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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먹는 헌터-26화 (26/379)
  • 26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바로 마정석 흡수를 사용했다.

    마정석 흡수를 사용한 태운은 너무나도 익숙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그 옆에는 문터틀 요새의 함락을 보고하러 온 레일로프가 있었다.

    “레일로프, 진정하고 나의 말을 들어보거라.”태운은 레일로프가 깨우기 전에 먼저 말을 걸었다.

    깨우기도 전에 일어난 태운을 보며 레일로프는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곧바로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예.”

    “지금 문밖에 있는 잭은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게 무슨…?”

    레일로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믿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만은 알아두거라.”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레일로프는 진지한 태운 아니, 가도의 모습을 보곤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무언가에 대한 자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괜찮다. 너는 내 옆에서 잭을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바라보고 있기만 하면 된다.”태운이 자하르에게 했던 말도, 지금 레일로프에게 하고 있는 말도 모두 근거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가도와의 동기화율이 70%가 넘어가면서 가도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어쩌면 자기 자신도 인정하기 싫어할 옛 기억까지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나가지.”

    “…네.”

    레일로프는 고개를 숙이고 가도를 따라 나왔다.

    태운은 방문을 열고 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잭에게 다가갔다.

    “잭.”

    태운이 잭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평소의 가도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바로 연민과 동정, 그리고 공감이었다.

    “부, 부르셨습니까.”

    평소완 다른 가도의 모습에 잭은 긴장하며 대답했다.

    그런 잭에게 태운은 두서없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잭, 나에게 동생이 있었다고 말했었나.”

    “네…? 아, 네 그랬었습니다.”

    “어떻게 죽… 어떻게 나의 곁을 떠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잭을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난 테렌 왕국에서 군인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다. 지금은 헤온 왕국의 속국이 된 번 왕국에서 군인이 되었지.”레일로프도 잭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현재 테렌 왕국의 국왕과 헤온 왕국의 국왕밖에 없다.

    “잭, 어릴 적 나도 너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무… 무슨….”

    “시치미 뗄 것 없다. 다 알고 있고, 너를 탓할 생각 또한 없으니.”태운의 가볍고도 단호한 말투에 잭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진정하고 잠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태운은 자신의, 가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형!”

    “형아!”

    “그래, 그래. 우리 동생들 오랜만이네!”

    베이람, 21세.

    번 왕국에서 가장 능력 있는 장군, 게일의 측근 부하로서 미래가 창창한 청년이다.

    그가 오랜만에 동생들이 있는 진짜 집으로 돌아왔다.

    “형아! 이번 싸움에선 무슨 일 있었어? 알려줘!”

    “빨리빨리!”

    베이람에게 그의 동생 3명이 달려들며 그의 무용담을 기다렸다.

    “얘들아, 오랜만에 집에 온 형 그만 괴롭혀라!”“아아. 유모, 괜찮아요. 얘들 보면 오히려 피로가 싹 날아가는걸요.”어려서 부모를 잃은 베이람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남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었다.

    도둑질, 소매치기, 강도까지 어떤 험악한 일이라도 돈이 된다면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었다.

    그러다 게일이 영주가 된 이후 치안 정책 때문에 덜미가 잡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생들만은 어떻게든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는 모습을 본 게일 장군이 그럼 군인이 되라는 제안을 했고, 그 때문에 군인이 되었다.

    “유모 고마워요. 덕분에 애들도 바르게 자라고 있는 것 같아요.”“뭘요. 일당을 많이 쳐주시는 덕분에 저희 살림도 많이 나아졌답니다.”베이람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사람 중 한 명, 집안일과 동생들을 봐주는 유모다.

    야무지게 일하면서 동생들을 정말 자신의 자식인 것처럼 훈육도 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바로바로 충족시켜주는 열정을 가진 그런 사람이었다.

    “아마 내일은 좀 늦게 들어올 것 같은데. 저녁까지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죠.”

    역시 믿음직한 유모라고 생각했다.

    “형아~ 빨리~.”

    “그래. 알겠어. 이번에는 말이야….”

    베이람은 항상 전선에 나서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이었지만 행복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흐으으으….”

    다음 날, 장군과의 특별 훈련이 있어 늦게까지 연병장에 있다가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집에 들어가는 골목에 들어서자, 평소엔 느낄 수 없던 위화감이 들었다.

    조그마한 소음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아무리 늦어도 기다리겠다며 자지 않는 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최대한 경계하며 한 발씩 걸음을 옮기던 중.

    ‘피 냄새다!’

    그때부터 마음이 급해져 한달음에 집까지 달려갔다.

    집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무거워지는 가슴에 시간은 매우 느리게 지나갔다.

    벌컥!

    마침내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지만 역시나 베이람을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 유모.”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유모를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집으로 발을 들인 순간.

    툭.

    “유모…?”

    유모의 목만 덩그러니 줄에 매달려 흔들리며 베이람의 어깨를 건드렸다.

    철-렁.

    “얘들아!!!”

