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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92화 (192/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99)

    미국은 무려 수도인 워싱턴 D.C와 최대 규모 도시인 뉴욕에서 동시에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러시아는 당연히 모스크바에, 중국은 베이징에, 대한민국은 서울에, 그리고 일본은 도쿄에.

    권력자들이 상시 기거하는 곳, 엄청난 인구가 모이는 곳, 경제가 크게 활성화된 곳이 주요 국가들의 지저 도시 프로젝트 선정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대한민국과 일본의 지저 도시 프로젝트 선정 위치는 굉장히 기형적이었는데, 우선 대한민국은 청와대의 바로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산에서 착굴을 시작했다.

    평지에서 착굴을 시작하면 좀 더 빠르게, 좀 더 쉽게, 좀 더 인건비가 덜 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북한산에서 첫 삽을 뜬 것이다.

    모 전문가의 추측에 의하면 이는 지저 도시의 입구와 통로를 외부로부터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이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서울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북한산이라면 쉽게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요, 북한이 갑자기 미쳐서 서울에 장사정포 포격과 핵미사일을 쏴도 북한산은 안전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와대의 바로 뒷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에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가동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10분 이내로 정부 고위 관료들을 대피시킬 수 있었다.

    청와대에 있는 VIP용 벙커보단 접근성이 떨어지지만, 미래를 도모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정치인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마성의 피난처가 바로 북한산 지저 도시였다.

    그렇다면 도쿄는 어떤가?

    도쿄 역시 한국 못지않게 굉장히 뜻밖의 선택을 했다.

    우선 도쿄에서 정치의 중심지이자 살아 숨 쉬는 역사 박물관, 일본인들 입장에서 신성시되는 황궁이 존재하는 곳인 만큼 치요다구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천황이 ‘천도’를 언급하며 디그러쉬와의 적극적인 협력 의사를 비쳤다. 이에 서로 짜고 치기라도 한 것처럼 일본 정계가 천황의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 지원을 해 주었고, 결국 치요다구가 지저 도시 프로젝트 선정지로 발탁됐다.

    지상에 오랫동안 남아 있던 고리타분한 것들을 싹 밀어내고, 국가의 새로운 미래이자 보금자리, 경제 개발의 선두가 될 지저 도시에 황궁을 옮기겠다고 밝혔으니. 그것이 곧 천도나 다름없었다.

    의외로 일본 국민들 역시 국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황궁과 천황이 미래의 지저 도시로 옮겨가게 된다는 사실에 딱히 불편해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국민성은 전체주의에 가까웠으니, 일본의 상징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최첨단 지저 도시에 자리 잡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온 국민의 기쁨이라고 여긴 것이리라.

    현실은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이 꽤 높지만.

    “도쿄항에 정박한 선박들을 다 빼내려면 애 좀 먹겠어.”

    “그래도 선박들이 죄다 박살 나서 고철 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은 게 어디입니까? 조금 손보고 연료를 주입해 주면 금방 재가동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최신예 군함들은 군함용 원자로를 제거했거나 완전히 정지시켰을 테니, 재가동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철컹철컹.

    최진석이 필두로 이끌고 있는 정찰조는 도쿄항에서 하선하자마자 곧장 북상했다.

    다행히 수많은 선박들이 도쿄항으로 몰려드는 와중에도 주요 교각이나 대교가 박살 나지는 않았으니 내륙으로 진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단은 쓸데없이 긴 레인보우 브릿지를 건너서, 히노데 역을 따라 치요다구 중심지까지 진입할 계획이었다.

    도쿄는 규모가 워낙 큰 대도시인 만큼 서울의 어지간한 번화가 못지않게 건물의 밀집도가 상당했는데, 당장 그들이 거쳐 가야 하는 미나토구(港区)만 해도 마천루의 정글이었다.

