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203화 (203/211)
  • 딥 인사이드 아웃 (210)

    ”그가 눈치챘군.”

    살짝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홍차의 향을 음미하고 있던 회색의 노신사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또 하나의 ‘무명’으로 거듭난 박한화가 표정을 굳히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지상(지저 도시)에서 잘 들어오고 있던 전력이 어느 순간 끊기더니 지하 연구 시설 일부가 완전히 셧다운 되었다.

    예비 발전기가 일부 돌아가기는 했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원자력발전소에서 전력을 공급받게끔 설계되어 있었는지라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곳곳에서 붉은 비상등이 깜빡깜빡 점멸하고,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일부 연구 에어리어에선 전력 공급이 갑작스럽게 차단된 탓에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무명’의 끝자락에 도달했다가 끝끝내 우화하지 못한 반쪽짜리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대처에 사고 수습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전력 공급 차단에 손해가 제법 막심했다. 예비 발전기를 갖춰 두지 않았더라면 연구시설 전체가 암흑에 휩싸이고 말았을 테니까.

    “느껴지는가? 자네의 유능한 피를 물려받은 아들이 아버지의 목을 노리고 있다네.”

    “역시 이곳에 오기 전에 죽여 둘 것을 그랬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지 않나. 나나 자네나 준비가 부족했었어. 반면 자네 아들은 착실하게 제 아비의 목에 칼침을 박아 넣을 꿍꿍이를 세우고 있었지. 자식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은 어떤가?”

    “그 녀석은 언제나 말썽꾸러기였습니다. 남들은 평생에 걸쳐 노력해도 결코 손에 넣지 못할 것들을 이 아비가 준비해 주었음에도 저 스스로 걷어차 버렸습니다. 차라리 본인의 뛰어난 재능을 선보이는 것으로 저를 납득시켰다면 모를까, 오히려 도망쳐 버리고 말았지요. 비전도 없고, 재능도 없고, 배짱조차 없는 놈입니다. 결국 배워 온 것이라곤 이런 얕은 잔재주나 꼼수 같은 것들뿐이지요.”

    “하지만 그 잔재주나 꼼수가 ‘정도’에 근접했다면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법이지. 자네는 신인의 무시무시한 혈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경험 없는 자는 미숙하고, 미숙한 자는 스스로 깨우침을 얻지 못하면 끝내 성숙해질 수 없습니다. 어른 행세를 해 봤자 결국 애새끼에 불과합니다.”

    “역시 자네를 고른 게 정답이었어. ‘선조’와 가까워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일세.”

    “과찬이십니다.”

    비상등이 꺼지고 다시 새하얀 불빛이 고층 빌딩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두 사람은 태연하게 반쯤 식은 홍차의 색다른 향을 느끼며 천천히 입가에 흘려 넣었다.

    최악의 경우 박한성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현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내부에서도 숱하게 논의된 바 있다. 그만큼 박한성이 거느리고 있는 세력의 규모는 증강과 확장세를 멈추지 않았다.

    면역력이 없는 인간의 몸에서 순식간에 세를 불려 나가는 신종 바이러스처럼, 박한성이라는 철부지 애새끼 한 명에게 올인을 내건 열등한 민족들이 지상에는 제법 많았다.

    하지만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

    우월하며, 완벽하고, 또한 과거에서부터 가르침을 얻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하는 인류의 대표 그 자체였다.

    머나먼 옛날, 지구에 초고도로 발전한 문명을 이룩했을 만큼 위대했던 선조들처럼, 자신들이 다시 한 번 도탄에 빠진 지구를 무한한 은혜가 담긴 옛 기술로 되살리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원숭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열등종들이 자신들을 선구자나 왕처럼 떠받들 것이고, 위에 선 자의 ‘의무’를 지기 위해 주어진 자격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통치, 인도, 계몽.

    수십 년을 준비해 온 이 계획에 구멍은 없다.

    노신사의 말에 의하면 지저 도시를 처음 계획할 때부터 지저 도시 아래의 지하 연구 시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고 선택받은 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고 나면, 두꺼운 격벽과 암반층으로 지상과 지하를 완전히 격리하고 무한한 시간을 연구와 개발 그리고 발전에 쏟아부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무한 동력 기관이 있다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무한한 에너지의 활용도는 문자 그대로 무한했으니까.

    보다 발전된 기술, 보다 진보된 문명, 보다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인류의 상식.

    기껏해야 100세를 살고 끝인 인간에게 무한한 수명을 부여할 수도 있는 위대한 선조의 유산이 자신들에게 있는데, 바깥에서 원숭이들이 좀 날뛴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

    “디그러쉬의 채굴 장비도 모두 수거했습니다. 놈들이 이 연구 시설을 파헤치고 침투하려면 수직으로 땅굴을 파도 족히 한 달 이상은 걸릴 겁니다.”

    지저 도시에서 다시 한 번 짧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야 하는 지하 연구 시설. 디그러쉬의 우수한 채굴 장비까지 모두 수거한 이상 저들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변할 게 뻔했다.

    그사이 자신들은 느긋하게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 변환기를 만들고, 강력한 에너지 무기를 만들고, 마침내 무한한 에너지를 동력 삼아 자동으로 움직이는 살인 기계들까지 완성시키면 게임은 끝난다.

    자신들에게는 그걸 가능케 할 인재, 자재 그리고 무한한 에너지가 있다.

    지구상에서 자신들을 위협할 존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며, 어쩌면 우주 전체를 통틀어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약 137억 년이라는 나이를 가진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것도 꿈이 아니게 될 터.

