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87화 (187/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94)

    지상을 좀먹고 있던 커다란 암 덩어리는 숱한 피를 흩뿌린 결과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절개했으나, 아직 우리에겐 지구라는 거대한 몸뚱이를 잠식하려 드는 바이러스 해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대(大)를 목표로 삼으면 언제나 소(小)가 괴로운 법이다.

    고작 말벌 몇 마리를 막기 위해 수천, 수만 마리의 벌들이 달려들어 순간적으로 온도를 높여서 죽이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백혈구가 크게 증가하고 체온이 38도에서 39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그저 ‘살아남는다’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를 목표로 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희생이 뒤따르는 것이다. 단지 이번에는 그것이 지구 스케일로 커졌을 뿐이지.

    최진석과 존 함장은 상황이 긴박하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최소한의 재정비만을 끝마친 후, 인천항에서 출항해 곧장 일본으로 향했다.

    중간에 김해나 부산항에서 1차 보급을 거칠 테니 일본에 도착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B 그룹이 맡은 주요 임무는 총 3개.

    1.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본 도쿄에 있을 지저 도시와 접촉.

    2. 일본 정부와 미 함대와의 협력을 통해 고급 인력과 복구 자재를 확보할 것.

    3. 다네가시마우주센터 및 미 7함대를 최대한 빨리 복구.

    접근 난이도부터 빡빡한 스케줄까지, 욕이 절로 튀어나오는 임무다.

    하지만 A 그룹과 B 그룹이 일을 동시에 진행해서 타이밍을 맞추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고 뭐고 다 같이 ✕되는 것이니, 결국 하기 싫어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한다.

    당장 A 그룹의 진두지휘를 맡게 된 나만 해도 다음과 같은 임무를 실수 없이 완수해야 한다.

    1. 지저 도시 주민 피난 유도.

    2. 지저 도시 및 디그러쉬 무력 진압.

    3. 무한 동력 기관 탈취.

    4. 탈취한 무한 동력 기관을 김포공항에서 여객기에 실어 다네가시마우주센터로 이송.

    5. 타르 덩어리들의 공세로부터 무한 동력 기관을 최대한 지켜 내면서 우주선, 혹은 로켓에 탑재시켜 태양을 향해 발사.

    5-A. 만약 해당 사태로 GPS가 정상 복구된다면 그 순간을 노려 우주정거장과 교신 후 도움 요청.

    최대한 희생을 줄이면서, 무한 동력 기관을 안전하게 지켜 내고, 무한 동력 기관을 성공적으로 우주에 쏴 올리기까지 해야 한다.

    이게 A 그룹인 우리가 해내야 할 임무다. 이제 좀 감이 오는가?

    고작 사이비 종교라는 암 덩어리 하나를 제거하기 위해 단순히 군대를 투입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국운(國運)이 걸린 총력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지. 이럴 경우 국운이 아니라 세계운인가?’

    자조하듯 쓴웃음을 내뱉으며, 나는 최진석이 믿고 남겨 둔 알파 대원들에게 서울 생존자 거점을 부탁했다.

    사이비 종교라는 위협이 하나 사라지면서 인간들의 운신이 조금 더 편해졌다. 게다가 원전과 정수 처리 시설까지 있기 때문에 일손만 있으면 주변 인프라를 복구하는 것도, 생활 터전을 넓히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머지않아 지저 도시에서 올라온 피난민들을 다시 수용해야 할 테니, 나는 지상군에게 이미 장악해 둔 반포동에 이어 사당동까지 확보할 것을 요구했다.

    동작역에서 일직선으로 쭉 내려가기만 하면 나오는 이수역을 통해 사당동으로 매우 쉽게 진입할 수 있는데, 사당동에도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부지가 넓은 학교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 정도 규모의 지역을 확보하면 피난민을 10만 명 단위로 수용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미 수경 재배가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좀 많이 늘어도 당장 식량이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생필품이나 식량이 부족하다면 KTX를 통해 경상도에서 부족한 분을 가져오면 된다.

    차도식파와 함께 지저 도시로 복귀하기 전, 나는 어째서 자신의 두통이 끊이질 않는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우습게도 답은 금방 나왔다.

    대통령이 각 부처 장관과 전문가들 그리고 시자체의 협력을 통해 하나하나 섬세하게 다뤄야 할 민생을 사실상 나 혼자서 이끌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전과 정수 처리 시설 확보, 대규모 아파트단지 확보, 경상도 수복, 사이비 처리, 이후의 거점 확보 및 피난민 수용 계획까지, 전부 일일이 가이드라인을 짜서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었으니 내 머리가 진즉에 깨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죽어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는 역시 그 일 중독자로부터 DNA를 확실하게 물려받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이래서 모든 국정을 혼자 떠맡아야 했던 역대 왕이나 황제들이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단명하거나 미쳤구나.

    역시 책임이라는 건 함부로 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또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서울 한복판의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쿠르르르르르! 콰가아앙!

    “빌어먹을 새끼들. 서울의 금싸라기 같은 땅을 대체 얼마나 파헤쳐 놓으려는 건지.”

    장갑차 위에 걸터앉은 차도식이 담배를 입에 꼬나문 채 중얼거렸다. 그건 나도 공감하는 바였다.

    놈들이 지반을 파고들어 침식하기 시작하면서 튼튼한 콘크리트와 강화철근, 아스팔트로 다져진 중심부가 크게 무너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서대문구, 종로구, 중구를 포함한 정중앙에 역대 최대 규모의 인공적인 구멍을 뚫고 있었다. 마치 인간들이 금과 다이아를 캐기 위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반을 파헤쳤던 것처럼.

