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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먹는 헌터-62화 (62/379)
  • 62화

    중계진들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1~5번째 벽까지는 단번에 부수는 게 기본 소양일 정도로 쉬운 난이도였으니까.

    하지만 6번째부터는 말이 달라진다.

    “5번 주기로 강도가 두 배가 된다라….”

    즉 6번, 11번, 16번에서 난이도가 확 뛴다는 것이다.

    마침 그 생각을 하던 때 6번째 벽이 솟아났다.

    쾅!

    그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벽을 가격했고 단번에 가루가 되지 않는 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먹을 맞은 곳을 중심으로 사방에 금이 가 있었지만 벽이 깨진 것으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쾅!

    홍유리는 때린 곳을 또 때려 벽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그때부터 중계진들은 홍유리에 대해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오, 대단합니다. 난도가 확 올라가는 구간이라는 6번째 벽을 주먹 단 두 방에 클리어했습니다.]

    [처음 주먹 한 방에 벽 전체에 금이 간 것을 보셨나요? 사실 이건 한 방에 부쉈다고 봐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들이 칭찬하는 소리는 경기장 안으로도 들렸지만 홍유리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거슬리는 긴 적발을 뒤로 넘긴 채 7번째 벽을 올려다보았다.

    “한 방.”

    쾅!

    홍유리는 태운이 알려준 한 단계 높은 레벨의 신체 강화를 사용하고 벽을 가격했고 그 벽은 단번에 산산조각 났다.

    [한 번입니다! 홍유리 선수가 단 한 번의 주먹으로 7단계의 벽을 부숩니다!]

    “다음 것도 한 번에….”

    그렇게 8번째, 9번째, 10번째도 순식간에 부숴 버린 홍유리는 11단계의 벽을 마주했다.

    [여기가 관건이죠! 11단계의 벽은 매우 단단합니다! 많은 선수들이 11단계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12단계에서 절망하니까요!]

    [과연 홍유리 선수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

    툭툭.

    홍유리는 이번엔 벽을 한번 가볍게 두드려 보았다.

    이번엔 그냥 주먹으로는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아주 가볍게 직선으로 주먹을 뻗을 수 있는 자세로.

    “울려라….”

    그러곤 아까와는 달리 아주 평범한 속도로 벽에 주먹을 가져갔다.

    툭.

    약하게 벽에 주먹이 닿은 순간.

    콰앙!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쩌적…. 펑!

    벽은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소란이 난 관중들을 뒤로 한 채 다시 솟아난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11단계의 벽은 큰 의미가 아닌 부수었어야 할 벽일 뿐이었으니까.

    홍유리는 그렇게 25번 벽에서 마나를 모두 사용하고 기브업을 외쳤다.

    그녀의 랭킹은 지금까지 1위였다.

    참고로 현재 2등은 기사단의 세인이었고 그는 20번째 벽까지 부쉈다.

    그리고 종목의 마지막을 장식할 사람이 나타났다.

    2m에 가까운 거구가 천천히 경기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의 몸을 둘러싼 거대한 근육은 앞에 선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위축이 되게 만들었다.

    “후우우우….”

    시저는 평소에 항상 몸에 힘을 주고 다닌다.

    어렸을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생긴 습관이었지만 지금 그는 몸에서 힘을 뺐다.

    최대한 주먹에 힘을 주기 위해서였다.

    [시저 선수는 익스퍼트 등급 내에서 가장 근력 스탯이 높기로 유명하죠?]

    [마법을 쓰는 실력도 훌륭해서 신체 강화 마법의 효율도 좋다고들 합니다.]

    중계진은 시작부터 시저의 칭찬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저가 그동안 엄청난 실적들을 세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쿵!

    그는 거대한 주먹으로 벽을 때렸고 벽은 한 번에 부서졌다.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었고 부서짐과 동시에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진 것이다.

    “……맙소사.”

    태운은 그 장면을 보고 직감했다.

    이번 종목의 1등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쿵!

    쿵!

    쿵!

    근력 스탯이 현역 B급 헌터와 비슷한 수준인 그는 벽을 계속해서 부숴나갔다.

    10번째를 넘어 11번째 벽을 마주한 순간에도 그는 똑같이 주먹을 휘둘렀고 똑같이 벽은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지금 제가 뭘 보고 있는 거죠…?]

    […….]

    그의 힘은 학생 수준의 힘이 아니었다.

    시저는 이미 현역으로 활동해도 좋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홍유리가 진동 마법을 쓴다고 해도…. B급 현역 수준의 괴물은 못 이기지.’그는 이번 연도에 익스퍼트를 통과하고 마스터로 가지 않고 바로 헌터가 되겠다는 말을 했었다.

    마스터 등급에서 1년이라도 훈련을 하면 사회에 나와 받는 대우가 확 바뀐다며 그의 선택을 나무라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가 생각을 바꾸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큰 문제 없이 1년 정도만 헌터로 활동하면 A급 헌터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이다.

    쿵쿵쿵쿵!

    시저는 순조롭게 20번째 벽을 부수고 21단계 벽에 주먹을 난타해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언더독의 멤버들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진짜 대단하긴 하네.”

    “그러게.”

    “저렇게까지 쉽게 부수는 건 처음 보네.”

    그 순간 태운의 머릿속은 많이 복잡해졌다.

    ‘일단 금메달 두 개…. 아직까진 안정권이긴 하지만….’명운전에 참가하는 이유가 오로지 자기만족이었던 태운이 이렇게까지 순위에 집착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처칠과의 거래 내용에 있었다.

    ‘후…. 아직 기회는 있어. 진정하자.’