    유모의 죽음을 확인한 가도는 황급히 동생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생들이 나타날 리는 없었고, 텅 빈 방 안에 혼자 남아 무너져 내렸다.

    10살이 되면서부터 온갖 궂은일을 마다치 않았던 그가.

    15살에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고 군대에 합류했던 그가.

    20살에 한 부대의 장을 맡아 지휘해 큰 공을 세운 강인한 그가.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때 베이람은 벽에 붙어 있던 한 쪽지를 보게 된다.

    「네 동생들을 살리고 싶은가?」

    장문의 쪽지였지만 그의 눈에는 맨 위의 문장만 들어왔다.

    그 쪽지는 번 왕국과 전쟁을 하고 있던 헤온 왕국이 보낸 것이었고, 번 왕국을 멸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다면 동생들을 살려주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은인이자 스승인 게일 장군을 암살하고 허수아비를 그 자리에 앉혀 번 왕국의 멸망을 도모했다.

    그것에 걸린 시간은 불과 일주일.

    동생들을 살리겠노라 다짐한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번 왕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베이람은 몰래 빠져나와 헤온 왕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동생들은 이미 일주일 전에 교수형을 당해 저잣거리에 버려졌던 것이다.

    헤온 왕국 측에선 애초에 베이람의 동생들을 살려둘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베이람은 수많은 암살 시도 끝에 이 더러운 작전을 생각해낸 머리를 몸과 분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생의 회의를 느끼며 천천히 죽어가던 그때, 테렌 왕국의 인사가 저잣거리에서 죽어가던 베이람에게 말을 걸었다.

    “베이람, 당신에게 헤온 왕국에 복수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베이람은 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허, 나에 대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가.”“당신이 우리 테렌 왕국에 와준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지요.”“나에게 그런 힘은 없어. 이미 끝난 인생이다. 나에겐 이제 한 줌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아.”“동생분들의 복수는 이미 끝난 겁니까? 그런 탐욕스런 돼지의 목을 자른 것으로 그 어린 영혼이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겁니까?!”그 말의 베이람은 심장이 사슬에 옥죄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19살에 적군에게 사로잡혀 고문을 받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동생들을 살리겠다고, 나와 동생을 모두 살 수 있게 도와준 은인을 죽였고, 몸담고 있던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나라의 멸망으로 고통받고 있을 번 왕국의 국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베이람, 당신은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죄인입니다.”

    “…알고 있다.”

    “그 죄는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을 테죠.”

    “그것도… 알고 있다.”

    테렌 왕국의 인사는 베이람에게 말했다.

    “그럼 한번 저지른 죄를 한 번 더, 헤온 왕국의 귀족들에게 저질러 줍시다. 그들의 인생을 나락으로.”

    “…나더러 지옥으로 떨어지라는 거군.”

    베이람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앞으로 베이람이라는 이름은 버린다. 내 이름은 가도. 헤온 왕국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가도로 살겠다.”어차피 지옥에 떨어질 거, 나를 이렇게 만든 녀석들에게도 지옥을 보여줘야겠다.

    * * *

    잭은 가도의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혼란스러워했다.

    “그렇다면… 이미 제 동생들을….”

    “나도 확정 지어서 말하고 싶진 않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쾅!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레일로프가 벽을 세게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대책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 분노하는 것이리라.

    털썩.

    “얘들아…. 얘들아…!!”

    잭을 주저앉아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가도는 잠시 그에게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로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준 것만으로도 매우 고마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레일로프가 다가와 가도에게 물었다.

    첫 번째 인생 또한 헤온 왕국에 의해 망쳤고, 베이람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가도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두 번째 인생 또한 헤온 왕국에 의해 끝날 위기에 처했으니까.

    “괜찮다. 드디어 이 더러운 헤온 왕국과의 끝을 맺을 기회가 왔으니까.”

    “예?”

    레일로프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적의 선발대만 1,000이고 본대까지 합하면 5,000이다.

    문터틀 요새를 함락한 헤온 왕국군은 그 주변 마을에서 남자들을 징발해 더 많은 군대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세라오니의 병력은 500에 불과했다.

    전황의 불리함을 알게 된 병사들이 탈영을 시도한다면 더욱 힘든 전투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긴 송구합니다만… 이 상황을 타파할 좋은 계략이라도 있으십니까?”“선발대만 잘 막아낸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게다.”그때 잭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잭은 분노에 멀어 버린 눈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만큼은 냉정했다.

    그것을 알아챈 태운은 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번 전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너와 레일로프 둘이 해줘야 할 것이 많아.”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잭의 눈빛을 본 태운은 레일로프에게 명령했다.

    “레일로프, 백성들을 징발하라. 창칼을 사용하지 못해도 좋다. 팔다리 성한 성인 남성이라면 모두 징발하라.”

    “알겠습니다!”

    한 명이 귀중한 시점이다.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다.

    “잭, 너는 이번 전투에서 빠진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잭이 역정을 내며 억울함을 표했다.

    여기서 가장 분통 터지는 사람이 누군지 당신이라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으냐고.

    태운은 그런 잭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기적을 행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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