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86화 (186/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93)

    사람에게는 저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대체적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이거나, 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소망, 혹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한다는 등의 동기부여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교류하고, 화합이나 투쟁을 벌이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은 곧 사회성의 결여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노숙자들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길바닥에 늘어져서 잠만 퍼질러 자는 것도, 자신의 인생은 글러 먹었다며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서 컴퓨터만 하는 백수도, 삶이 너무 힘들어서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는 빈자들도.

    뚜렷한 목표와 삶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죽음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고,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자기암시를 걸듯이 삶의 이유를 하나씩 늘려 갔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취업. 취업 다음은 내 자택과 자가용 마련. 그다음은 결혼. 결혼 후에는 훌륭한 가장 노릇 후에 안락한 노후 준비. 마지막 황혼기를 거치고 나면 최후에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자연사.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최대한 늦추고자 이런저런 이유들을 들이밀면서, 넌 지금부터 이것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하늘이 검게 물들고 괴물들이 인간을 습격하기 시작한 그날, 내가 열심히 자기암시를 걸어 두었던 삶의 이유들이 완전히 개박살 나 버렸지만.

    그도 그럴 것이 세계가 갑작스럽게 맞이한 종말은 소시민의 입장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스케일의 재앙이었다.

    경비업체에 취직하는 대신 밀수범이 되었고, 자택과 자가용을 마련하는 대신 닥치는 대로 물자와 정보를 긁어모았다. 운명적인 여자와 결혼하는 대신 나를 지지해 주는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훌륭한 가장 노릇을 하는 대신, 그들의 지휘관이자 지도자 노릇을 하며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럼 이제 뭐가 남았지?

    “안락한 노후 준비.”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뜬 순간, 안구가 따끔거릴 만큼 눈부신 백열등 불빛에 나는 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때마침 옆에서 바이털 체크를 하고 있던 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인터폰으로 누군가를 호출했다. 그러자 곧바로 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병실에 우르르 몰려 들어온 것은 아마도 이곳에서 나를 치료해 줬을 터인 의사들과 여전히 군복을 입고 있는 동료들이었다.

    차도식, 김명호, 최진석 그리고 USS 퍼니셔호의 함장이자 미국과의 유일한 연결 줄인 존 함장까지.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사흘 내내 잠들어 있다가 이제야 일어날 수 있는 건지, 원.”

    “그래도 일어났으니 다행 아닙니까?”

    “의사 선생님, 상태는 좀 어떤 것 같습니까?”

    “일단 간단한 검사부터 해 봐야 알겠지만 인식능력이나 사고능력, 활동능력 등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의사가 펜 라이트의 밝은 불빛을 내 눈에 들이밀길래 나는 손을 휘휘 저어 치워 냈다. 눈이 빛에 정상적으로 반응한다는 것만 알면 그만이니 의사도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다.

    “후, 머리야……. 그나저나 내가 사흘이나 잠들어 있었다고?”

    “정확히는 사흘하고도 반나절이나 잠들어 있었지. 다들 점심 먹다 말고 올라왔어, 인마.”

    차도식이 껄껄 웃으며 자신의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 냈다.

    “한성 씨가 전쟁을 준비하기 전부터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건 이미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한바탕 격전까지 치르고 부상입은 상태로 실려 왔으니 사흘간 잠들어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김명호가 차도식의 말을 보충하듯 설명하자 나는 그제야 간악한 사이비 무리인 흑연교로부터 지상의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아 왔음을 실감했다.

    “전후 처리는 어떻게 됐어? 놈들의 잔당은 남아 있나? 미처 침몰시키지 못한 쇄빙선이나 군함은 어떻게 했는데?”

    “진정해. 그것도 우리가 다 처리했어. 흑연교의 수뇌부를 잃은 사이비 무리들은 구심점을 잃어 한순간에 오합지졸이 되었고, 그 뒤에는 일방적인 학살이 있었을 뿐이야. 수뇌부를 처치하기 전보다 사상자 비율이 크게 줄었을 만큼 손쉬웠어.”

    “그 말대로일세. 강습 부대와 신기동함대도 적극적으로 놈들을 박멸하는 데 기여한 만큼, 놈들의 씨를 확실하게 말려 버렸다고 확신할 수 있네.”

    이번에는 군사적 지휘권 일부를 가지고 있는 최진석과 존 함장이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그래, 내가 사흘간 병상에 뻗어 있을 때도 주변 사람들은 내 가슴에 칼을 꽂거나, 서로 더 많은 이권을 챙기기 위해 내전을 벌이지 않았구나.

    오히려 내 지휘와 계획 없이도 알아서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며 내가 눈 뜨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구나.