    태운이 머리를 붙잡고 고민을 하던 사이, 시저의 경기는 끝이 났고 중계에선 결과를 송출해주고 있었다.

    [적사단의 아모스 시저 선수! 32개! 1위입니다!]

    당연히 반전은 없었다.

    시저는 1위, 홍유리 2위로 격파 종목의 끝이 났다.

    중계화면에서 결과 발표가 끝나자 홍유리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태운은 그녀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모두를 집중시켰다.

    “다들 잘해줬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남았어요.”그건.

    [점심시간 1시간 30분 후 ‘깃발 빼앗기’ 경기를 진행하겠습니다.]

    바로 명운전의 꽃 중 하나인 ‘깃발 빼앗기’였다.

    깃발 빼앗기의 룰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한 면이 있었다.

    각 팀에게는 10개의 깃발이 주어진다.

    상대방의 깃발을 빼앗아 자신의 진영에 꽂으면 30점이 추가되고 팀의 깃발이 다른 진영에 꽂히면 50점이 마이너스가 된다.

    그리고 특별 룰로 상대방의 체력을 모두 소모시켜 리타이어 시키면 30점이 추가된다.

    “그리고 포인트가 0점이 되면 탈락입니다. 기본적으로 300점이 주어지고요.”태운은 언더독 팀원들에게 깃발 빼앗기의 룰을 알려주고 작전을 설명했다.

    “일단 우린 적사단이랑 연합을 할 겁니다.”오늘 대표전에서 적사단이 많이 초라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전체적인 평균만 보고 따지자면 기사단, 언더독 다음으로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적사단이랑 연합에 성공하면….”

    태운은 점심을 주문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작전을 설명했다.

    약 20분 정도 작전을 설명하다 보니 점심이 도착했고 태운은 작전 설명을 끊었다.

    “일단 밥 먹고 다시 작전 설명할게요. 작전의 핵심은 우리가 1등을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기사단이 1등 하면 힘들어집니다. 그거만 명심해요.”적사단은 예선에서 충분히 견제를 해두었으니 1등은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장 견제해야 하는 것은 기사단과 신가연이 속해있는 마령이다.

    기사단은 애초에 전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견제를 안 할 수 없는 곳이고 마령은 신가연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실력이 크게 향상되었기에 충분히 위협적인 상대다.

    “아무튼 작전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일단 밥 먼저…. 네, 감사합니다.”태운은 문을 열어 배달시킨 도시락을 받았다.

    받아든 도시락은 언더독의 멤버들에게 나눠주었고 본인도 의자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불고기와 김치, 오징어 젓갈 등의 반찬이 들어 있는 한식 도시락이었다.

    “오, 이거 맛있는데?”

    “그러게.”

    신동연을 시작으로 다들 맛있다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흠….”

    태운은 그때도 심란한 표정으로 작전을 가다듬고 있었다.

    ‘시저는 그렇다 치고 적사단 멤버들을 설득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일단 시저가 나서주면 편하지만 꼭 그래 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텐데….’그런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다 보니 어느 순간 도시락은 바닥을 보였고 식사 시간도 꽤 지난 상태였다.

    언더독의 다른 멤버들도 대부분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자, 다들 맛있게 먹었으면 다시 작전 회의 시작합니다.”

    “알았어.”

    현재 언더독의 성적은 금메달 두 개와 은메달 하나.

    3개의 종목만을 실시했다고 봤을 땐 어마어마한 성적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태운의 머리가 복잡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일부터는 우리가 딸 수 있는 메달 수가 한정적이야.’오늘은 언더독의 멤버들의 특기와 잘 맞물리는 종목의 경기가 진행될 것이다.

    공진영은 예전부터 빠르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김기열은 김지열이 됐을 때 아카데미 내에서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 뛰어난 센스를 보여준다.

    홍유리도 아깝게 2위를 하긴 했지만 충분히 1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확실하게 1등을 할 수 있는 종목은 단체전을 제외하면 3개….’언더독이 따지 못한 종목의 1등을 전부 기사단이 한다는 최악이자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상황을 전제하고 총 15개의 종목 중 최소 7개의 금메달을 따야 종합 우승을 노릴 수 있다.

    이미 종목 하나의 1등을 적사단이 가져갔으니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다.

    ‘내가 나가서 딸 수 있는 금메달 수는 2개에서 3개.’거기서 태운의 고민이 늘어났다.

    찬영을 내보내 1등을 노릴 몬스터 잡기에 나가 기사단의 1등을 방해할까 아니면 다른 종목에 나가 확실한 1등을 노릴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찬영을 견제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기사단의 우승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그만큼 우승이 힘들어진다.

    “일단 개인 대전이랑 테이밍 종목은 나갈 거고….”개인 대전은 다른 대표전과 달리 출전에 제한이 없다.

    그런 만큼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종목이기도 하다.

    “아, 몰라. 일단 당장 급한 것 먼저 생각하자.”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30분 뒤에 시작하는 깃발 빼앗기에서 어떻게 적사단을 꼬드길 것인가이지 다른 게 아니다.

    그때 태운과 언더독을 포함한 명운전 참가자 모두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30분 후에 깃발 빼앗기 종목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강유도로 이동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알립니다. 30분 뒤….]

    그 말을 듣고 언더독 대기실의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대회 준비를 시작하기 전에는 모두 우승을 노린다는 태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훈련을 하고 강해진 자신들과 3종목 동안 얻어낸 성적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언더독 대기실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적어도 언더독 우승이 허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언더독의 멤버들은 음성 공지를 듣고 동시에 태운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던 태운은 그들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한 가지 결정했다.

    “고민 안 할랍니다. 가죠.”

    태운은 그렇게 언더독의 멤버들을 데리고 강유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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