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201화 (201/211)
  • 딥 인사이드 아웃 (208)

    “오랜만입니다, 사령관님.”

    “허, 이것 참…….”

    무려 반년 만에 다시 재회한 커트 중장과 존 대령은 내심 서로를 반가워하는 눈치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어색해하는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커트 중장 입장에선 존 대령과 그의 부하들을 위험한 지상에 버려 둔 채 저들끼리만 지저 도시에 숨어 버린 셈이니까. 존 대령 역시 정규군조차 아닌 사람들을 미국의 기밀 덩어리나 다름없는 군함에 함부로 태웠다.

    서로 떨떠름해지는 건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둘은 바다 사나이답게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복귀를 환영하네.”

    “복귀했음을 보고드립니다.”

    투박한 바다 사나이들이지만, 그렇기에 서로 알 거 다 알고, 볼 거 다 본 사이라서 가볍게 떨쳐 낼 수 있는 마음의 응어리였다.

    이제 그들은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태는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한국 지저 도시에 비하면 일본의 지저 도시는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수용 인원도 많아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지만, 인류 멸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인류가 지상에서 누렸던 번영을 지저 세계에서 수복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수백 년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 문명을 보전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을 갑자기 외부에서 들어온 정규군도 아닌 자들이 대뜸 그들 입에 ‘빨간약’을 밀어 넣었으니, 어찌어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것이다.

    “지상은…… 정말 끔찍하게 변해 버렸군. 고작 반년 만에 이렇게 될 줄이야.”

    커트 중장이 줌왈트급 구축함 USS 퍼니셔호의 갑판에 서서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도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를 호위하기 위해 지상으로 나온 미군 수백 명도 하나같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도쿄역에서 간신히 숨어 지내고 있는 민간인들, 크리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끔찍한 괴물의 시체 그리고 이제는 ‘구름’처럼 움직이고 있음이 느껴지는 하늘의 암흑 물질.

    “흑야 사태 당일에만 해도 하늘이 온통 시커먼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대류의 흐름이 보일 정도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군. 그건 자네들이 말하는 타르 덩어리 같은 것들이 지상으로 꾸준히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겠지?”

    “놈들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낸 정보원, 현재 한국에서 무한 동력 기관 탈환 계획을 주도하고 있는 남자는 저것들을 ‘암흑 물질’, 혹은 ‘고대인’이라고 부르더군요. 지저인이 아니라 고대인 말입니다.”

    “모든 자료를 확인했네. 그 자료가 맞다면 저것들은 고작 땅 밑에 숨어 지내던 지저인 같은 게 아니야. 지구상에서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에 자리 잡았을 터인 진짜 고대인이겠지.”

    운석 충돌로 인한 대멸종, 혹은 화산 대폭발과 지각 충돌로 인한 대량의 화산재 분진 방출.

    이로 인해 지구 전체가 뒤덮이고 햇빛은 대부분 차단되었다. 빙하기가 왔든, 지상이 초열지옥처럼 들끓었든, 놈들에게 있어서 지상은 썩 좋은 거주 환경이 아니었을 터.

    그래서 고대인들은 생명 유지를 위해 지상보다는 훨씬 더 안전한 지저 세계로 들어가, 잠깐 동안 ‘지저인’ 행세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확인했다.

    그사이 인류보다 훨씬 더 앞선 고대 문명인 ‘선조’가 지상에서 눈부신 문명 발전을 이룩했고, 어쩌다 지저 세계에 있던 놈들과 접촉, 불시에 기습을 받아 멸종했을 것이라는 결과까지.

    한 사람이 모두 취합하고 분석한 정보를 토대로 낸 결론(추론)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럴듯했다.

    왜냐하면 그것 외엔 현재의 상황을 달리 설명해 줄 만한 논문, 하다못해 추상적인 가설조차 전무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걸 분석해 줄 박사 학위가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지 의문이다.

    “자료를 이미 확인하셨다면 알고 계시겠지만, 저것들은 에너지에 환장하는 놈들입니다. 놈들이 지구에 붙어 있는 이유는 지구에 무한 동력 기관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편하게 태양열을 받아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놈들이 태양열조차 포기하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릴 만큼 무한 동력 기관이 더 매력적인 미끼인 것은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그걸 우주로 쏴 올려서 놈들을 지구에서 쫓아낸다, 가급적이면 태양에 꼬라박게 해서 놈들을 죄다 자멸시키고?”

