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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88화 (188/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95)

    지상 격벽에서 들었던 대로 지저 도시의 분위기는 꽤 바뀌어 있었다.

    내가 지저 도시보다 지상에 더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영 익숙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뭔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우선 평소라면 널널했을 군부대의 군기가 바짝 잡혀 있었다.

    다들 지저 도시에 입주하면서부터 교대 근무제로 돌아가며 치안 관리와 대민 지원에 상당히 시달렸기 때문에, 적어도 부대 내에서만큼은 병사들을 터치하지 말자는 암묵적인 기조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이전까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고, 그 대신 평소라면 기름칠이나 해서 적당히 무기고에 넣어 뒀을 엑소스켈레톤이 꽤 많이 움직이고 있었다.

    중장갑보병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엘리베이터 앞에서부터 우리를 맞아 주던 부사관들도 어딘가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우리는 이미 정부가 대대적으로 각 지역에 자신들의 수족을 투입시키기 시작했음을 눈치챘다.

    지금 이들의 상태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곧 부대 시찰 예정인 사단장을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찔리는 구석은 손으로 세기도 어려울 만큼 많이 있고, 또 윗대가리들의 압박이 심해지면 안 그래도 힘든 생활에 더 많은 제한이 생길 거라는 것쯤, 부대 제일가는 폐급 병사라고 해도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우리와 붙어먹으면서 꿀을 빨아 왔지만, 곧 정부에서 보낼 교대 근무자들 겸 관리 감독 인원들이 도착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스트레스가 치솟을 것이다.

    지저 도시는 언뜻 도시의 기능이 거의 완벽하게 작동 중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말 살아가는 데에만 문제가 없을 정도의 인프라가 깔려 있는, 말하자면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는 도시였다.

    생각해 보라. 밀수 조직들이 악착같이 투자해서 개조한 북부 지구 외에 달리 유흥을 즐길 만한 장소가 어디 있겠나?

    그나마 VIP 친인척들을 위한 남부지구는 스포츠 시설이나 카페, 음식점 등이 마련되어 있지만 노래방이나 PC방 같은 건 없었다. 하다못해 서울에서 발에 차일 정도로 흔했던 보드게임방조차도.

    결국 북부 지구 주둔군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정해져 있었다.

    밀수 조직들이 군부대와 유착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지상에서 이것저것 공수해 왔는데, 대표적으로는 게임이 설치되어 있는 콘솔 게임기나 고사양 PC였다.

    전기와 설치 공간만 있으면 지저 도시에서도 ‘싸지방’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군인들은 좋아라 했고, 그들은 힘든 근무를 끝마치고 나면 우리가 제공해 준 ‘편의’를 즐기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밀수범들이 가져온 음식을 사 먹고, 밀수범들이 가져온 게임기로 놀고, 밀수범들이 가져온 운동기구나 전문 서적으로 틈틈이 자기 계발을 했다.

    그랬던 이들이 머지않아 당연했던 편의들을 즐길 수 없게 된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군인들이 피와 땀을 흘려 약속받았던 휴가, 외출을 눈앞에서 잘라 버리고 PX와 싸지방 무한 통제, 거기에 야간 TV 연등 금지를 해 버리는 꼴이지.’

    군대는 상당히 폐쇄적인 집단이다.

    폐쇄적인 집단인 만큼 엄격한 통제와 인간적인 대우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큰 문제가 발발하지 않는데, 유독 대한민국 군대는 역사적으로도 군인들의 ‘인간적인 대우’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제2의 무한 통제가 군인들의 코앞까지 닥쳐 왔다.

    “분위기가 안 좋군요. 일단 서둘러 빠져나가야겠습니다.”

    김명호가 그리 말하자 차도식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담배를 껐다.

    아무래도 담배까지 피울 수 없게 될 군인들 앞에서 사제 담배를 뻑뻑 피웠다간 큰일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남부 지구 소속이 아닌 밀수범들을 먼저 비밀 루트로 빙 돌아서 복귀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우리 조직이 규모가 있는 만큼 군인들의 협조를 받아 비밀 루트를 이용하지 않으면 금세 움직임이 발각될 테니까.

    “동생은 어쩌게?”

    “전 어차피 남부 지구 소속인 데다, 일전에 서부 지구에서 사건 하나 터졌을 때 자원입대해서 군인 신분을 등록해 뒀어요. 여기 남아서 정보 좀 캐다가 따로 움직일 테니, 제가 호출하기 전까지 북부 지구는 일단 대비만 해 두세요.”

