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 인사이드 아웃 (205)
칠부능선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또 다른 기업인의 말에 다른 이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들에게 동의를 구하자마자 곧장 펼쳐 보인 PPT 자료는 ‘쿠데타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타이틀도 떡하니 그렇게 써 놨다. 이걸 본 이상 당신들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될 거라고. 나와 함께 죽든가, 나와 함께 살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거라고.
“이 나라가 한민족끼리 피를 흘려 가며 싸운 게 벌써 80년 전이야. 그러다 이제 좀 잠잠해지나 싶은 찰나에 쿠데타가 터지고 군사정권이 들어섰지. 그 뒤에는 어찌어찌 민주정권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래, 이 정권도 결국 이렇게 끝을 맞게 되는군.”
“민주니 사회니 보기 좋게 포장해서 실컷 떠들어 대도 결국 사람 머리 위에 사람이 있는 이상 반발은 끊임없이 나오는 법이지. 우리 같은 기득권층이 어찌 그걸 모르겠나.”
“쿠데타라……. 굳이 말하면 친서민적이면서 친정부적인, 중립적 성향인 우리들과는 영 안 맞는 방법 아닙니까?”
“하지만 어쩌겠나. 우리 같은 장사치들을 지켜 주는 것은 정부지만, 동시에 장사치들의 물건을 사 주는 건 서민들이야. 그러니 보호는 새로운 권력자에게 받도록 하고, 장사치 노릇은 그대로 이어 나가야 명줄이라도 붙들 것 아닌가?”
“맞는 말씀이오, 이 회장.”
기업인들은 저들끼리 의견을 나누고 고민하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차피 여기서 되돌아갈 미친놈은 없으니 계속하시게. 장사치는 죽을 때까지 장사치여야 하는 법이야. 저승에 가더라도 돈 싸 들고 갈 양반들인데, 아까운 돈을 남겨 두고 허무하게 죽을 순 없지.”
“각오가 된 것 같아서 마음에 듭니다. 그럼 양념 빼고 MSG 빼고 본론만 들어가죠. 저희가 공략해야 할 주요 세력은 셋입니다.”
나는 지휘봉으로 PPT 자료에 삼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는 3개의 세력을 차례차례 가리켰다.
A. 정부
B. 중부 지구 소속 군대, 국정원, 기업
C. 디그러쉬
“사실 A와 B는 한 몸이나 다름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B를 우리가 포섭하거나 제압해서 포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B를 가장 먼저 제압해야 A의 목을 따고, C를 코너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B에 해당하는 세력은 꽤 중구난방이군. 중부 지구 소속 군대와 국정원은 현 정권의 끄나풀이라고 봐도 되니 걸러 내는 게 아주 어렵지는 않겠지만, 기업은 조금 힘들겠어. 관련 없는 민간인들이 너무 많이 엮여 있지 않나.”
“그러니 모가지만 따야죠. 어차피 저들은 이 지저 도시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해당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현물 자산이나 기밀 자료 등은 여러분들이 재주껏 나눠 먹으시고, 죄 없는 민간인들만 지상으로 대피시켜 주시면 됩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타 기업 수뇌부들의 모가지를 썰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현물 자산이나 기밀 자료를 자신들이 가진다? 욕심 많은 장사치들이 절대 흘려들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직접’ 나서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쿠데타를 진행하기에 앞서 전폭적인 지원만 해 주시면 됩니다. 저희가 놈들의 뼈를 발라내 드릴 테니, 살점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집어 먹으시라는 의미입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거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성립되지 않으면 아무리 무력과 권력을 이용해서 저들을 묶어 둔다고 한들, 끝내 배신자가 나올 것이다.
배신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 유혹이다. 같잖은 신념이나 가치관 따위로는 방어할 수 없는 매력적인 유혹으로 꼬드겨야 쉽게 배신을 하지 않는다.
“이왕이면 한턱 더 쏘는 게 어때? 젊은 친구. 어차피 공중분해 될 기업에 소속되어 있던 민간인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는 건데, 그 인력들도 우리가 데려다 쓰면 안 되나?”
“지상에 복귀하면 할 일이 아주 많을 겁니다. 당연히 경력직 인력이 필요하시겠죠. 강요는 하지 마시고 그들을 설득한다는 조건이라면 마음껏 영입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좋아, 좋아. 그렇게 나와야 수지 타산이 좀 맞지.”
“지상에 복귀해서 망가진 인프라를 복구하고 사회를 정상화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하기야 그곳이 어디든 미래 없는 지저 도시보단 나을 테니.”
