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허덕륜… 선생님?”
태운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덕륜 선생님이 C급 헌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A급 헌터 마저 압도하는 힘을 가진 마르기가스에게 유효타를 먹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괜찮다. 쉬거라.”
허덕륜은 태운과 김현우를 들어 한곳에 모았다.
그러곤 무너진 제단을 보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해주었어…. 그러니 이제 푹 쉬거라.”
그때, 벽으로 날아간 마르기가스가 다시 일어나 허덕륜에게 말을 걸었다.
“허덕륜…. 네 녀석이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날 죽이려거든 그깟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내 머리통을 씹어먹었어야지.”
“그럼 오늘 그렇게 해주지.”
“마음대로 하게.”
허덕륜은 큰 소리를 치긴 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르기가스도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허덕륜, 당신 많이 약해졌군. 방금 주먹에서도 느꼈다. 얼마나 약해졌는지.”“그래도 전대섭 형님이 오기 전까지 널 여기 잡아둘 정도의 힘은 남아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허덕륜은 태운과 김현우를 뒤에 두고 마르기가스를 견제했다.
“칫…. 비겁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마르기가스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됐다. 어차피 의식도 실패했겠다…. 그냥 돌아가주지.”마르기가스는 바로 꼬리를 접고 물러났다.
괜히 객기를 부리다가 전대섭에게 당하면 그것만큼 최악인 게 또 없으니까.
“계획이 좀 늦어지겠군….”
마르기가스는 그 말을 끝으로 어둠에 몸을 감추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흐아….”
털썩.
마르기가스가 사라지자 입구에서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던 B급 헌터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빅포처럼 거대하고 위협적인 몬스터 앞에서도 잡담을 하면서 싸우던 대담한 사람들이 마르기가스의 앞에서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만큼 마르기가스의 강함과 공포가 엄청났다는 것이다.
“계획이라…. 그게 뭘까요….”
김현우와 비교해 그나마 몸 상태가 정상인 태운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놈들의 목표가 뭐가 있겠느냐. 데블스 에이지의 재발이다.”배반자들은 과거 수십만, 수백만 인류의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데블스 에이지를 다시 일으키려 하고 있던 것이다.
“미친놈들….”
첫 데블스 에이지의 피해와 상처도 아직 가시지 않았다.
아직 데블스 에이지 때문에 가족을 잃고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그런 끔찍한 일을 다시 벌이려 한다는 것에 너무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허덕륜 선생님…. 도대체 정체가 뭐죠?”과거에도 허덕륜이 C급 헌터가 아닐 거라는 사실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특성의 효과를 받고 A급 헌터 수준이 된 김현우도 어떻게 손쓰지 못했던 마르기가스에게 유효타를 날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사람이 많으니 나중에 말해주겠다.”
“알겠습니다.”
허덕륜은 여전히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저 중 절반은 헌터를 그만두겠군.’
온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공포를 경험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신을 수습하게. 밖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허덕륜의 말에 다른 헌터들은 그제야 자신의 옆에 하체만 남아 죽어 있는 강인철의 시신을 보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허덕륜은 그 모습을 보고 살아 있을 때의 강인철을 떠올리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도대체 이 제단에서 무슨 의식을 하고 있던 걸까….’태운은 속으로 이 의식을 막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고민해보았지만, 답은 나올 리가 없었다.
‘나중에 연정아한테 물어봐야겠어.’
태운은 그것으로 생각을 접고 김현우를 부축했다.
오열하던 헌터들도 강인철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허덕륜은 그들을 밖으로 이끌었다.
“밖으로 나간다.”
그렇게 우중충한 늪 던전 사건은 두 명의 사망자를 내고 마무리되었다.
* * *
“마르기가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의식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거지?”칠죄신교의 하늘성.
대원로들의 연회장에 6명의 대원로가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교만의 좌를 맡고 있는 쟝이 식탐의 좌를 맡고 있는 마르기가스에게 물었다.
마르기가스는 입에 음식을 잔뜩 집어넣어 씹어 삼키고는 말했다.
“쯧…. 헌터 놈들이 쳐들어와서 막고 있었는데 내 시야를 돌린 다음 제단을 박살 냈다. 그래서 그놈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는데…. 허덕륜, 그 자식이 날 막아서더군.”그 말을 들은 질투의 좌 소르코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허덕륜이? 그놈은 죽지 않았나? 너와 레이지가 팔다리를 자르고 절벽에 던졌다고 했던 것 같은데.”“맞다. 그런데 내 눈앞에 나타난 건 허덕륜 그놈이 맞았어. 팔다리도 멀쩡하더군.”타-악.
쟝은 식기구를 탁자에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마르기가스, 너의 실패로 우리의 계획은 2년이나 늦어졌다. 그리고 허덕륜이 나타났다는 건 데블스 에이지 시절에 우리가 죽였던 다른 초대 헌터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니 앞으로는 대원로가 직접 움직이는 일은 최대한 자제한다. 의식, 테러, 공격들 모두 원로회의 인원들에게 맡긴다. 그들에게도 경험을 나눠줘야 하니까.”쟝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는 끝이다. 다들 돌아가.”
쟝은 마르기가스의 실패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2년이 지나든 20년이 지나든 데블스 에이지를 다시 일으킬 수만 있다면 어차피 인류는 멸망하고 마족들의 세상이 된다.
그 세상에서 대원로들은 각자의 악마를 모시며 살 수 있게 된다.
‘저번에는 강철운…. 그 녀석 때문에 실패했지만…. 지금은 그런 녀석은 없으니까.’쟝은 이미 마족으로 가득 찬 세상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봤다면 섬뜩한 웃음이라고 말했겠지만.
