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 *
“좋아…. 일단 다 처리했고…. 이제 시간도 얼마 안 남았네.”태운은 반역에 성공하고 하이튼 왕국과의 이해관계를 조정한 뒤, 막사에 돌아와 몸을 뉘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어차피 흡수를 하고 돌아가면 될 뿐이다.
[1시간 후에 트롤의 피의 효력이 다해 독소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태운은 품속에 넣어놨던 쪽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보자…. 두 명이 낳은 아이가 천재였다는 것까지는 들었던 거 같은데….”그 이후에 시비가 걸려서 듣지 못했었다.
태운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글을 읽어나갔다.
글만 봐도 바텐더의 말투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셋은 산속에 살았지만 부모의 능력이 워낙 출중했던 덕에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죠. 그들이 모시던 국가를 무너뜨리고 거대 제국이 된 적국이 그들을 찾아냈으니까요.’“징하네. 그냥 놔두면 조용히 살다가 죽었을 텐데 말이야.”‘하지만 그들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자신의 실력이 녹슬지 않게 매일 단련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적국이 보낸 자객들을 모두 처리하고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힘겨운 피난 생활이 시작됐죠.’
“참….”
‘하지만 그렇게라도 같이 있을 수 있던 때가 행복했던 것이었습니다. 적국의 왕실 마법사인 벨자하와 세 명의 제자들이 직접 나타나 그들을 공격했으니까요.’그 순간 태운은 뒤통수를 크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벨자하라고?”
벨자하는 과거 가도의 마정석을 흡수할 당시 마지막에 싸웠던 헤온 왕국의 마법사였다.
태운은 혹시나 하며 계속해서 읽었다.
‘결국에는 열세에 몰린 그들은 아들을 먼저 보내고 둘이 시간을 끌기로 정합니다. 둘은 두 명을 죽이고 벨자하와 그 수석 제자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죽고 맙니다. 그때 아들은 두 부모의 진짜 이름을 듣게 됐다고 합니다.’태운은 침을 삼켰다.
‘둘의 이름은 라온과 레일로프, 그들은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태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굿간으로 달려가려 했다.
뭐가 어떻게 되든 그 바텐더에게 다시 가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누군지 물어야 한다.
그 순간.
[독소가 트롤의 피를 이기고 다시 활동을 시작합니다.]
“크윽!”
태운은 심장을 부여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안 돼….”
태운은 천천히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려 했지만 감각은 천천히 멀어져만 갔다.
[클리어 조건을 충족한 상태의 정신 이탈로 즉시 흡수를 진행합니다.]
고통이 사라진 순간 익숙한 순간이 다가왔다.
“…레오입니까.”
눈앞에 있는 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들어가 있던 몸의 주인인 레오였다.
그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저기….”
레오는 별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한 탓에 수천 년을 원치 않은 학살을 해왔고 태운의 덕분에 겨우 해방되었으니까.
이젠 쉬고 싶을 터였다.
“…당신이 강해진다면 당신의 궁금증은 충분히 해결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레오는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태운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진정한 죽음이 임박했음에 기뻐하는 그를 어찌 잡을 수 있겠는가.
[특성 ‘트롤의 피’를 얻습니다.]
[스킬 ‘웨폰 마스터리’를 얻습니다.]
[모든 무기술 스킬이 웨폰 마스터리로 흡수됩니다. (LV.1→LV.3)]
[모든 신체 스탯이 ‘3’ 상승합니다.]
[변이된 마나 스탯이 오릅니다.]
[변이된 마나의 스탯이 오름에 따라 마정석 흡수와 마정석 저장의 레벨이 오릅니다.]
태운은 사라져가는 레오를 주시하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병실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태운은 자신의 상태창을 띄웠다.
강태운
LV:21
마나 총량:10
체력(69+5) 근력(76+5) 민첩(71) 유연성(34) 지력(94) 변이된 마나(3) 관찰력(38) 마나친화력(6)
특성
상위 특성-명장(3개)
변이된 마력(LV.M)
정직한 사냥꾼(LV.M)
트롤의 피(LV.M)
스킬
마정석 흡수(LV.6)[S]
마정석 저장(LV.4)[S]
상급 마법(LV.6)
웨폰 마스터리(LV.3)[S]
마법 파괴(LV.1)[S]
명중(LV.1)[S]
사고 가속(LV.2)[S]
적의(LV.1)[S]
고정(LV.1)[S]
오버 서플라이(LV.1)[S]
“진짜… 나 많이 강해졌구나.”
태운은 자신이 강해졌다는 것에 새삼 뿌듯함을 느꼈다.
5~6개월 전만 해도 아카데미 내 최악의 열등생이라는 타이틀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익스퍼트 등급에서 유망주 소리를 듣고 있다.
태운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고 새로 얻은 특성과 스킬을 확인했다.
[트롤의 피: 신체 수복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회복약과 회복 마법의 효율이 높아집니다. 근력과 체력 스탯 +5]
[웨폰 마스터리:모든 무기를 다루는 데 능숙해집니다.]
“신체 수복 능력이 대폭 상승한다라….”
노린 건 아니었지만 잘 만하면 5일 차 메인 경기인 1 대 1 토너먼트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길로 태운은 휴대전화를 들어 서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연아 미안한데 자하르 연구소 들러서 내일 마정석 좀 가져와 줄 수 있어? 내가 얘기해 놓을게.”-알았어. 근데 왜?
“음…. 그냥 쓸 일이 있어.”