    나는 놈들이 어째서 빠르게 지저 도시로 향할 수 있도록 좁은 구멍을 파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는데, 저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넓은 구멍을 파는 이유는 제 동족들을 한꺼번에 지저 도시로 들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덕분에 지저 도시로 복귀할 때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구멍이 뚫리면서 주변의 모든 인프라가 실시간으로 붕괴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래도 저 구멍이 대책 없이 용산구까지 커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과 놈들이 엄청나게 거대한 구멍을 12km나 파느라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남아 있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11년 전, 그러니까 처음 지저 도시 프로젝트가 발표됐을 때만 해도 다들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뒷골목에서 물장사나 하던 우리 같은 놈들도 알 만큼 떠들썩했지.”

    “그때 서울 땅값이 전례 없이 폭증했지요. 형님께서도 사업 투자가 아니라 서울 땅이나 건물이라도 좀 더 사 두실 걸 그랬다고 후회하셨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런 건 잊어, 인마! 그래도 뭐…… 결과적으로는 부동산 코인에 탑승 안 한 우리가 승자 아니냐?”

    차도식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고 실시간으로 땅과 건물이 무너지는 소음을 들으면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이래저래 다사다난한 2030년이었고 또 2031년이 될 테지만, 그래도 우리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야. 적어도 줄 하나는 확실하게 잘 잡았잖냐.”

    나를 바라보며 익살스럽게 웃는 그를 향해 나는 차마 욕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그를 발판으로 이용했듯, 그 또한 나를 줄로 잡았던 것뿐이다. 그저 그뿐인 관계였다.

    “그러고 보니 지저 도시에 복귀하면 더 이상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역시 이번만큼은 정부의 눈을 속이기가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겠지. 디그러쉬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놈들 발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숨어 버렸고, 그 많던 북부 지구 인간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지상으로 빠져나갔으니, 아무리 눈치가 없는 정부라도 눈치를 채는 게 정상이야.”

    나는 김명호가 받은 첩보의 내용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내게 정보를 가져다주는 사람들만 해도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경상도부터 서울, 지저 도시까지 1일 단위로 수십 개가 넘는 첩보와 은밀한 보고들을 받아 왔다.

    적어도 지상에는 아직까지 내가 직접 나서야 할 만큼 큰 문제가 발생할 징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직접 A 그룹 지휘를 맡아 지저 도시로 향하는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차 사장님. 바깥에서 재미 좀 보셨습니까?”

    “우리야 항상 하던 대로죠. 지난번에 부탁하셨던 담배랑 애들 간식 받으십시오.”

    지저 도시 남부 격벽을 개방해 준 당직사관은 사람 좋게 웃으며 차도식이 던져 준 담배와 씹을 것이 한가득 들어 있는 자루를 넘겨받았다.

    우리가 지상에서 뭘 하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격벽 관리병과 장교들은 최대한 우리에게 빌붙어 먹으며 뽕을 뽑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는 영세 밀수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사로이 뇌물을 뿌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들과 가깝게 지낼수록 더 많은 편의와 정보들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예상대로 차도식파가 궤도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직전, 당직사관이 조심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밑으로 내려가시면 조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아래에서 무슨 일 있습니까?”

    “정부가 지저 도시 전체에 비상경계령을 발령했습니다. 현재 주민들의 사사로운 지구 간 이동이 일부 제한된 상태이며, 지저 도시 입주 당일부터 쭉 중부 지구를 지키고 있던 중장갑보병 및 청와대 경호팀이 남부와 북부 지구에 곧 사람들을 보낼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명목상으로는 장기간 근무에 지쳐 있던 장병들에게 교체와 휴식 기간을 주어 노고를 치하하게 한다지만, 속내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줄곧 중부 지구에 처박혀서 정부 고위 관료와 VIP들을 지키고 있던 군부대도 장기간 근무한 건 똑같으니, 그 속내야 안 봐도 뻔하죠.”

    남부 지구와 중부 지구 중장갑보병 부대가 우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자신들의 수족을 부려 직접 꼬투리를 잡아서 이쪽의 움직임을 원천 봉쇄하려는 것이 목적일 터.

    ‘정치질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양반 아니랄까 봐, 하는 짓도 참 정치인스럽군.’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를 돌아보면 정치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터지곤 했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한때나마 군사정권이 들어섰던 시기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역사를 반복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면 치워 내야 할 것은 치워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경상도에서 쓸모없는 똥별과 장교들을 싹 처형했던 것처럼.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가족분들이 계십니까?”

    “예, 아들은 동부 지구에서 일하고 있고 아내가 북부 지구에서 작은 가게를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좋은 정보를 주신 대가로 저도 좋은 정보 하나 드리겠습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가족분들과 언제라도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십시오.”

    “그게 무슨……?”

    “머지않아 알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엘리베이터 관리병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당직사관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자, 곧 엘리베이터의 격벽이 닫히면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번에 지저 도시로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기가 쉽지 않겠는데.”

    “역시 지상에 있을 병력들을 좀 더 데려왔어야 했습니다.”

    “아니, 그랬다간 안 그래도 경계당하고 있는 우리의 규모나 목적이 발각될 겁니다. 이번 작전에 지상군은 끌고 들어오면 안 됩니다.”

    차도식과 김명호가 불안감을 못 이겨 내뱉은 걱정에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리고 이미 전쟁을 한 번 겪은 지상군을 또 이런 일에 투입할 수는 없죠. 그런 건 무식하게 병력만 투입하면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하는 무능한 독재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지금껏 지저 도시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며 차도식파의 달달한 젖꼭지를 빨고 있던 자들에게, 이제 정당한 대가를 받아 낼 때가 왔다.

    어차피 다들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우리와 함께해 줄 거다.

    머지않아 지저 도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태와 직면하게 될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