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 *
“여긴….”
마정석 흡수를 실행한 태운은 한 동굴에서 깨어났다.
동굴의 크기는 꽤 컸고 차가우면서 습한 것을 보니 동굴 안에는 큰 호수가 있는 것 같았다.
“무기는…. 상태 괜찮네.”
잘 정돈된 롱소드 한 자루와 백금으로 도금된 갑옷까지.
장비의 상태만 보면 최상급 기사의 기세가 엿보였다.
어디 신전의 성기사인가?
그때
“여! 가일!”
“저녁 시간 다 되어가는데 안 오길래 찾으러 왔어.”“내일이 개시일이니까 오늘은 든든하게 먹어야지.”뒤에서 여자 한 명과 덩치 큰 남자 둘이 나타났다.
여자는 적발에 적안을 가진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남자들은 한 명은 중년미가 풀풀 풍기는 아저씨였고 나머지 한 명은 앳된 얼굴로 키가 2미터에 가까운 굉장히 어색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3명의 장비 상태도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어? 어 그래야지.”
태운은 아직 몸 주인의 기억이 들어오지 않아서 일단은 대충 얼버무렸다.
[가일과의 동기화율이 ‘20%’로 조정됩니다.]
그 알림과 함께 태운의 머릿속으로 가일의 기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궁수였고 이름은 로난이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사 능력으로 플래티넘급에 오른 용병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남자들은 각각 셀과 갈리오였다.
아저씨 쪽이 갈리오였고 어린 녀석이 셀이었다.
갈리오와 셀도 플래티넘급 용병이었고 둘 다 전방에서 탱킹과 딜링을 동시에 하는 전사였다.
모두 한 실력 하는 용병들이었다.
‘근데 내 능력치는 왜 이래…?’
가일
LV:15
마나 총량:175,439
체력(21) 근력(25) 민첩(10) 유연성(8) 지력(12) 잔머리(50)
특성
사기꾼(LV.M)
스킬
초급 검술(LV.4)
초급 방패술(LV.3)
‘이게 뭐야…?’
태운은 가일의 능력치를 보고 이 녀석은 어떻게 플래티넘 용병 배지를 달고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타이밍 맞게 그것에 대한 기억도 들어왔다.
‘뭐야…. 이 새끼 사기꾼…이었어?’
가일은 처음 참가한 파티의 파티원들이 몬스터를 사냥한 후 자신의 실수 때문에 파티원이 모두 죽자 비난이 두려워 이야기를 하나 지어냈다.
어쩌다 보니 그 이야기가 잘 먹혔고 어느 순간 파티원들의 공적이 모두 가일의 공적이 되어있었다.
가일은 그것 덕분에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가일이 거짓말로 공적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
어릴 적부터 뛰어났던 언변이 작용해 모두를 속일 수 있었다.
그렇게 3년, 가일은 플래티넘 용병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거 순 사기꾼이잖아?’
그때 태운은 임무를 알리는 알림창을 보게 되었다.
[이 동굴 안에는 500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습니다. 동료에게 가일의 사기 행각을 들키지 않고 공략에 성공하십시오.]
“…미친.”
가도의 경우에는 열심히 임무를 수행할 맛이 났는데 이번엔 시작부터 기운이 확 빠졌다.
다짜고짜 사기를 치라니?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
게다가 난이도도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이 스탯으로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커녕 전투에 섞이기만 해도 죽을 것이다.
가일은 이 파티의 대장을 맡을 정도로 명망이 높은데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다.
‘가일 이놈은 그동안 어떤 구라 인생을 살아온 거야?’한 번의 퀘스트를 거짓말로 깨는 것도 태운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막막한데 이걸 3년 동안 해왔다니?
정말 다른 의미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운은 그들을 따라 걸으면서 이 임무를 어떻게 깨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쩌-적.
“어…?”
“로난 피해!”
“응?”
천장에 달린 거대한 종유석이 깨지면서 로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워낙에 뜬금없이 벌어진 일이었기에 로난은 머리 위에 종유석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종유석이 매섭게 떨어지는 순간
“리버스 그래비티.”
태운은 무심하게 역중력 마법을 사용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떨어지던 종유석은 로난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로난, 비켜.”
“어…. 으, 응 알겠어.”
쿵
로난이 안전거리까지 멀어진 후 태운은 역중력 마법을 풀었다.
‘안 그래도 임무 때문에 가뜩이나 생각이 많은데….’
“어이, 가일 너 뭐야?”
“왜.”
“네가 왜 마법을 써.”
[가일의 스킬 목록에 ‘상급 마법(LV.7)’이 추가됩니다.]
“아….”
찾았다.
이 임무를 깰 방법을.
“뭘 멍때리고 있어? 어떻게 쓰는 거냐니까?!”하지만 지금 바로 앞에 있는 갈리오가 눈에 불을 켜고 따지고 있었으니 일단 이 일부터 얼버무려야 했다.
지금 갈리오가 파티원을 구한 태운에게 이렇게까지 따지는 이유가 있었다.
6개월 동안 함께했던 파티원에게 자신의 전력을 숨겨왔다는 것.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1개월 전에 페일 죽었을 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
태운은 가일의 기억 속에서 페일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았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페일은 2개월 전 숲에서 있던 몬스터 토벌 퀘스트를 진행할 때 전사한 마법사 파티원이었다.
당시 마법을 쓸 수 있는 인원이 한 명뿐이었던 파티 앞에 날붙이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가 나타났고 파티 전체가 위기에 처했었다.
그때 나선 사람이 페일.
그는 파티원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가득한 마나를 매개로 폭발 마법을 사용했다.
그 결과는 몬스터와 페일의 동귀어진.
페일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네.’
