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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먹는 헌터-231화 (231/379)
  • 231화

    마을 사람들을 말을 타고 마을로 들어온 기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태운은 고개를 조아리지 않고 옆에서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 어서 기사님께 고개를 조아리지 못할까!”그의 종자로 보이는 자가 태운을 나무랐다.

    하지만 태운은 그에게 고개를 조아릴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용병이 기사에게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럴 이유가 없는 것 같다만.”

    “이놈!”

    “제빈, 그만하거라.”

    종자가 소리치자 기사는 자신의 종자에게 말했다.

    “복장을 보니 용병이시다. 영지의 수호를 받지 않는 용병은 기사에게 예를 갖출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그 후에 기사는 말에서 내려 촌장에게 말했다.

    “또한 이 마을 사람들도 저에게 예를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최근 이 마을이 도적의 습격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기사가 존중받는 이유는 존중해주는 이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전 그러지 못했으니… 존중받을 이유가 없습니다.”이 마을은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일 뿐이지만 엄연히 한 영지의 주인이 관리했어야 할 장소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특산품도 없고 농사를 짓기 좋은 장소도 아니었기에 영주가 관리를 소홀히 했었다.

    “새로운 영주님께선 앞으론 이 마을도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도적 따위가 건드릴 수 없게 만들겠습니다.”기사는 상당히 올곧은 인성을 가진 청년이었다.

    태운의 눈으로 봤을 때도 그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의 이름은 알레한드로.

    그는 지방 영지의 기사답지 않게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알레한드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속 같은 주인을 섬기고 있었지만 그의 방탕하고 게으른 모습에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영주가 바뀌었지.’

    지금 알레한드로의 소속은 바인트로라는 영지다.

    바인트로의 영주였던 발로렌 남작이 죽자 그의 아들이 온갖 개혁을 행했다.

    세금을 늘려 군대를 증강하기 시작했고 그 군대로 주변 도적들을 모조리 소탕했다.

    세금만 낮춰 불만을 억누른 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전 영주와 달리 도적들을 소탕하고 새로운 농사 기술을 도입하는 등 열심히 일하는 영주의 모습에 영지민들은 환호했다.

    실제로 고작 영주가 된 지 반년 만에 사람들의 생활이 확실히 나아졌다.

    ‘확실히 능력이 있는 인물이긴 하네.’

    농업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영주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여러 농사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땅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어디서나 잘 자라는 구황작물을 대량으로 심어 혹시 모를 위기까지 대비했다.

    고작 21살의 영주가 이런 추진력과 능력을 보이다니.

    범상치 않은 인물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야망이 대단한 놈이지.’

    그의 어린 시절은 잘 모른다.

    어떻게 자랐는지 모르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미래에 어떤 일을 벌일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영지전을 벌이려는 거겠지.’

    그는 고작 지방 영주로 생을 마감할 인물이 아니다.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아도 그것을 위해 뭐든 하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정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능력이 뛰어나다.

    태운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기사를 따라온 곱상하게 생긴 문관 한 명이 눈에 잘 띄는 벽에 공문을 붙였다,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앞으로는 이 마을도 영지에서 관리를 하며 마을의 방위와 농사를 위해 병사들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몇 년 전에 벌어졌던 전쟁 탓에 인력이 부족해져 농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마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은 소식이었다.

    그리고 공문을 붙인 사람이 마을 사람들 앞에서 두루마리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헬켄 남작님의 말씀입니다.”

    “헬켄…?”

    전 영주의 성은 발로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헬켄 남작이라니…?

    “난 과거의 무능했던 영주, 발로렌 가와 연을 끊고자 나의 성을 헬켄으로 바꾸었다. 앞으로 영지 내의 선한 사람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악한 사람은 지옥에 살게 될 것임을 이 자리에서 선포한다. 그리고….”그다음 내용은 앞으로 자신이 어떤 정책을 펼칠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21세기 지구에서 살고 있는 태운에게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곳의 주민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내용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이 정책에 불만이 있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세계에선 헬켄 남작이 민주주의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나 보네.’태운의 마음속에서 헬켄 남작의 이미지가 한층 좋아졌다.

    그때, 기사 알레한드로가 입을 열었다.

    “영주님께선 이름 없는 이 마을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헬켄 마을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십니다. 마을 사람들끼리 논의하고 동의한다면 병사를 통해 알려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

    태운은 그사이에 케일의 반응을 살폈다.

    예상대로 케일은 알레한드로를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케일의 스승인 레일로프는 용병, 자유로운 검사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기사에게는 다른 이미지와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그는 용병이나 떠돌이 검사처럼 정처 없는 삶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애초에 검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도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니까.

    외세의 적으로부터 영지를 수호하는 기사.