    하기야 수많은 국가들의 대사관과 유명한 대기업들의 본사가 위치해 있는 곳인 만큼 빌딩이 작으려야 작을 수가 없겠지만, 정찰조 입장에선 오히려 꺼려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높고 커다란 빌딩이 빽빽하게 모여 있을수록 급작스러운 기습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시가전의 특성상 건물이 높고 수가 많으면 적들이 숨을 곳도 많기 때문이다.

    ‘평화적으로’ 시가지에 진입할 수밖에 없는 선봉대가 괜히 시가전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건물 옥상이나 빽빽한 창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게릴라군이 항상 먼저 선공권을 가져가는 만큼, 시가지에서의 전투는 너무나도 불합리하게 진행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한국에는 민간인조차 총을 손에 넣는 순간 무시무시한 정규군으로 탈바꿈하지만, 일본에서는 대부분 그냥 민간인들이라는 점이다.

    “정말 쥐 죽은 듯이 조용하군요. 서울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서울은 어둠 속에서 위험한 것들이 대놓고 돌아다녔다면…… 이곳은 마치 조용한 심해 같습니다.”

    한 대원의 감상에 최진석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중 하나이며, 뉴욕, 런던과 함께 3대 세계 도시로 선정될 만큼 도쿄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광역권까지 포함시키면 거주 인구가 약 4,500만에 달하며, 일본의 모든 정수를 녹여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도시가 심해처럼 고요하다는 것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물론 흑야 사태 당일부터 준비되지 않은 종말과 괴물들의 위협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다.

    다만 이들에게도 일단 자위대와 경찰이 있으니, 어떻게든 사람들을 긁어모아서 임시 대피소나 방공호에서 농성이 가능했을 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상황을 파악했다면 이 거대한 도시에 그대로 남겨진 물자들을 취하기 위해 꽤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을 것이다.

    당장 한국만 해도 서울에서 어마어마한 인구가 희생되거나 타 지역으로 빠져나갔지만, 그래도 서울에 남아 있던 소수 집단이 거점을 잡고 물자를 꾸준히 회수하지 않았던가?

    최진석은 흑야 사태로부터 약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편의점이 ‘비교적’ 멀쩡하다는 사실에 의문을 표했다.

    물론 도쿄에 편의점은 산더미처럼 많이 있을 테니 이런 곳까지 건드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한두 달도 아니고 무려 반년이다.

    기본적으로 지진과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를 많이 겪는 나라라서 재난에 대비한 물자 축적이 잘 되어 있다고 한들, 그것만으로도 반년을 버텼을 리가 없다.

    결국 누구든 바깥으로 기어 나와서 적극적으로 물자를 취해야 정상인데, 그런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게 상당히 의외였다.

    “편의점이나 상가들의 상태를 보니 흑야 사태 초기에 피난민들이 대거 발생하면서 무질서하게 물자를 털어 간 흔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흑야 사태 이후에 꼭 필요한 물자들을 챙겨 간 흔적은 안 보이는군요.”

    예를 들어 상온에도 보관이 가능하고 유통기한이 오래가는 식품, 추위와 어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도구, 무미건조한 생활에 약간의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기호품들.

    서울이었다면 벌써 밀수 조직과 생존자 그룹이 눈에 불을 켜고 회수했을 물자들이 아직도 제법 남아 있었다.

    “그래도 교통이 정체되어 있는 광경을 보면 한국과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최진석은 도로 위에 끝없이 이어져 있는 폐차량들의 행렬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서울에선 밀수 조직과 생존자 그룹이 합심해서 주요 구간의 폐차량들을 처리했지만, 도쿄는 흑야 사태 당일부터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이를 통해 최진석은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결론을 내렸다.

    “지상의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겼군. 자위대와 경찰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야.”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서울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투의 흔적이 이곳에선 보이지 않으니까요.”

    한국군과 경찰은 정말 처절할 정도 잘 싸웠다.

    미처 지저 도시에 입주하지 못한 군대와 경찰은 생존자들을 경상도로 내려보내기 위해 서울역에서 한바탕 공방전을 벌였고, 최진석이 이끄는 알파와 중장갑보병대가 서울역에 당도했을 즈음에는 격렬한 전투의 여파만이 남아 있었다.