    “놈들을 칠 대비?”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어찌 됐든 우리 세력은 더 이상 지저 도시와 양립할 수 없다. 정확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거대한 지반을 뚫고 내려오고 있는 놈들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지저 도시 임시 정부가 원하는 것은 그저 모든 것이 자신들의 통제하에 놓이는 것.

    디그러쉬가 원하는 것은 무한 동력 기관을 이용해 자신들의 괴팍한 욕망을 해소하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은 야망을 이루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무한 동력 기관 그리고 지저 도시에 남아서 굳이 생매장당할 이유가 없는 무고한 시민들을 동시에 지상으로 빼돌리는 것이다.

    서로가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른 데다 하나같이 엇박자를 놓고 있는 상황이라, 제삼자 입장에서 이 상황을 보면 무슨 수를 써도 풀지 못할 매듭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임시 정부에서 보낸 따까리들이 부대에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차도식파 인원을 보내 버리고, 평소 이것저것 찔러 주면서 사이가 돈독해진 행보관에게 군복을 얻어 냈다.

    오버로크병에게 부탁하면 이름과 계급장을 박는 건 담배 피우는 시간보다 짧게 걸렸기 때문에 다행히 내 군복은 금세 준비되었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중장갑보병이었다지? 그중에서도 특출난.”

    “군 생활 하면서 저를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들은 죄다 떠들고 다녔을 테니 딱히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정부가 숨긴다고 숨겼겠지만 우리와 훈련 사유로 접촉했던 특수부대나 몇몇 군의관, 정부 인사 등등은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흘린 소문들이 있고, 그 소문이 커뮤니티로 퍼지다 보면 다들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것이 된다.

    그들 사이에서 중장갑수색대라는 유령 부대는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이라면 한 번쯤 들어 본 적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유명한 유령 부대다.

    “자네를 병사들이랑 같은 짬으로 굴릴 수는 없으니까 일단 상황 봐서 인재 영입했다는 명목으로 부사관 진급 시켰다, 대충 이렇게 때우고 하사 계급장 달아 준 거야. 지금 돌아가는 상황 보면 알겠지만 나처럼 짬밥 더럽게 처먹은 놈도, 그 넉살 좋은 대대장도 바짝 긴장해 있는 상태야. 그러니까 돌아다니면서 뭔 짓을 하든 상관은 없지만, 어지간하면 우리 부대에 피해는 주지 않게끔 해.”

    “그 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그보다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 오는 겁니까?”

    “정부 고위 관료들이 대외 활동을 할 때 특별히 경호해 주는 부대가 있거든. 대통령 경호팀이랑은 좀 달라. 그것들도 일단 군인은 맞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군인이랑은 좀 다르다고 하더라고.”

    나는 일단 남부 지구 주둔군의 엑소스켈레톤 정비를 담당하는 하사 역할을 연기하기로 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군용 엑소스켈레톤에는 조예가 좀 있기 때문에 조립부터 분해, 손질까지, 못하는 게 없다. 군인들이 총기 수입 하나는 빠릿하게 잘하는 것과 같다.

    일단은 군복이 아니라 정비반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대충 용접 마스크를 착용한 채 정비소에서 설렁설렁 시간을 때웠다.

    다행히 부대 사람들은 모두 나와 안면을 텄기 때문에, 특히 현역 군인들은 나와 형, 동생 하는 사이였다.

    나는 정비소에서 열심히 엑소스켈레톤 장갑에 광을 내고 있는 한 상병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때 빼고 광내고 하는 건 좋은데, 어차피 교대 근무자들도 온다면서? 그럼 너흰 오히려 발 뻗고 편히 쉴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니냐? 그런데 왜들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어휴, 말도 마십쇼, 형님. 아니, 박 하사님. 저희가 지상탐색조(밀수 조직)와 붙어먹는 꼴을 들키면 안 된다고 해서 싸지방도 얼마 전에 싹 철거하고, 식사 추진도 지금까지 묵혀 놨던 전식이나 국가에서 배급해 준 식자재들로만 하고 있습니다. 씹을 거리나 담배? 죄다 압수당했습니다. 못 참는 놈들 분명 있을 테니까 아무리 막아도 몰래몰래 할 거라면서. 그렇게 걸릴 바에는 차라리 다 압수해서 일 끝나고 나면 돌려준답니다.”

    “싸지방 철거, 간식이랑 담배도 압수, 사제 음식도 금지, 그럼 지금 너희한테 남는 게 뭐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전역 말고는 잘 모르겠슴다.”