대충 합의가 끝난 것 같아, 나는 쿠데타가 어느 날짜에, 어떤 형태로, 어디서부터 진행되는지 설명에 들어갔다.
“쿠데타는 지금으로부터 2주에서 3주 뒤쯤에 진행될 겁니다. 2개월 정도를 카운트다운으로 잡아 놨으니, 못해도 2개월이 되기 전에 쿠데타를 진행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사이 여러분들은 최대한 부족한 물자를 채워 주셔야 합니다. 물자는 미래그룹이 운용하는 무인 셔틀버스를 이용해 정기적으로 서부와 중부 지구를 제외한 각 군부대에 납품해 주시면 됩니다.”
“다른 부대에는 이미 정부의 끄나풀들이 감시 명목으로 기어들어 갔다던데, 그들의 눈을 속이고 보급을 받을 수 있겠나?”
“남부 지구와 북부 지구는 이미 놈들의 기세를 꺾어 놨습니다. 문제는 동부 지구인데, 동부 지구 쿠데타는 여러분들이 창고에 쌓아 둔 군수물자를 바로 이용할 겁니다. 즉 동부 지구 군부대 내에서 쿠데타가 터지는 게 아니라, 동부 지구 시내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영악하군. 동부 지구에서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쿠데타 군을 보면 놈들도 어쩔 도리가 없겠어.”
군 부대 내부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외부에서 쿠데타군이 쏟아져 들어온다면 당연히 어쩔 도리가 없겠지. 저들이 군대‘만’ 집중적으로 감시한다는 허점을 이용한 계획이었다.
“디그러쉬와 감시 드론이 빠졌으니 여러분들을 감시할 세력은 기껏해야 이 자리에 없는 다른 기업들, 혹은 모래 한 줌밖에 안 되는 국정원 요원들 정도일 겁니다. 국정원 요원들은 밀수조직원들이 직접 찾아다니며 제거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타 기업의 눈은? 동부 지구는 기업 소속 민간인들이 너무 많아. 사실상 누가 누구 눈인지 구분할 수도 없어.”
그 말은 어떤 기업이 정부에 꼰지르기라도 했다간 지저 도시 최대 물자 생산 지구인 동부 지구가 아작 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다.
“이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제 사람들이 각 기업 수뇌부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회의가 끝날 즈음이면 머리 없는 기업들만 남아 있겠군요. 알아서들 나눠 드시고, 군수물자 많이 만들어 주시면 되겠죠?”
“…….”
“미쳤군.”
“설마 처음부터 거기까지 생각해 두고 오늘 우리를 불러 모은 건가?”
“그럼 쿠데타를 준비하는 제가 멍청하게 우리의 수상한 움직임을 발설할 수도 있는 놈들을 곱게 돌려보냈겠습니까?”
이미 내 부름에 의해 모든 기업인들이 한 번 모였다가 의견이 맞지 않는 자들은 해산했기 때문에, 건물 바깥에서 매복 중이던 밀수 조직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깔끔하게 처리했을 것이다.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수십 명의 경호원들은 어찌할 새도 없이 전투의 달인들에 의해 척살당했겠지. 그들은 지상에서 나이트워커와 사이비 광신도들을 상대로 목숨 걸고 실력을 갈고닦은 ‘진짜’들이다.
“자, 잠깐. 우리도 기업인인 이상 정부와 가깝게 지내는 건 어쩔 수 없네. 그런데 대뜸 그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정부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나? 당연히 이 잡듯이 뒤질 텐데 어쩌려고 그런 짓을……?”
“대한민국에서 정부와 가장 친밀했던 외국계 기업 디그러쉬가 하루아침에 통째로 증발했습니다. 기업의 수뇌부가 기업과 함께 사라진 전적이 이미 있는데, 다른 기업 수뇌부가 좀 사라지는 게 뭐 대수입니까?”
“……틀린 말은 아니군.”
그렇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정부는 갑작스럽게 증발해 버린 디그러쉬를 찾기 위해 실제로 지저 도시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끝내 그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중요한 사업 파트너를 ‘실종’ 처리 해야 했다.
그런 뒤숭숭한 사건이 한 차례 벌어진 뒤인데 이제 와서 ✕✕기업 ✕✕✕ 회장 실종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고 해서 정부가 또다시 지저 도시를 뒤엎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 차라리 적당한 후계자에게 기업 경영권을 위임하고 말없이 물러났을 것이라고 추측할 거다. 아니면 그들도 괘씸한 디그러쉬처럼 자신들이 모르는 곳으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이미 디그러쉬가 큼지막한 전례를 남겼기 때문에 다른 기업의 대가리 몇 개 사라진 것 정도는 큰 감흥을 주지 못할 겁니다. 설령 이상하게 느낀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데 어쩔 겁니까?”
