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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207화 (207/211)
  • 딥 인사이드 아웃 (214)

    우린 빛이 필요해

    “나는 이 상황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

    총성, 폭음 그리고 비명.

    디그러쉬의 모든 정수가 집약되어 있는 이 거대한 지하 연구 시설이 습격받은 지 이제 30분 정도 지났다.

    그 말인즉슨, 디그러쉬의 훌륭한 인재들과 위대한 발명품들이 적들을 상대로 30분이라는 시간밖에 벌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무한 동력 기관을 빼돌린 디그러쉬는 긴급 호송대를 편성해 주요 인사와 장비를 챙겼다.

    이대로 가장 가까운 중국 베이징 지저 도시로 도망치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피해를 복구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노신사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양원에서 느긋한 오후를 즐기고 있는 노인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VIP 전용 좌석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무한과 영원에 대해 연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전혀 다른 ‘끝’이 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네. 그 청년, 자네의 아들이라면 틀림없이 여기까지 파고들 테니까.”

    “그런 패륜아는 더 이상 제 자식이 아닙니다.”

    “허허, 자네는 무명이 되면서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딱 하나, 유전자만큼은 버릴 수가 없다네. 그건 번식하는 생명체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족쇄일세. 그래서 나는 평생 자식을 만들지 않았지. 무엇에게도 속박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고, 신경 쓸 일도 없는 삶을 원했으니까.”

    “저 역시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명이 된 겁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초월하고, 마침내 완벽해지는 미래를 위해서……!”

    “하지만 자네의 아들은 과거의 망령처럼 바짝 따라붙지 않았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미래가 그 청년의 과거에 집어삼켜지고 있네.”

    “…….”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현재일세. 그 청년은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로 이어지는 탄탄대로를 깨부수고, 현재에 정착해서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은 걸세. 거기에 대의 같은 건 없네. 정말로 대의가 있었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협조했겠지.”

    “그놈이 고작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겁니까?”

    “자네도 같지 않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무명이 되었지.”

    “……!”

    느리지만 강단이 있는 노신사의 지적에 박한화는 잠깐이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유능하다. 한없이 완벽에 가까운 남자다. 또한 야망도 크다. 그렇기에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무명이 되었다는 말을 부정할 근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말하지 않았나. 피는 못 속인다고. 자네가 욕심을 부렸듯이, 그 청년도 욕심을 부리는 것뿐일세.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 자네 부자들은 정말 판박이처럼 닮았어.”

    “미래를 보는 혜안도 없고, 대의를 품을 도량도 없고, 그렇다고 마땅한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닌 무능한 놈이 저와 똑같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들은 없어도 상관없네. 중요한 건 집념이지. 자네는 집념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 아닌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는 저들이 부족했던 것은 딱 하나, 집념일세. 저들은 집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마지막의 마지막에 무명이 되지 못했고, 지금은 부질없는 짓에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그 한을 풀고 있지. 그게 우리와 저들의 차이점이고, 우리와 그 청년의 공통점일세.”

    집념.

    평생을 커리어에 미쳐 살아온 박한화는 그 단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나타내는 트레이드마크라고 생각했다.

    젊었을 때부터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자신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사소한 업무 하나도 게을리 처리하지 않았고, 직장을 전장처럼 생각하며 매 순간 사투를 벌여 왔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함정을 준비하고, 거물과 인맥을 만들기 위해 교섭 재료를 준비하고, 최종적으로는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 도박을 했다.

    실제로 목숨을 걸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박한화라는 남자가 있는 곳은 언제나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약한 놈들, 쓸데없이 정이 깊은 놈들, 집념이 부족한 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데스 매치였다.

    “그 청년 역시 다르지 않네. 자네와는 방향성도 다르고 추구하는 것도 다르지만, 방식 자체는 자네와 똑같았네. 디그러쉬가 자네라는 괴물을 만들어 냈다면, 그 청년은 대한민국이 만들어 낸 괴물일세. 우리 못지않게 추악하고 더러운 방식으로 만들어 낸 괴물이지.”

    기껏해야 자신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인 범재, 반푼이, 사회 부적합자. 그런 못난 아들이 자신 못지않은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박한화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달은 버텨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한민국 정부와 지하 연구 시설 격벽은 고작 하루 만에 무너져 버렸고, 이제는 1시간도 되지 않아 연구 시설이 박살 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자신의 생물학적인 아들인 박한성이 주도하고 있다.

    디그러쉬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바로 턱밑까지 송곳니를 들이민 괴물이 자신의 생물학적 아들이라니.

    믿고 싶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에, 박한화는 마침내 인정해야 했다. 자신의 아들이 범재도, 반푼이도, 사회 부적합자도 아니었다는 것을.

    녀석은 누구보다 대단했고, 완벽했으며, 또한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높았다. 순식간에 사회를 자신의 힘으로, 여론으로, 세력으로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앞으로 벌어질 일은 별개의 문제다.

    이대로 탈출해서 베이징 지저 도시에 몸을 의탁하고, 그곳에 있는 디그러쉬 중국 지부와 강력한 인민군의 보호를 받는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무한과 영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방해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준비 다 됐으면 이만 출발하지.”