    “놈들도 불사신인 건 아닙니다. 현대의 인류가 가진 모든 열병기를 총동원해도 놈들을 처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검증되었습니다. 분명 인류를 위해 죽어 줄 겁니다.”

    “꽤나 감성적인 표현이군. 인류를 적대하고, 나아가 인류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놈들이 막상 인류를 위해 죽어 줄 거라니.”

    하지만 정말로 그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커트 중장은 USS 퍼니셔호까지 오면서도 몇 번이고 고민하고, 또 부관들과 토론을 하듯이 의견을 나눠 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무한 동력 기관이 지구에 남아 있어도 게임 오버, 지구에서 먼저 제거되어도 게임 오버, 지구에서 내보내기 전에 놈들의 손에 들어가도 게임 오버.

    놈들에게 무한 동력 기관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무사히 지구에서 내보내고 나서야 간신히 희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발상이 너무나도 빈약한 계획.

    하지만 인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도박에 사활을 걸어야 할 만큼 몰려 있는 상황이다.

    “디그러쉬 놈들에게 전 세계가 놀아났으니 여기까지 궁지에 몰리는 것도 당연하군. 업보를 받은 거야.”

    “아슬아슬하지만 아직 만회할 수 있습니다. 다네가시마우주센터를 복구하고, 미 7함대를 복구해서 작전을 성공시키면 됩니다.”

    “흐흐, 인류가 실행한 계획 중에 가장 말도 안 되는 계획은 아폴로 11호와 닐 암스트롱을 무사히 달에 착륙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습니까? 이번에 신기록 하나 세워 보는 겁니다.”

    “나쁘지 않아. 오히려 퇴역하기 전에 말년을 즐길 유흥거리로는 차고 넘치지.”

    커트 중장은 지상의 모든 상황을 확인했으며, 자신들에게 제공된 ‘정보’에 거짓은 없어 보인다는 대답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결국 일본 정부 역시 외부 상황을 확인한 후에야 미 7함대와 연합하여 다네가시마, 미 7함대 복구 작전에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계획은 이미 다 갖춰져 있었고, 무대까지 준비되어 있는 상황. 남은 것은 사람과 준비물만 챙겨오면 끝이다.

    “일본에서 다시 A 그룹과 B 그룹으로 나뉘겠군. A 그룹은 수송선으로 최대한 많은 복구 인력과 자재를 다네가시마우주센터로 실어 나르고, B 그룹은 도쿄항에서 미 7함대의 군함들을 손봐야겠어.”

    “반년 동안 방치되긴 했지만,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진 군함들이라 다 뜯어고쳐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진 않을 겁니다. 당장 USS 퍼니셔호만 해도 반파 상태까지 갔다가 고작 1개월 만에 무사히 복구했으니 말입니다.”

    “세계 최고의 조선 기술을 가진 한국과 비교하면 곤란하지. 어쨌든 자네가 A 그룹을 담당해 주게, B 그룹은 내가 책임지고 2개월…… 아니, 1개월 하고도 보름 안에는 어떻게든 복구해서 자네 앞에 대령해 주지.”

    “누가 들으면 제가 제독(Admiral)인 줄 알겠습니다.”

    “까짓거 하면 되지. 최소한 지저 도시에 처박혀 있던 나보다는 자네가 훨씬 더 유능한 것 같은데.”

    “부담 주지 마십시오. 이미 지금도 충분히 부담스럽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부담스러웠다.

    이 계획에 참여한 이들 중 어느 한쪽이라도 실수를 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하드코어 모드 원 코인 클리어. 존 함장은 우둔하다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정신 상태가 해이해지는 걸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군인의 귀감이군.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명예 훈장 수여자로 추천해도 되겠어.”

    “그건 감사히 받겠습니다.”

    “흐흐흐!”

    바다 사나이들은 조금씩 어둠이 사라지고 있는, 마치 검은 구름이 북동쪽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실없는 농을 주고받았다.

    무한 동력 기관에 사활을 건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    *    *

    때가 됐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 순간, 나는 조용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전원 기상.”

    한창 취침 시간인 오전 12시. 생활관에 누워 있던 모든 장병들이 내 한마디에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이미 군복에 방탄복까지 차려입은 상태였다.

