같군.’그가 원래 역사에서 성공했을지, 아니면 실패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었다.

    ‘이 정도 포부와 능력을 가진 사람의 옆에 내가 붙어 있다면 실패할 일 따위는 없다.’한 나라의 왕?

    고작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대륙 하나를 안겨줄 수도 있다.

    “좋습니다. 저는 영주님을 따르도록 하죠.”그제야 헬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참… 못 본 사이에 정말 능구렁이가 다 됐구나.”그렇게 둘의 신경전이 끝나고 가도가 태운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는 잘린 오른팔 대신 왼팔로 태운을 툭 쳤다.

    “헬켄 영주는 나이는 어리지만 능력 있는 사람이야. 농사 개혁과 정치적 개혁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니까.”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이 있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확실하게 하고 싶었습니다.”이 세상이 단순히 죽은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기 위해 태운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죠.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으니 극진히 대접해드리겠습니다.”헬켄은 가도와 태운의 대화가 끝나자 자신의 저택 안으로 태운과 레일로프를 들였다.

    “망해가던 영지를 되살리기 위해 스스로 모욕적인 역사를 만들어낸 영주라… 멋있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스승님?”그때, 태운의 뒤에서 잊고 있던 한 소년이 태운에게 말을 걸었다.

    “어… 스승?”

    그는 바로 레일로프의 제자였던 케일이었다.

    하지만 케일은 레일로프의 제자일 뿐 태운의 제자는 아니었다.

    그때, 레일로프가 태운에게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이 세상에서 너는 나와 같이 세상을 떠돌던 용병 동료로 되어 있다. 그렇게 같이 돌아다니다가 케일의 스승이 되어 버린 거지. 너는 마법 스승, 나는 검술 스승.’레일로프의 요약에 태운은 머릿속에서 케일과의 관계를 빠르게 정립할 수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내가 외우라고 했던 마법 수식이나 더 외워둬.”

    “넵! 알겠습니다!”

    태운은 그렇게 케일과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태운은 방을 하나 배정받았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면 되는 것 같았다.

    태운이 그곳에서 몇 안 되는 짐을 풀고 있을 때.

    똑똑.

    누군가가 방을 두드렸다.

    “나일세. 들어가도 되겠나?”

    “잭이다. 나도 들어가겠어.”

    문 너머에는 잭과 가도가 서 있었다.

    태운은 빠르게 문을 열고 가도와 잭을 맞이했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건 똑같네요.”

    태운은 둘의 잘린 오른팔을 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태운의 말에 가도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가도의 말은 태운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오른팔은 벨자하에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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