    박한화는 디그러쉬의 모든 안배와 미래 계획을 알게 된 이후부터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번 설명해야 할 만큼 멍청하고 무능한 놈들도 없고, 다 늙은 노신사를 제외하면 자신이 이곳의 실질적인 지배자다.

    더 이상 디그러쉬의 중역이 아니라, 디그러쉬를 대표하는 총수로 거듭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자신은 아직 젊고, 맞은 편에 앉아 우아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홍차를 음미하고 있는 노인은 늙었다.

    무한한 생명이 완성되기 직전에 세대교체를 이뤄 내면, 무한은 오직 자신만의 것이 된다.

    무한.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 시작과 끝을 포함한 규모를 알 수 없기에 무시무시하면서도 흥분되는 것.

    무한은 절대로 마르지 않는 샘과 같지만, 그래도 다른 권력자와 함께 나누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이왕이면 둘이 함께 무한을 소유하는 것보다 혼자서 무한을 독차지하는 게 훨씬 더 나으니까. 인간은 원래 그렇게 원하는 것을 쟁취하도록 DNA 단계에서부터 설정되었다. 딱히 이상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무한을 손에 넣기까지 머지않았다.

    *    *    *

    “지금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높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은 절대로 무너질 리 없다고, 자신은 저 아래에서 버둥거리는 것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선민의식에 빠져 고집스럽게도 자신의 헛된 망상과 신념에 목을 매는 놈들이 있는데, 문제는 그들의 유능함과 카리스마는 무한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는 거다.

    위대한 제국의 황제들도 전성기가 지나면 하나둘씩 몰락하거나 칼침을 맞고 옥좌에서 굴러떨어졌건만, 지저 도시보다도 작은 지하 연구 시설에 처박혀서 한다는 짓이 때아닌 왕 놀이라니.

    진짜 애새끼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채굴 장비 배치되었습니다. 숙련된 굴착기사들과 폭파 전문가들도 모두 제 위치에서 대기 중입니다.”

    “시작해.”

    이미 우리의 머리 위, 지저 세계와 지상을 구분하는 12km의 장벽은 거의 다 파였다. 짧으면 하루, 아무리 길어도 수일 안에는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면서 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겠지.

    그런 대참사를 허용할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족이 있다면 안심해도 좋다. 너희들의 가족은 지금쯤이면 모두 지상의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을 테니까. 그것만큼은 내 목을 걸고 보장할 수 있다.”

    불필요한 쓰레기는 소각하되,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많이 살린다. 그것이 망가진 세계를 최대한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는 지름길이자 미래의 희망이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생존자 그룹이 이 계획에 사활을 걸었으니, 누구 하나 일을 대충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편하게 일해라. 이 땅을 죄다 헤집고 폭파시켜서 저 아래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해 주는 거다. 우리 같은 서민들, 아랫것들은 절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놈들의 오만방자한 생각을 우리가 직접 깨부수는 거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착굴 개시!”

    “개시!”

    아쉽게도 디그러쉬제 채굴 장비는 손에 넣을 수 없었지만, 대신 미래그룹이 채굴 장비를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지상의 군수기지를 탈탈 털어서 들여온 대량의 폭약도 준비되어 있다.

    순수하게 이 작업에 동원된 인부만 해도 1만 명 이상. 그들에게 협조하여 전력으로 도울 중장갑보병 역시 얼추 5천이 넘는다.

    막노동이라면 다들 질릴 정도로 경험해 본 삽질의 프로들이었기 때문에, 지면을 덮고 있던 아스팔트를 깨부수고 흙을 퍼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폭약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구멍만 뚫을 수 있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구멍 속에 폭약을 설치해서 인공적인 지진을 일으켰다.

    빠르게 붕괴하는 암반층 속에서 인부들이 중장비와 차량, 수레까지 총동원해 흙과 바위를 퍼낸다. 거기에 다시 굴착기들이 달려들고, 주기적으로 폭약을 터뜨린다.

    안전사고를 최대한 방지하면서 작업을 벌였기에 이 정도 속도였지, 만약 내가 생명을 도외시하는 희대의 폭군이자 학살자였다면 문자 그대로 사람과 기계를 구덩이 속에 갈아 넣었을 것이다.

    나는 실시간으로 뚫리고 있는 천장과 지면을 번갈아 보며 무장을 점검했다.

    우리가 그날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봤던 것처럼, 놈들 역시 뻥 뚫린 구멍 위로 우리를 올려다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놈들의 미간에 최초의 탄환을 박아 넣으며 외치겠지.

    모두 쓸어버리라고.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던가.

    나는 무수한 전우들의 시신을 발판 삼아 피로 얼룩진 길을 홀로 걸어왔다.

    평생을 어둠 속에 갇혀, 빛을 갈구하며 살아왔다.

    나는 누구보다 깊은 곳에 있었고, 이제 깊은 곳에서 빠져나갈 때가 됐다.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전신의 피부로 체감할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빛이 필요했던 존재였다. 굳이 깊고 어두컴컴한 곳에 숨어들어 살 필요가 없었다.

    동굴에 처박혀 있던 우리의 머나먼 조상들은 불을 발견하고 태양 아래로 당당하게 나왔다. 밤이 깊어도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내일도 반드시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며 살았다.

    원시인들에 불과했던 우리의 조상들조차 그러한 삶을 살았을진대, 진보된 과학 기술과 집단지성으로 무장한 우리가 어째서 어둠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와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빛이 필요하다.

    인간은 빛이 필요하다.

    세상은 빛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세상에 너희는 필요 없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