가일이 그때 아무것도 안 한 이유는 뻔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 마법을 사용한 것도 가일의 몸에 들어온 태운이 사용한 것이었지 가일이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마법을 못 썼어.”
어떤 변명을 하든 인정 받을 방법이 없을 거라 생각한 태운은 그냥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뭐? 그럼 네가 한 달 만에 역중력 같은 상급 마법을 익힐 정도로 마법을 빠르게 배웠다는 거야? 헛소리하지 마. 도대체 왜 그때 마법을 안 쓴 거냐고!”“가, 갈리오 진정해 봐. 가일도 이유가….”
“빌어먹을 이유는 무슨!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한들 페일은 그렇게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로난이 갈리오를 말려보았지만 갈리오는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태운은 침착하게 갈리오를 설득해보려 했다.
“사실이야. 그때는 마법을 쓸 수가 없었….”그 순간 태운의 뇌리에 스치는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네가 알아…?”
“뭐?”
태운은 이를 악물고 갈리오를 노려보았다.
가일의 눈에는 독기가 서린 듯 실핏줄들이 터져 있었고 눈물도 맺혀 있었다.
“이 빌어먹을 저주 때문에 마법을 쓸 수 없어서 페일이 죽으러 가는 걸 말리지 못한 내 심정을 아냐고!”
“야, 가일…. 그게 무슨 소리….”
“3년 전, 그날 내가 모든 동료를 잃고 혼자 돌아온 날…. 그 던전의 보스가 나에게 저주를 걸었어. 내 마나를 봉인하도록….”
“그럼 지금은….”
“지금은 그 저주가 풀렸어…. 한 달만…. 한 달만 빨리 풀렸어도….”태운은 풀썩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파티장이잖아…. 선택은 내 몫이잖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잖아….”태운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페일이 죽으러 간다는데 허락한 내 마음을 네가 알아…?”태운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갈리오와 눈을 맞췄다.
그때 갈리오는 깨달았다.
가장 힘든 건 가일일 것이라고.
“후…. 미안하다. 내가 너무 흥분했어.”
“…아니다. 이런 걸로 싸워 뭐하겠냐.”
그 순간 태운은 놀란 마음을 애써 다스리고 있었다.
‘방금 내가 뭘 한 거지?’
가일과 약간은 동기화가 되어있는 태운은 알 수 있었다.
가일은 페일이 죽은 것에 전혀 책임감이라든가 슬픈 감정은 없었다.
즉, 방금 행동들은 전부 ‘연기’였다는 것이다.
‘맙소사….’
덕분에 3년 동안 들키지 않고 사기를 치고 다닐 수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일은 사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기꾼이었다.
“하….”
이 상황은 태운에게 이롭게 작용할 것이고 이대로만 간다면 퀘스트를 쉽게 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운은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잠깐, 가일 뭐 하는 거야!”
태운은 매직 미사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머리가 날아간 태운은 즉사,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약 10초 뒤 모니터를 보던 자하르가 기겁해서 태운에게 달려왔다.
“야, 너 왜 그래? 왜 네 머리에….”
“이대로 깨면 안 됩니다.”
“뭐?”
태운은 지금까지 마정석 흡수를 해오면서 알아낸 것이 있었다.
첫 번째는 마정석이 어떤 식으로 생기는지에 관한 것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몬스터가 죽었을 때 그 잔여 마력이 돌이나 나무 같은 소재와 결합하게 되면 그것이 마정석으로 변하는 것이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태운이 흡수를 시도하고 있는 특이한 마정석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잔여 마력뿐만 아니라 주인의 의지까지 깃들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알아낸 다른 것은 바로 보상에 관한 것이었다.
“임무를 클리어하고 마정석을 흡수할 때 받는 보상은 세 가지로 나뉘는 거 같아요.”
“어떻게?”
“첫 번째는 각종 스탯들이죠.”
이건 어떤 마정석을 흡수해도 얻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보상이다.
F급 마정석을 흡수해도 스탯은 오르니까.
“그다음은 마정석 주인의 특기 중 하나를 받아요.”이건 의지가 있는 마정석에 한해 얻을 수 있는 보상.
예를 들어 필사의 창술이나 가도에게 얻은 선봉장과 대담한 전술가 같은 특성들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보상이 제가 이번 클리어를 포기한 이유입니다. 세 번째 보상은 제 행보를 반영한 보상일 거예요.”가도의 마정석을 흡수하고 얻은 특성인 ‘효학반&스승’이 그것이었다.
“아직은 표본이 적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죠.”
“표본?”
“첫 번째 표본은 가도의 마정석이죠. 제가 잭, 레일로프, 라온을 가르쳐서 얻은 특성이 있거든요. 두 번째 표본은 적의를 얻었던 마정석입니다.”태운은 가도의 마정석을 흡수하면서 틈틈이 흡수했던 마정석의 기억을 떠올렸다.
완전히 타락해 버린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인간 말종들을 하도 많이 봐서 언제나 경계하고 살의를 내뿜고 다녔었다.
그렇게 클리어하고 얻은 스킬이 바로 적의.
태운은 그것으로 클리어까지의 행보가 최종 보상에 반영된다는 결론을 내놓을 수 있었다.
“호오…. 그런 규칙도 있었던 건가…. 정말 끝이 없구만.”“저대로 깼으면 전 사기꾼 특성이나 그와 관련된 스킬을 얻었을 거예요. 사실 그런 건 제 성격에도 안 맞고 쓸모도 없거든요.”사실이었다.
태운은 누군가를 속여서 이용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눈앞에서 말을 해버리는 타입이다.
“그렇지. 자네에게는 맞지 않는 특성이겠군.”“그래서 거짓말은 안 하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합니다.”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하는군.”
“결실이 더 달아진다면 조금쯤은 돌아가도 될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