    지휘 체계가 반쯤 무너지다시피 한 한국군이 그 정도였는데, 하물며 군대다운 면모가 많이 부족한 자위대와 경찰들만으로는 갑작스럽게 뒤바뀐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힘들었으리라.

    “그래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 오히려 5천만에 가까운 광역권 인구를 침묵시키고, 도쿄 전체를 정적에 빠뜨릴 정도로 호전성과 전투력이 높은 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해.”

    ―예를 들면 빌딩 한복판에 붙어 있는 저것 말입니까?

    오버로드로부터 들려온 갑작스러운 무전에 최진석은 주먹을 들어 올려 정지 신호를 보냈다.

    “포착 위치는?”

    ―현재 최 병장님께서 이동하고 계시는 전방에서 우측으로 3시 방향, 거리는 약 200m에 위치한 고층 빌딩입니다. 역과 가깝습니다.

    “정확한 생김새를 확인할 수 있겠어?”

    ―빌딩의 한쪽 면에 마치…… 벌집? 고치? 그런 비스무리한 구조물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대략 서너 개쯤 있는데, 그곳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게 확인됩니다.

    “브라보 원의 정보에 의하면 서울에서도 비슷한 놈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놈은 특정 위치에 자리 잡고 작은 벌레 같은 탄환을 음속으로 발포한다더군. 일종의 고정 포대였다고 해.”

    ―저건 고정 포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사냥꾼들의 은신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격 가능한가?”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오버로드 1, 2는 내 신호를 기다릴 것 없이 저격을 하고, 우리가 놈들과 교전하면서 시선을 끌 때 따라붙어라.”

    ―라저.

    “놈들이 치요다구 인근에 있다는 건, 사람들이 치요다구로 몰리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서울에서도 북한산 인근에 유독 괴물들이 많았던 것처럼, 놈들은 사람들이 어디에 몰리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대규모 군대가 서울에서의 상황을 전달받고 방비를 철저히 해서 기어이 인간의 터전만큼은 사수해 낸 경상도는 예외였다.

    ‘저놈들이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일본인들도 최근까지 도쿄 지저 도시 입구인 치요다구에 제법 왕래가 있었다는 뜻인데. 대규모 생존자 그룹은 없겠지만 소규모 생존자 그룹은 꽤 있을지도 모르겠어.’

    도시 한복판에서 난장판을 피우면 자신들을 군대라고 생각해서 숨어 있던 민간인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현지 정보가 거의 없는 만큼 현지인들과의 협력은 필수일 터.

    다소의 리스크는 그들이 감수해야 했다.

    “치요다구로 빠르게 진입한다. 놈들이 저격에 반응해서 움직이는 순간 적극적으로 놈들과 교전하며 전술 데이터를 습득하고, 이곳에 자리 잡은 놈들의 생태를 파악한다.”

    최진석의 지휘 아래 알파 대원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엑소스켈레톤의 출력을 높여 길을 가로막고 있는 차량을 거침없이 치워 내거나, 아예 짓밟으며 돌진할 즈음.

    저 뒤에서 묵직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오버로드의 보고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층 빌딩의 고치 같은 것이 퍽 터져 나가더니, 안에 숨어 있던 괴물이 괴성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대물저격총의 위력에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격추당한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고치에서 하나둘씩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놈들은 거미처럼 6개의 다리로 걷고, 사마귀처럼 날카로운 2개의 앞발로 빌딩의 측면을 찍으며 내려왔는데, 그 속도가 벽면을 기어가는 바퀴벌레 못지않게 재빨랐다.

    ‘저런 놈들이 이 근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확실히 상당한 인명 피해가 나왔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이미 경기관총의 세이프티를 해제하고 적들의 예상 출현 장소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골목에서 확 튀어나온 괴물이 낫 같은 팔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으나, 무자비한 탄환 세례에 걸레짝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한때 한국군이었으나 사실상 스스로 전역한 자들이, 타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총질을 하는 기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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