디그러쉬가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면 그들의 감시 드론을 이용해 사건의 전말을 파악했겠지.
하다못해 미래그룹이 보유한 경비업체의 CCTV 자료를 뒤져 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디그러쉬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고, 미래그룹은 우리 편이다. 즉 정부를 눈 뜬 장님, 귀 안 막힌 귀머거리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설계력 하나는 대단하군. 이 정도는 돼야 고작 20대에 쿠데타 계획 같은 걸 세울 수 있는 건가?”
“우리가 20대였던 시절에는 여자 끼고 술 마시는 것밖에 몰랐는데. 허허.”
“세대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세대 차이가.”
기업인들은 감탄을 보내는 한편,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까지 설계해 두고 쿠데타 계획을 하필 지금 공개하는 것이라면, 쿠데타 계획의 완성도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한 것이다.
“어려울 거 없습니다. 쿠데타가 시작되는 그날 모든 관련자들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암호화된 연락이 들어갈 것이고,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지저 도시 평면도를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쿠데타가 시작되는 당일 새벽 2시, 전력 절약을 위해 대다수의 가로등 불빛은 꺼져 있을 겁니다. 또 새벽 2시쯤 되면 잘 사람들은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이죠. 그때 남부 지구와 북부 지구가 동시에 움직일 겁니다.”
남부 지구 주둔군은 나와 함께 중부 지구로, 동부 지구의 민간인들을 긁어모아서 지상으로 대피시켜야 하는 북부 주둔군과 밀수 조직은 곧장 동부 지구로 향할 것이다.
동부 지구 정리가 끝나는 대로 기업체 전용 궤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1차 민간인 소개를 진행한다. 이후 서부, 남부에 있을 2차 민간인 소개를 진행하고 나면 지저 도시는 사실상 유령 도시가 된다.
북부 지구 민간인들은 알아서 움직일 테니, 뒷일은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존자 그룹에게 맡기면 된다.
야음을 틈타 움직인 우리는 48시간 내에 모든 민간인을 지저 도시에서 내보내는 것과 동시에, 중부 지구를 완전히 제압하고 정부 수뇌부를 말살한다.
A와 B를 제압하는 모든 과정이 48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내 설명에 기업인들은 적잖이 놀란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의 C, 디그러쉬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궁금해했다.
“지금까지 지저 도시가 왜 전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지저 도시 건설이 미흡했기 때문 아닌가?”
“인프라 관리도 미흡하긴 했지.”
“안전 부주의도…….”
“디그러쉬가 지저 도시가 사용해야 할 대규모 전력을 대놓고 갈아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놈들이 당황하게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끔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 중지 시켜 버려야죠.”
놈들이 무한 동력 기관을 확보한 것과는 별개로, 무한 동력 기관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전문 설비와 시설 전력은 여전히 원자력발전소로부터 훔쳐 오고 있을 터.
전력 공급을 갑자기 중단시킨다면 놈들의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길 터. 애초에 지저 도시가 망할 거라고 생각도 못 한 놈들이니 무한 동력 기관의 에너지를 ‘에너지원’이 아니라 연구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저 도시가 존재하는 한 느긋하게 원자력 발전소의 꿀을 빨아 먹으며 편하게 무한 동력 기관을 연구할 생각이었겠지. 그편이 더 안전하기도 하고.
“그때가 되면 우린 두더지 잡기를 하는 겁니다. 놈들의 땅굴을 파헤치고, 놈들의 은신처로 기어들어 가서 개작살을 내는 거죠.”
나는 미래그룹의 이진호 총수만 알고 있는 무한 동력 기관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따로 챙겨서 가지고 나가야 하는 물건이니까. 이 회장에게도 이미 설명하고 합의를 봤다.
문자 그대로 신의 기술이나 다름없는 무한 동력 기관을 우주로 날려 보내서 파괴해야 지구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쿠데타에 대한 설명이 끝났을 때, 기업인들은 마른세수를 하면서 하나둘씩 꺼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머리가 사라진 기업들을 서둘러 집어삼키고 쿠데타 발발 전까지 공장을 풀가동해야 했으니까.
이제 바쁜 건 내가 아니라 저들이다.
‘남은 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무한 동력 기관을 탈취해서 무사히 다네가시마우주센터로 가지고 가는 것뿐이야.’
일본으로 떠난 최진석과 존 함장이 준비 작업을 잘해 주길 빌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