* * *
“의사 선생님, 저 신체검사 한 번 해주시고 몸 상태 괜찮으면 명운전 출전 허락 부탁드립니다.”
“전치 12주라 했잖냐. 해봤자인데.”
“저 각성자인 거 잊으셨어요? 각성자의 몸은 완전히 해명된 분야가 없다잖아요.”태운은 3일 동안 수많은 마정석을 흡수하고 마나 회로를 돌리며 특성 트롤의 피를 활성화해 신체의 회복에 집중했다.
“그래, 알겠다. 대신 네 몸에 조금의 결함이라도 있다면 출전은 금지다.”
“네. 알겠습니다.”
태운은 의사를 따라가 온갖 신체검사를 받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의사는 태운의 몸 상태를 체크하더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 걸레짝이 되어있던 몸이 4일 만에 이렇게 멀쩡하게 나은 사례는 없었으니까.
“멀쩡하죠? 그럼 출전 허가해 주시는 겁니까?”“아니…. 이게…. 약속은 약속이니 해주기는 하겠다만…. 희한하네…. 학계에 보고서를 올려야 할 수준인데….”
“그럼 이거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허어…. 이게 말이 되는….”
태운은 출전 허가서에 사인을 받고 바로 학교로 달려갔다.
지금 기사단과 언더독의 스코어는 둘 다 금메달 5개.
언더독의 멤버들이 태운의 시나리오대로 잘해주었다.
연정아가 금메달을 따고 공성전에서 기사단을 집중 마크해 은메달에 그치게 할 수 있었다.
나머지 두 종목의 금메달은 어쩔 수 없이 기사단의 손으로 넘어갔지만 말이다.
이제 남은 건 원래 4일 차에 편성되어 있었지만 8강에서 16강으로 확장되어 5일 차로 분리가 된 1 대 1 토너먼트였다.
한 팀에서 두 명씩 나와 A블록 B블록이 토너먼트로 겨뤄 각 블록의 승자를 가려내 각 블록의 승자끼리 결승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나와 연정아가 나가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태운이 지금 상당히 신나 있는 이유는 좌절될 뻔했던 명운전 우승이 다시 눈앞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명운전이라는 거대한 자리에서 구찬영, 정일준, 아모스 시저 등등 강한 인물들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이 태운을 매우 흥분시켰다.
태운은 서류를 학교에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바로 푹 쉬었다.
내일 있을 경기에서 사용할 집중력을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명운전 5일 차의 날이 밝았다.
[모두 기다리고 기다리던 명운전의 하이라이트 오브 하이라이트! 1 대 1 대련 토너먼트의 날이 밝았습니다!]
명운전의 사회자는 마지막 날이니만큼 전보다 더욱 격앙되어 말을 이어나갔다.
[토너먼트의 룰은 간단합니다! 각 동아리에서 두 명을 출전시키고 둘을 각각 A, B 블록으로 배정합니다. 그리고 토너먼트를 통해 각 블록의 승자를 가리고 각 블록의 승자끼리 결승전을 치러 최종 우승자가 결정됩니다!]
“태운아…. 너 없었으면 내가 나갔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진짜…. 하….”신동연은 태운이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듯한 말을 계속했다.
언더독 멤버 중에 연정아와 태운을 빼면 가장 강한 사람은 라일렌과 신동연, 공진영 이 세 명이었다.
하지만 공진영은 이미 정성현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라일렌은 컨디션에 따라 실력이 천차만별이다.
그렇기에 태운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신동연이 토너먼트에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왔으니까 이제 그만 얘기해!”
홍유리가 신동연의 등짝을 때리며 말했다.
“하아…. 다행이다….”
신동연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아니었다.
팀의 우승을 걸고 지금까지의 노력을 등에 업고 싸우는 것이었기에 그 부담감이 실로 상당했을 것이다.
“괜찮아요. 이제 내가 왔으니까.”
태운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중하급 마정석을 주머니에 두둑이 챙겨 넣고 대기실의 문 앞에 섰다.
‘슬슬 마법 수준도 높아지니 마정석 챙기는 것도 일이네…. 방법을 찾아야겠는데….’처칠의 물건을 구매하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가격이 상당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경기 예정 시간이 되었고 대기실의 스피커가 울렸다.
[A 블록 첫 번째 경기, 적사단의 셀과 언더독의 강태운입니다.]
“다녀올게.”
“잘하고 와.”
“화이팅.”
태운은 대기실의 문을 열고 경기장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갈 때마다 관객의 환호성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 고양감…. 잊기 힘들 것 같아.’
고작 일주일, 아니 태운에게는 한 달이 넘는 기간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관중의 환호성이 주는 고양감을 잊은 과거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운은 케이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케이지 안에는 셀이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태운,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그냥 쓰러져 줄 수는 없어.”
“음…. 알겠습니다.”
“이 자식…!”
셀은 자신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태운에게 불쾌함을 느꼈다.
셀의 무기는 검이었고 태운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헌터 랭킹 2위 검성도 이름이 셀이네.’태운은 주머니 속 마정석을 꺼내 손에 쥐었다.
[경기의 종이…… 울렸습니다!]
“하이 부스트.”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태운의 뒤에 들리자 태운은 신체를 강화하고 빠르게 셀에게 달려들었다.
뻐-억!
경기 시작 2초 만에 태운의 무릎이 셀의 턱에 박혔고 그 공격으로 셀은 단번에 기절하고 말았다.
승패는 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