    누구 한 명쯤은 권력이나 물자, 군사력이 샘나서 반기를 들었을 법도 하건만. 오히려 다들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열심히 생존자 그룹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미래그룹 총수를 상대로 블러핑을 했던 것처럼 정말로 서로가 먹고 먹히는 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겠지. 그러기엔 다들 추구하는 바가 너무나도 달라.’

    차도식파는 조직의 번영을, 최진석은 안정과 평화를, 존 함장은 조국 수호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서로 가지고 있는 힘이나 동원할 수 있는 수단, 목표가 신기하리만치 엇나가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안심하고 서로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상대가 개인적인 이유로 나를 건드릴 리가 없겠지, 하고 당연하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굳이 진부하고 골치 아픈 평화 협정이나 이윤 분배 따위 하지 않아도, 이들은 서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알아서 선을 지키고 있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나였다면 벌써 한둘쯤 정치질이나 무력으로 집어삼키고 시작했을 텐데.

    나는 문득 자신이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과격한 목표들만 정하는 안 좋은 습관이 있음을 자각하고, 피식 웃어 버렸다.

    나는 언제까지고 소시민이다.

    소시민치곤 너무나도 많은 죽음과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챙겨야 할 가족도 있고, 나는 아직 너무 젊다.

    세상이 빛을 되찾고 모든 것을 원상복구시키는 그날, 나는 평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어느 기업의 면접장으로 걸어 들어가겠지. 아니면 적당히 빼먹은 재산으로 돈 많은 백수의 삶을 영위하든가.

    어느 쪽이든 상상만 해도 즐겁다.

    그러니 즐거운 건 다 함께 나눠야지.

    “주요 간부진까지 모두 회의실로 불러 모아요. 전후 처리와 지역 안정화, 거점 확장도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어요.”

    “동생, 일단은 좀 더 쉬는 게 어때? 이제 막 깨어난 참인데…….”

    “지저 도시에 있는 무한 동력 기관을 저 타르 덩어리 같은 놈들에게 뺏기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놈들은 에너지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놈들이에요.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서 나이트워커나 나이트워치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무한 동력 기관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손에 넣는 순간 걸리적거리는 인간들은 다 죽어 나갈 겁니다.”

    이미 우리의 선조들에게 한 번 당한 전적이 있는 놈들은 이번에야말로 인간을 확실히 지구상에서 멸망시켜 버리고, 무한 동력 기관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에너지를 안전하게 공급받으며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렇게 인류 대신 지구를 장악한 놈들은 언젠가 인류조차 아직 도달해 보지 못한 화성까지 도달할지도 모르지. 우스갯소리처럼 들려도 놈들이 무한 동력 기관을 손에 넣기만 하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게 될 것이다.

    ‘무한’이라는 단어는 그 의미만으로도 인간의 상상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법이니까. 어쩌면 우주의 법칙마저도.

    그러니 ‘안전하게’ 처분해야 한다. 가능하면 놈들과 함께.

    환자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회의실에 핵심 인물들과 조직 내 주요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우리가 이뤄야 할 마지막 목표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목표만 해결하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추위도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비록 인류 사회가 크게 망가지긴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면 금세 인프라를 복구하고 빠르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우린 뭘 하면 됩니까?”

    “우선 가장 가까운 일본 지저 도시 정부와 접선한 다음, 그곳에 신세 지고 있는 미 해군 태평향함대 소속 7함대와 협력할 겁니다.”

    주한 미군이나 주일 미군들은 일찌감치 군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귀환해 버렸겠지만, 하필 빠르게 움직일 수 없는 함대를 운용하고 있는 7함대는 어쩔 수 없이 일본에 남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뒤늦게 본국에 귀환했을 때는 이미 지저 도시 출입구가 폐쇄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그 대신 형편없는 자위대만으로는 치안을 유지할 수 없는 일본 정부에게 치안을 대신 맡아 주겠다며 지저 도시에 입주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7함대 사령관이든 반드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령 함대가 되어 정처 없이 바다 위를 떠돌든가, 당시에는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지상에 남아야 했을 테니까.

    “7함대와는 나 역시 협력하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것과 이번 목표가 어떤 연관성이 있나?”

    본래 7함대 소속 줌왈트급 구축함 함장인 존 해럴드가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나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펼쳐서 일본 본토 서남부 해역에 위치한 한 섬을 가리켰다.

    “요코스카항에 주둔하고 있는 미 7함대의 협력을 받으면서, 전문적인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대거 동원되어야 합니다. 우주선을 쏴 올려야 하니까요.”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이 판국에 뜬금없이 우주선을 쏴 올린다고?”