* * *
“후….”
오늘은 태운이 강원도 사건의 공적을 인정받아 헌터 협회로부터 표창장을 받는 날이다.
하지만 태운은 그곳에 가지 않았다.
3일 전에 있던 우중충한 늪 던전 안에서 있던 사건 때문에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인철 헌터와 김기둥 헌터가 죽은 것에 원인 제공은 내가 했어.’자신의 불길함을 무시하고 그냥 돌아갔더라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태운은 3일 동안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빠, 밖에 누구 오셨어.”
“아, 알았어. 곧 갈게.”
태운은 윤아의 말에 힘없이 대꾸하고는 침대에서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으로 나온 태운을 맞이한 것은 허덕륜이었다.
“갑자기 오셨네요.”
“전화를 받지 그랬니. 잠깐 시간 되나?”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닐 테니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네.”
허덕륜은 태운의 집에 들어와 탁자에 앉았다.
“윤아야, 둘이 할 말이 있어. 방으로 들어가 줘.”
“으응….”
윤아는 방으로 들어갔고 태운도 선반에서 마정석 하나를 꺼내고 허덕륜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일런스 필드.’
태운은 마정석을 흡수하고 자신과 허덕륜의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마법을 사용했다.
“여전히 센스가 좋아.”
“감사합니다.”
허덕륜은 시작부터 본론을 꺼냈다.
“뭐부터 이야기해줘야 할까.”
“허덕륜 선생님의 과거를 이야기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알겠네.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건 어디에 발설하면 안 되는 이야기야.”
“알고 있습니다.”
허덕륜은 잠깐 쉬고 태운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데블스 에이지 시절, 나는 네 아버지 밑에서 싸웠다. 한때 전대섭 형님과 함께 강철운 대장의 왼팔, 오른팔로 불렸지.”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세 명이 있으면 병사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단다. 세 명이 모두 있을 때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니까.”태운은 어느새 허덕륜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일이 벌어졌지. 몬스터들만 상대하면 될 줄 알았는데 칠죄종의 괴수…. 아니, 마왕들에게 세례를 받은 녀석들이 나타났다.”세간에는 칠죄종의 괴수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들은 모두 지성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 인간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싸웠던 헌터들은 그들을 마왕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마르기가스 정도만 빼면 일반 인간과 다를 게 없었지. 그래서 그들은 테러, 살인, 유언비어, 포교 등등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며 인간의 체계를 내부부터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마르기가스와 다른 대원로인 레이지를 만나게 된 거지.”“마르기가스는 아는데… 레이지는 누구죠?”“칠최종 중 분노를 맡고 있는 사탄을 숭배하는 대원로다.”태운은 그 말을 듣고 마르기가스 같은 강함을 가진 적이 더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그때는 그들보다는 강했지만…. 둘을 이길 수는 없었지. 양팔은 마르기가스에게 먹혔고 무릎 아래로는 레이지에 의해 잘렸어. 그들은 저항할 수 없는 나를 해안 절벽에서 떨어뜨렸다네.”너무나도 끔찍했다.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중상, 하지만 그때 당시의 허덕륜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지. 이빨로 벽을 타고 올라 해안 절벽 중간에 있는 틈에 몸을 끼워놓고 빗물을 받아먹으며 3일을 버텼어. 과다출혈로 죽지 않게 상처를 마법으로 태우기까지 했지.”
“대단하시네요….”
“그때 강철운 대장님이 나타나 나를 살려주셨지. 지금 달려 있는 팔다리는 대장의 작품이야. 원래 몸보다는 성능이 좀 떨어지지만 말이야.”허덕륜의 눈은 강철운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품고 있었다.
“내가 상처를 회복하는 사이에 강철운 대장은 전쟁을 끝….”허덕륜은 갑자기 말을 하다가 갑자기 목이 막힌 듯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토해내듯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과거 전대섭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무튼 이 정도다. 지금 위장 신분으로 살고 있는 이유는 몰래 움직이기 쉽게 하려고 한 것뿐이니 걱정 말아라. 그리고 실력이 있는 놈이면 내 힘을 바로 알아채니까 전대섭 형님이 나한테 리미터를 좀 걸어두셨지.”“아, 그래서 강원도 던전 때 지금만큼의 힘을 못 보여주신 거….”“그래, 너희가 죽기 직전인 상황이었다면 리미터를 부숴버렸겠지만 말이다.”태운은 그의 이야기 덕분에 의문이 싹 풀렸다.
“그랬군요….”
태운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허덕륜에게 물었다.
“대원로, 그 녀석들의 힘은 어떤가요.”
태운은 마르기가스를 경험하긴 했지만, 그가 진심을 다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평범한 A급 헌터 5명은 달려들어야 겨우 싸움이라는 게 성립할 정도다. 전대섭 형님이나 검성 셀 정도의 헌터라면 한 명을 맡을 수는 있겠군.”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A급 헌터 5명이 달려들어야 싸움이라는 게 ‘성립’할 정도, 그 말은 사실 5명으로는 턱도 없다는 소리다.
전대섭이나 검성 셀 정도라면 혼자서 상대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A급 중에서도 이레귤러다.
‘전세계에 3~4명 밖에 없는 실력자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본거지는 확인된 바가 없어. 그들이 작정하고 게릴라전을 펼친다면…. 적어도 인류의 30%는 죽는다.’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태운은 그들을 상대할 방법을 강구했다.
수많은 방법들이 생각났지만 그 방법들에 빠지지 않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일단 내가 강해진다. 최소 한 명의 대원로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