    그것이 케일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먼 길을 오느라 지쳐서 그런데 저희가 머물 장소가 있을까요?”기사는 지친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이죠. 여관에 방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여관 주인이 기사와 병사들을 여관으로 데려갔다.

    기사가 떠나자 사람들을 그 자리를 떠나 각자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케일은 고개를 숙이고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을 정했는지 고개를 들고 태운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정했나 보구나.’

    태운은 조용히 케일을 구석으로 데려갔다.

    “스승님.”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다. 저 기사를 따라가고 싶은 것일 테지.”

    “예….”

    “또 기사가 되고 싶은 것일 테고.”

    “그렇습니다.”

    “기사의 종자로부터 시작해 기사가 되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 알레한드로라는 기사는 실력은 뛰어나지만 지위가 높은 기사가 아니야. 더욱 힘들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케일은 그 사실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케일도 자신의 앞길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말 가고 싶으냐? 평생을 함께 살았던 마을 사람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그건 좀 아쉽습니다. 하지만 전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지만 이젠 아닙니다. 스승님 덕분에 스스로의 실력을 갈고닦는 것에도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강해지는 것은 어느새 제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기사가 되어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케일의 의견은 강경했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네…?”

    “기사는 영지전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기사의 종자도 물론 참가해야 하지. 사람을 죽일 자신이 있나?”

    “전 이미 도적들을….”

    “그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은가.”

    “…….”

    그때와는 다르다.

    도적들을 죽인 것은 약자의 위치에서 방위의 목적으로 한 살생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신의 것,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너보다 약한 자들을 강자의 입장에서 죽일 수 있겠냐는 말이다.”

    “…….”

    전쟁에 나서 사람을 죽이는 병사와 기사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전쟁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곳이니까.

    태운의 말은 케일에게 그런 각오가 되어 있냐는 물음이었다.

    “…해야겠지요. 힘들더라도 해야겠죠.”

    케일은 자신의 힘을 잘 알고 있다.

    일반 병사들이 상대라면 혼자서도 수십 명을 죽일 수 있다.

    강자의 입장에 서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

    쉽지는 않겠지만 기사가 된다면 해야만 할 것이다.

    “스승님….”

    “허락하마.”

    태운은 거절할 수 없었다.

    각오까지 마친 제자의 결심을 스승의 이름으로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미 스승의 자격을 잃은 것이니까.

    스승은 그저 제자가 선택한 길을 존중하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잘 잡아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흐음… 나도 슬슬 이 마을을 떠날 때가 된 것 같구나.”케일은 태운의 말에 깜짝 놀랐다.

    케일도, 태운도 떠난다면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게 말이다. 그건 여관에서 쉬고 있는 알레한드로 기사에게 물어봐야겠구나.”

    “예…?”

    “마을에만 있다 보니 좀이 쑤셔서 말이다. 간만에 여행 좀 떠나고 싶어서 말이야.”하지만 이대로 레일로프가 후회하는 일들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같이 가자꾸나.”

    같이 가면 케일이 허무하게 죽을 일은 없겠지.

    * * *

    “안 됩니다.”

    케일은 여관에서 쉬고 있던 알레한드로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어째서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

    사실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청년을 덜컥 견습 기사로 받아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은 이 마을에 있어야 합니다. 친구, 가족

    모두 이곳에 있지 않습니까.”

    “…….”

    “견습 기사로서의 길은 힘듭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려울 거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겁니다.”“힘들어도 좋습니다. 죽을 때까지 굴러도 좋습니다. 절 견습 기사로 받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케일과 알레한드로 둘 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원래 역사에서도 알레한드로는 케일을 받아주지 않았겠지…. 레일로프는 처음부터 케일이 기사가 되겠다는 것을 달가워하진 않았을 테니 케일이 자력으로 해냈겠지.’태운은 얌전히 케일과 알레한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이제 병사들을 데리고 주변에 있는 도적들을 소탕하러 갈 겁니다. 같이 데려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책임질 수 없습니다.”“그깟 도적들에게 죽을 만큼 전 약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레한드로는 케일이 검을 열심히 수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운에게 훈련을 받은 케일의 걸음걸이와 손짓, 자세는 모두 검사의 그것이 되어 있었으니까.

    케일이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한 검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훈련과 실전은 다릅니다. 검증되지 않은 자를 견습 기사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습니다.”태운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가볍게 웃었다.

    ‘뭐야, 저 기사 생각보다 열려 있는 놈이었네.’알레한드로는 일부러 계속 케일을 자극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다.

    ‘검증되지 않은 자를 견습 기사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증명해 보라는 말이지.’케일은 알레한드로의 생각대로 그 말에 자극을 받았다.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검을 들고 마을 공터로 나오시죠. 제가 직접 봐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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