    무한 동력 기관이 보관된 특수 케이스를 운송 차량에 싣자마자 박한화가 운전수에게 명령했다.

    나머지는 모두 자신들의 호위 인력이다. 베이징 지저 도시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기꺼이 목숨을 바쳐 줄 집념이 부족한 자들.

    “그럼 출발하겠습…….”

    콰아아아아아아앙!

    후방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폭음에 박한화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서 방탄유리 너머로 상황을 확인했다.

    오렌지빛 불길과 시커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구 시설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수의 중장갑보병들이었다.

    하지만 박한화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시무시한 중장갑보병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맨몸에 가까운 빈약한 무장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한 청년의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박한성. 중장갑수색대 최후의 생존자이며 디그러쉬의 계획을 3년이나 늦춘 괴물. 이제는 강적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벽.

    “어서 출발하도록!”

    “예, 예!”

    저들의 앞길을 막기 위해 이쪽에서도 급조한 엑소스켈레톤 부대를 대거 투입했건만, 10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돌파당했다. 이런 호송대로는 1분이나 버티면 다행일 것이다.

    중장갑보병들의 기동성이나 지구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결국 차량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천장을 뚫고 침투한 저들에게 변변찮은 추적 수단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저들을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후로는 절대로 볼 일이 없겠지. 훗날, 압도적인 기술과 힘으로 그들을 짓뭉개 버렸다는 짤막한 보고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정하마. 너는 나의 가장 뛰어난 핏줄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만족해라. 순수하게 네 힘만으로 네 아비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며 물러서라.

    너는 결국 과거일 뿐이며, 나는 미래일지니. 과거는 절대로 미래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후련한 표정이군.”

    “험한 꼴을 당했지만, 저는 마지막에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이렇게까지 구석에 몰린 적은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만.”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도 ‘몰린’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겠군.”

    “……!”

    박한화는 드물게도 깜짝 놀란 얼굴로 노신사를 돌아보았다. 노신사는 그저 낮게 웃으며 회색빛 중절모를 깊게 눌러썼다.

    “말하지 않았나. 그 청년과 우리의 공통점은 바로 집념이라고. 그 정도의 집념을 가진 자가 설마 이렇게나 허무하게 마지막 끈을 놓쳐 버리겠나?”

    “후방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 중인 다수의 기체 포착!”

    “미래그룹에서 개발한 고기동 로봇견입니다! 주요 제거 대상인 박한성이 로봇견에 탑승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다급한 음성이 섞인 보고를 받은 박한화는 마지막 퍼즐이 뇌리를 관통하는 듯했다.

    이런 격전 속에서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거의 맨몸이나 다름없는 무장으로 연구 시설에 침투한 이유.

    목숨을 지키려면 다른 중장갑보병들처럼 군용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고 있어야 정상일 텐데, 오직 박한성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듯이.

    ‘군용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고 있으면 로봇견에 탑승할 수도 없고, 군용 엑소스켈레톤을 벗고 로봇견에 탑승하려 해도 너무 늦으니까!’

    지금처럼 자신들이 도주할 경우 재빨리 추적할 수 없으니까, 처음부터 여기까지 예상해 두고 군용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눈먼 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도박판의 코인 하나로 취급한 것이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정말 이게 아니면 방법이 없을 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자기 암시를 걸어야만 간신히 목숨을 걸 배짱이 생긴다.

    박한화도 수십 년이 넘는 사회생활을 통해서 그것을 몸소 겪었고, 뼈저린 교훈으로 배웠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목숨은 최후의 수단, 최후의 코인으로 남겨 둔다. 목숨을 잃으면 뭐가 됐든 다 물거품이니까.

    ‘그런데 저놈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최선의 수단으로 제 목숨을 던지고 있다.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고 있는 원대한 계획의 결말이라고 주장하듯, 목숨의 취급을 한없이 가볍게 하고 있다.

    “집념은 무섭지. 하지만 거기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념은 더더욱 무서운 법이라네. 자신의 목숨조차도 날파리처럼 여기는 놈을 누가 당해 낼 수 있을까. 자네의 우수한 핏줄을 타고 태어난 아이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괴물로 만들어진 결과일세.”

    박한화라는 남자를 집념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 박한성이라는 남자는 조금 다르다.

    우수한 핏줄, 재능,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 무수한 기술과 지식의 축적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로 응축시키고 폭발적인 추진력을 이끌어 내게 하는 무시무시한 집념.

    광기. 그것이 박한성이라는 남자를 요약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일 것이다.

    지금, 집념을 깨부수는 광기가 목전을 넘어 목젖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VIP 호송 차량이 폭발에 의해 크게 날아오른 순간, 박한화는 불쾌한 부유감을 느끼며 방탄유리 너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박한성을 마주 보았다.

    자신이 그를 더 이상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그 역시 자신을 더 이상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역시 미리 죽여 둘 것을…….”

    꿈 많은 남자의 미래가 지금 과거의 망령에 따라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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