    “현재 시각 공공 시, 지금부터 소각 작전을 개시한다. 모든 인원은 각자의 무장을 챙겨 엑소스켈레톤에 탑승한다. 그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모두 제거해도 상관없다.”

    당연하지만 걸리적거리지 않아도 제거는 해야 한다. 괜히 화근을 남겨 두면 뒤통수가 찜찜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소리 소문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장병들은 야간 근무자들이 미리 무기고에서 빼낸 무장을 챙겨 들고 정비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정비병들이 심혈을 기울여 조이고 닦고 기름칠한 엑소스켈레톤이 질서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춰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병이나 정비병 같은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지원 인원을 제외하면, 대대 인원 대부분이 군용 엑소스켈레톤을 사용하는 중장갑보병이다. 이들에겐 엑소스켈레톤이 곧 갑옷이요 칼이며 방패였다.

    대대 인원의 약 80%가 무장을 끝마쳤을까, 쿵쿵거리는 엑소스켈레톤 특유의 소음을 듣기라도 한 것인지, 임시 생활관에 모여 지내던 정부의 끄나풀들 중 야간 근무조가 바깥 상황을 살피러 나왔다.

    “처리해.”

    내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중장갑보병 열댓 명이 투캉투캉 하고 지면을 박차며 돌진했다. 그 기세가 흡사 코뿔소와 비슷해서 상대는 이도 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콰직! 으드드득!

    총을 사용할 것도 없는 심플한 몸통 박치기. 수백 kg 철 덩어리에 그대로 얻어맞은 연약한 인간의 피륙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중장갑보병을 대놓고 모욕하던 놈들이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곤죽이 된 것이다.

    “전 대원 무장 완료했습니다. 대대장실에 연락 넣고, 저 쓰레기들부터 싹 쓸어버려.”

    내가 임시 생활관을 가리키며 ‘저것은 해로운 생활관이다’라고 지적한 순간. 엑소스켈레톤에 자체 내장된 야간투시경의 초록색 안광을 빛내며 철의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임시 생활관의 문짝과 외벽을 뜯어내고, 그곳에서 쉬고 있던 놈들을 족치기 시작했다. 일부는 총으로 반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고작 개인화기 따위에 쓰러질 정도로 중장갑보병은 약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

    “자, 잠깐! 우린 같은 편이잖아! 우릴 왜…… 끄륵?!”

    “반란! 반란이다! 어서들 일어나! 아아아아악!”

    “상층부에 연락해! 놈들이 쿠데타를…… 컥!”

    안 되지.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새로운 시대에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받아 줄 만큼 우리도 여유롭진 않아.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등 뒤에서 호시탐탐 칼 꽂을 기회만 노리는 놈들이라면 더더욱.

    연락을 받은 대대장은 부관과 간부들을 데리고 내게 다가왔다.

    “결국 시작되는군.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에서 군사 혁명 같은 건 또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건만…….”

    “군사 혁명 같은 게 아닙니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과 과거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을 분리하는 작업이죠.”

    “……가능한 한 빠르게, 깔끔하게 끝내 주게. 같은 국민들을 우리 애들 손으로 학살하게 하는 모습은 지휘관 되는 사람으로서 오래 보고 싶지 않으니.”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질질 끌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나는 지저 도시의 어두컴컴한 하늘, 정확히는 암반층이 자리 잡고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놈들이 저 두꺼운 암반층을 깨부수고 이 지저 도시에 쏟아져 내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속도전이다.

    “대대장님을 비롯한 후방 인원들은 궤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최대한 많은 민간인들을 바깥으로 대피시켜 주십시오. 바깥에는 이미 지상의 생존자 그룹이 피난 준비를 끝마친 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자네와 우리 애들은 언제쯤 빠져나올 건가?”

    “새 시대에 필요 없는 쓰레기들을 싹 소각하고, 무한 동력 기관을 손에 넣고 나면 빠져나갈 겁니다.”

    “……건투를 빌지.”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출발 준비를 끝마친 장갑차에 탑승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쓰레기들을 소각하는 것으로 워밍업을 끝마친 중장갑보병들 역시 수송 차량에 하나둘씩 몸을 실었다.

    우리는 이제 칠부능선을 막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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