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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먹는 헌터-116화 (116/379)
  • 116화

    -크르륵…. 크륵.

    태운의 머릿속에 가래가 끓는 듯한 지옥 병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지금까지는 이해할 수 없던 지옥 병정의 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잘해주었다. 이제 네 뇌를 파괴해야겠군. 고맙다.

    그렇다.

    지옥 병정은 빨아먹은 뇌를 재조립해 뇌 주인의 의식을 자신의 몸에 넣을 수 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호르몬을 조절해 태운의 판단을 흐리고 쉽게 흥분하게 만들었으며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그 상태에선 뇌가 파괴되어도 지옥 병정의 뇌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방 회복할 수 있다.

    녀석은 그런 특성들을 활용해 힘을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처리할 수 있던 것이다.

    “아…. 아아아!!!”

    그런 생각들이 끝난 순간 태운은 뇌가 부서지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필과의 동기화율이 30%가 됩니다.]

    [필과의 동기화율이 40%가 됩니다.]

    [필과의 동기화율이 50%가 됩니다.]

    [필과의 동기화율이 60%가 됩니다.]

    [필과의 동기화율이 70%가 됩니다.]

    [필과의 동기화율이 80%가 됩니다.]

    ……

    동시에 필과의 동기화율이 치솟았다.

    그러자 필의 감정과 동화되어 눈물이 흘러나왔다.

    필은 이 순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고 있던 것이다.

    자신을 정직한 사냥꾼이라고 믿고 있는 5살짜리 아들.

    도굴이나 하는 도적 길드 소속 모험가라는 걸 알고도 자신을 사랑해준 아내.

    위험한 일을 하는 자신을 위해 언제나 기도해주는 노쇠한 어머니.

    자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이 아닌 이 더러운 지옥 병정과 함께 살아갈 거라는 생각을 하니 토가 쏠렸다.

    “제발…!”

    태운은 자신이 놓쳐 버린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필의 뇌가 부서지고 있기 때문일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순간 태운은 떠올렸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신체는… 필의 신체다.’지금 자신의 의식이 깃들어 있는 신체는 지옥 병정의 신체.

    ‘충분히 시도해볼 만해….’

    태운은 뇌가 천천히 부서지는 중에 지옥 병정의 몸 안에 있는 마나 회로를 찾아냈다.

    ‘무슨 이리 복잡한 마나 회로가….’

    하지만 마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모세 회로가 너무 많아서 끌어모으는 건 못 해. 그럼 빨아들이는 느낌으로….’태운은 마나 회로 안에 있는 마나를 빨아들여 겨우 마나 200짜리 메테리얼 하나를 만들어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태운은 염력으로 검을 당겨와 손에 쥐었다.

    -무슨…!

    순간 위협을 느낀 지옥 병정은 뇌의 파괴를 잠시 멈추고 팔과 연결된 신경 세포를 우선 파괴해 태운의 손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지옥 병정의 행동은 태운에게 한가지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게 맞았어. 녀석의 뇌는 내 뇌를 대체하기 위해 머리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지금 녀석의 뇌의 위치는 정확히 뒷목 쪽이다.

    ‘같이 죽자!’

    태운은 이빨로 검을 물고 손가락에 끼워 세웠다.

    -이런 미친….

    지옥 병정도 위협을 느끼고 태운의 모든 신경 세포를 끊어내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부웅!

    머리를 휘둘러 자신의 목을 잘라냈다.

    동시에 목을 지나고 있던 지옥 병정의 뇌까지 파괴되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십니까, 필.’

    태운은 천천히 어두워지는 시야에 의식을 거두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모든 지옥 병정을 찾아내 처리하셨습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클리어 조건을 달성 후 사망으로 강제로 흡수가 진행됩니다.]

    아무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만족한 것 같았다.

    * * *

    마정석 흡수에 성공한 후 마정석의 주인을 만날 수 있는 백색의 공간, 태운에게는 이제 안방처럼 익숙한 공간이다.

    “어서 오게.”

    그곳에서 태운은 맞이해주는 사람은 필이었다.

    “안녕하세요.”

    태운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방금까지 동기화율이 90%에 가깝게 치솟아 그의 감정에 격하게 영향을 받았던 터라 그를 편하게 대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강태운이라고 했나.”

    “네.”

    “미안하네. 그런 경험을 하게 해놓고 줄 수 있는 게 냉철이라는 보잘것없는 특성 하나밖에 없구만.”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운은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지옥 병정 안에 잠깐 있었던 경험만으로도 엄청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것을 말하자 그제야 필은 웃음을 지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태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

    “혹시 골든 왕국, 테렌 왕국, 헤온 제국이라는 이름의 국가를 알고 있나요?”

    “골든 왕국이라면 알고 있네만….”

    “혹시 어떤 국가인지 간단하게 설명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대륙 구석에 있는 작은 소국이야. 풍부한 금광 하나로 먹고살고 있지.”

    “아…. 그렇군요.”

    태운이 알고 있는 골든 왕국이 아니었다.

    골든 왕국이라는 이름은 어떤 사람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는 흔한 이름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 나도 고맙네. 정말….”가도가 있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겠다 태운은 빨리 필을 쉬게 하고 싶었다.

    특별한 마정석의 등급은 마정석에 영향을 준 영혼의 주인이 생전에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에 따라 갈리는 것 같았다.

    상급으로 갈수록 빙의되는 몸의 주인은 점점 강해졌고 잠재력도 올라갔으니까.