    “제대로 들으신 거 맞습니다. 무한 동력 기관은 문제 그대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발생시키고 있는 장치인데, 이걸 지구에서 타르 덩어리 놈들로부터 지키면서 안전하게 처분하는 건 극히 힘들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에 꾸준히 내리고 있는 검은 비는 서울 지반을 파고들고 있어요. 무려 지저 12km 아래에 있는 무한 동력 기관을 정확히 감지하고 모여들고 있는 겁니다. 태양열로는 더 이상 만족 못 하는 놈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마침내 하늘을 뒤덮고 있던 모든 놈들이 서울에 집중되면……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그래. 인간의 힘으로 무한 동력 기관을 처분할 방법이 있다고 한들, 현시점에서 암흑 물질들로부터 그것을 지켜 내며 처분하기는 몹시도 요원하다.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그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건데, 2030년의 우수한 기술력에 의해 탄생한 우주선과 로켓을 빠르게 보수해서 무한 동력 기관을 싣고 우주로 날려 버릴 생각이다.

    목표 지점은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태양. 에너지에 환장하는 놈들이라면 무한 동력 기관이 실린 우주선이 태양으로 향한다는 걸 알면서도 뒤쫓지 않고서는 못 배길 거다.

    “요즘은 SF 소설을 이렇게 써도 욕먹어.”

    “그럼 더 현실적이고 좋은 방법 있습니까? 가장 깊은 마리아나해구에 무한 동력 기관을 떨군다? 잠수함을 동원해서 빠르게 해저로 내려보내도 놈들이 먼저 차지할 겁니다. 그럼 어디 마그마가 들끓는 화산에 떨궈야 하나? 활발하게 활동 중인 화산은 한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앞과 같은 이유로 놈들에게 먼저 빼앗길 겁니다.”

    “디그러쉬의 채굴 장비를 이용해서 맨틀까지 파고 들어간 다음 떨구는 건…… 불가능하겠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데다 애초에 디그러쉬의 장비로도 12km 아래까지 더 파낼 수 있을지 의문이야.”

    “그냥 물리력으로 무한 동력 기관을 박살 내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 왜 저런 소리가 안 나오나 했다.

    “만약 폭발물이든 뭐든 써서 무한 동력 기관을 지구 내에서 처분했다고 치자. 그럼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저것들은?”

    “아.”

    “세계 최강국인 미국도 군사력으로 지구를 빈틈없이 메꿔 버린 저놈들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지저 도시로 후퇴했어. 무한 동력 기관을 지구에서 처분해 버리면 저놈들을 처분할 방법이 사라진다고.”

    그럼 우린 평생 추위와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 또한 놈들이 주기적으로 만들어 내는 괴물들에게 고통받는 건 덤이겠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인류의 미래에 희망 따윈 보이지 않는다.

    영원히 두더지 신세로 간신히 인류의 명맥만 유지하면서 살아가든가, 놈들의 변덕으로 대침공을 당해서 멸망해 버리든가 하겠지.

    “그러니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한 동력 기관을 멀쩡한 상태로, 지구 전역을 뒤덮고 있는 저 검은 것들과 함께 지구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는 거잖아. 덤으로 뒤탈 없이 깔끔하게 둘 모두 처리해야 하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사람들이 할 말을 잃고 서로 눈치만 봤다.

    무한 동력 기관만 처리한다면 쉽다. 하지만 저놈들을 인류의 힘으로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 배드 엔딩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놈들에게 무한 동력 기관을 빼앗긴다 > 배드 엔딩

    둘 다 안전하게 우주에서 처리해야 한다 = 굿 엔딩

    “이제 사태 파악이 좀 되십니까?”

    내가 화이트보드에 써 내린 간략한 요약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생존자 그룹은 현 상태를 유지하고, 모든 가용 인력을 둘로 나눕니다.”

    나는 크게 A와 B 그룹으로 나눠서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적어 나갔다.

    A 그룹은 지저 도시에서 지금쯤 디그러쉬에 의해 ‘씹뜯맛즐’을 당하고 있을 무한 동력 기관을 안전하게 확보하여, 수송기로 가장 가까운 우주센터인 다네가시마우주센터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는 것.

    B 그룹은 일본 정부, 미 7함대와 접선 및 협력 관계를 구축해서 발 빠르게 우주센터와 함대 복구 작업에 들어가는 것.

    이 모든 일을 아무리 늦어도 2개월 안에 끝내야 한다.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일 수도 있고.

    “저는 A 그룹에 남겠습니다. 지저 도시에서의 일은 반드시 제 손으로 끝내야 하거든요. 최진석, 너는 B 그룹 담당이다. 존 함장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을 처리해.”

    가능성이 한없이 희박해 보이는 계획이라는 걸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는, 그야말로 배수의 진을 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지막 목표에 모두가 사활을 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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