    이런 세상에 전역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니. 지저 도시에 입주한 청소년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너희가 뺑이치는 건 확정인데.

    뭐, 불만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으니 적당히 민방위나 예비군까지 끌어들여서 순환 근무제를 도입하겠지만, 더 이상 미래가 없는 지저 도시에 그런 이벤트는 생기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이들에게는 몹시 불행한 일이지만, 차라리 내게는 잘된 일이기도 했다.

    어차피 쿠데타를 계획 중이었는데 무능한 윗대가리들이 먼저 불씨를 당겨 준다면 나야 나쁠 거 없지.

    어찌 보면 참 혜자스럽지 않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까지 착착 쌓아 주고 계시니까.

    2031년의 해가 밝았음에도 아직까지 이 좁디좁은 세상이 자신들의 통제하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저들의 오만함, 나는 개인적으로 싫어하지 않는다.

    공급과 수요가 동시에 존재해야 경제시장이 활성화되듯, 무능한 윗대가리와 억압받는 아랫것들이 동시에 존재해야만 쿠데타가 성립될 것 아닌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대한민국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잖아? 어차피 금방이야, 금방. 며칠 정도 건강단식원에 입소했다고 생각해.”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근데 인간적으로 담배 못 피우는 건 진짜 빡칩니다.”

    “간헐적 단식은 몸에 좋다던데, 간헐적 흡연도 몸에 좋지 않을까?”

    “아으, 입이랑 손이 근질거려서……!”

    “옜다.”

    나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하는 녀석에게 내가 씹으려던 껌 한 통을 던져 주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지상에 오래 있다 보면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기만 해도 근육이 굳어 버린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지상에 나가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껌을 씹거나 스트레칭을 한다.

    아차 하는 순간이 감각이 마비되거나 근육이 말을 듣지 않으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오, 오오! 감사합니다, 박 하사님!”

    “담배 금단 증상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주는 거야. 남들 앞에서 대놓고 씹지 마라, 걸리면 뒈진다.”

    허겁지겁 껌 하나를 꺼내서 까먹는 녀석을 보며, 나는 기름과 쇠 그리고 먼지 냄새로 가득한 정비소에서 한동안 죽치고 앉아 있었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을까. 전 부대원들이 연병장 한복판으로 소집되었다.

    정비소에 있던 우리도 ‘게으르지 않다’는 모습을 어필하기 위해서 일부러 정비복 차림 그대로 소집되었다.

    윗분들 시선에서 취사병은 식사 추진을 하고 있을 때, 정비병은 정비를 하고 있을 때 가장 흐뭇해 보이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대 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원이 집결했을 때, 연병장에서 곧장 이어지는 부대 정문 게이트가 열렸다.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우리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송 트럭과 장갑차 그리고 차량들을 호위하듯 당당하게 오와 열을 맞춰 주변을 에워싸듯 진군하고 있는 중장갑보병들이었다.

    지금까지 중부 지구에서 높으신 분들을 모시고 있던 중장갑보병 부대였다.

    하지만 진짜 주목할 만한 대상은 그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곳은 중장갑보병들만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였으니까. 중장갑보병은 발에 차일 만큼 많이 있다.

    진짜는 그들의 가장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부대였다.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지는 않았지만 전원 디지털 무늬가 없는 흑복 차림이군.’

    특이하게도 그들에겐 계급장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계급장이 있어야 할 곳에는 태극기 문양만 박혀 있을 뿐이었다.

    ‘대테러대응반이 어딜 갔나 싶더니만 여기 있었군.’

    대한민국 내부에서 테러리스트에 의해 발생하는 각종 테러로부터 국민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는 특수팀.

    일반적인 평원, 산악, 바다, 공중에서 전투하는 것을 상정해 둔 군인들과 다르게, 주로 시가지나 특정 건물 내부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음모를 저지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이었다.

    지상에 나갔을 때만 해도 왜 이 대단한 양반들이 보이지 않았나 의문이었는데, 사실 흑야 사태 발발과 동시에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들을 데리고 누구보다 먼저 지저 도시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즉 중앙에서 진짜 꿀을 빨던 양반들이 외부 근무자들에게 괜히 트집을 잡으러 나온 셈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어차피 기득권의 노예로 전락한 놈들이군. 등 뒤에서 칼침을 박아도 꿈자리가 뒤숭숭하지는 않겠어.’

    다른 모든 이들이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오직 나만은 계획을 변경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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