    하지만 필은 달랐다.

    강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약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의 마정석의 등급이 높았던 이유는 단순히 원통함 때문이었다.

    지옥 병정이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자신을 대신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가족을 해쳤을 것을 상상하면 숨도 쉬기 힘들 것이다.

    강하지도, 잠재력이 뛰어나지도 않았던 필은 그 원통함과 분노로 마정석에 실린 힘을 높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 좀 쉬세요. 많이 힘드셨을 테니까.’태운은 천천히 사라져가는 필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태운이 눈을 뜨고 캡슐에서 나오자 자하르가 모니터실에서 나와 태운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이번 보상은 만족스러운가?”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냉철이라는 특성을 얻기는 했지만…. 당장 제 전력에 큰 향상을 불러오지는 않을 거 같아요.”

    “아쉽겠구나.”

    “아뇨.”

    태운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지옥 병정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좀 얻은 게 많거든요.”잠깐 지옥 병정의 몸 안에 있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과 감각을 바탕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어렵지 않으면서 정확하게 지옥 병정을 구분할 수 있는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음…?”

    자하르는 마법에 높은 성취가 없기 때문에 방금 태운이 꺼낸 말이 어떤 말인지 감이 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태운이 방금 꺼낸 말은 인류 최고의 마법사인 전대섭 조차도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비웃고 무시하겠지만 태운 자기 자신만큼은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좀 쉬거라.”

    “그리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태운은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하지만 자하르는 이미 태운을 1년 가까이 봐왔다.

    어떤 말이든 거침없이 내뱉는 태운이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거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또 우중충한 늪 던전에 갈 일정을 잡아달라는 거겠지?”

    “예….”

    협회는 우중충한 늪에서 마르기가스를 만나 두 명의 헌터를 잃었다.

    그런데도 또 인원을 차출해달라는 말을 어떻게 쉽게 꺼내겠는가.

    “알겠네. 어차피 협회에서도 재소탕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어. 저번에는 그곳의 몬스터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서 소탕의 진행도가 떨어졌거든.”“그 소탕 작전에 장민혁 헌터와 신유승 헌터는 꼭 넣어주세요.”“음? 그 사람들은 전 작전 당시에 너에게 가장 크게 반발했던 사람들 아닌가?”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할 말이 있거든요.”

    * * *

    태운은 집에 돌아가던 중 갑자기 몸이 근질거려 지하 훈련장을 향했다.

    안에 들어가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찬영인가? 아닌 거 같은데….’

    지금은 11시, 찬영이라면 평소에 훈련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찬영은 오늘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영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영가의 허락을 받아야 진짜 기사단의 단장이 되는 거니까.’그래서 찬영은 여기에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 태운이 왔네?”

    “……? 왜 여깄냐.”

    “여길 제일 빨리 발견한 사람이 나인데 이상할 건 없잖아? 그리고 찬영이한테 허락도 받았어. 찬영이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도 못한다고 하더만.”지하 훈련장에 있던 사람은 창영우였다.

    “하긴, 네가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인데 못 쓰게 하는 건 좀 그렇지.”

    “못 쓰게 할 생각이었어?”

    “그건 아니고….”

    태운과 창영우는 잠깐 수다를 떨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여기서 다들 훈련을 한다는 거지? 이곳은 아는 사람은 우리 세 명을 제외하고 두 명 더 있다는 거고…. 그래도 잘 관리했네.”“관리는 저절로 되더라고. 신경을 안 써도 그냥 알아서 청소가 되고 망가진 곳 있으면 수리가 돼.”

    “오…. 그 할아버지 능력자였네.”

    “뭐….”

    태운은 ‘그야 대현자니까’라는 말을 삼키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중국에는 언제쯤 돌아가?”

    “3일 뒤에 돌아가. 원래 일정으로는 내일 돌아가야 하는데 너희 만난 김에 좀 더 오래 있으려고 이것저것 핑계 좀 대고 지원금도 좀 탔지. 좀 재밌게 놀아보려고.”

    “그거 괜찮은 거 맞냐?”

    태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이제 슬슬 몸 풀고 훈련 좀 할게. 오늘 몸을 많이 안 움직였더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여기 온 거라.”“그래, 그럼 난 내일 놀아야 하니까 쉬러 간다.”창영우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창영우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창영우도 마찬가지로 중국어를 사용했다.

    “네, 구찬영과 강태운 둘 다 접선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하 훈련장이라는 곳의 출입 권한도 얻어냈습니다.”-잘했네. 앞으로 조금이다. 조금만 더하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창영우는 빠르게 전화를 끊었고 태운이 있을 훈련장의 방향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산을 내려가 숙소를 향했다.

    “창영우…. 왜…. 그런 거냐….”

    그때, 태운은 창영우에게 심어놓은 도청 마법으로 그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지금의 창영우는 태운이 알고 있는 과거의 창영우와 달랐다.

    “미리 알아서 다행이야.”

    태운은 배신감에 가슴이 쓰렸지만 이럴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런 마음을 가지자 방금 얻은 특성 냉철이 활성화되어 마음이 가라앉았다.

    ‘후…. 일단 찬영이에게도 말은 해놔야겠어.’여차하면 이곳으로 유도한 후 출입 권한을 없애고 심문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태운이 창영우의 의도는 알게 되었지만, 태운이 사용한 마법은 도청 마법이었다.

    태운은 통화를 끝내고 훈련소 입구를 바라보던 창영우의 씁쓸한 표정은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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